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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반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1초 (1)
“최재환이는?”
“예, 문화의 밤 행사 갔습니다.”
박 상무의 대답을 들은 차 대표는 유리테이블에 놓인 담뱃갑을 손에 집었다. 그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왼손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눈썹을 추켜든다.
“어떤 것 같아?”
“예상보다 이시현이 너무 잘해줬습니다.”
드라마의 높은 완성도, KIS의 밀어주기, 그리고 이시현의 연기가 3박자를 이뤄 회사도 예측하지 못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회사가 물밑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긴 했지만,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만 해도 차 대표가 무리하게 움직였다는 얘기가 임원회의에서까지 나온 상황이었는데···
“난 예상하고 있었는데?”
“예?”
박 상무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차 대표의 농담이 그와 안 어울린다는 듯이 쳐다본다.
“나가 봐.”
“아, 대표님.”
박 상무가 무릎을 반쯤 펴다가 멈췄다.
“왜?”
“세러데이 말입니다.”
“거기는 왜?”
“이번에 우리 많이 도와줬는데, 이시현이 얼굴 한번 비치는 게 어떤가 해서요.”
세러데이에서 이시현에 대한 기사를 많이 내줬다. 정확히는 VVW의 악의적 기사를, 더욱 악의적으로 다듬어서 내줬다. 그래서 지금 이시현 팬들의 항의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서 기자라는, 이번에 결혼한다는 친구 얘기하는 건가?”
“예, 그쪽 편집부장이 은근히 바라는 눈치라서요. 식장에 이시현이 와서 얼굴 한번 비쳤으면 하더라고요. 뭐, 저희야 어려운 거 아니니까. 이번 주 일요일입니다.”
그러자 길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듯이 차 대표가 턱 끝을 한번 매만지고 결정을 내린다.
“그렇게 해.”
“예, 알겠습니다.”
박 상무가 나가고, 홀로 남은 차 대표는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칠 겨를도 없을 만큼 바쁜 삶에서 잠시나마 유리벽 너머 전망을 볼 수 있는 잠깐의 시간.
“······.”
소파에서 벗어난 그가 책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아무렇게나 놓인 크리스털 잔과 양주 한 병을 손에 쥐더니, 책상에 올려놓고 술병을 기울인다.
쪼르르.
찰랑거리는 술 한 잔을 입안에 그대로 털었다. 후, 찌푸려진 얼굴로 휴대폰을 쥔 차 대표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띠리리··· 신호가 가고.
“누님.”
-웬일이야?
“웬일은. 그냥 고마워서.”
-고맙기는··· 이시현이 잘하더라.
“잘하긴. 누님이 그나마 챙겨줘서 그 정도지. 아직 멀었어.”
-지금 자랑해? 훗··· 잘 될 것 같아 그 아이. 한영이보다 낫더라.
“뭐, 말이라도 고맙네.”
차 대표와 최미숙은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는 만큼 사석에서는 편하게 말을 섞는 사이다. 그렇지만 이번 드라마 촬영에서 차 대표는 최미숙에게 이시현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부탁하지 않았다.
-근데 난 조금 섭섭하더라? 그런 애가 있으면서 얘기도 안 하고 말이야. 지난번 바닷사람들 이야기 대본리딩에서도 나는 걔가 지에스인지도 몰랐어.
“훗, 지금 촬영 중이야?”
-말 돌리기는. 진짜 왜 전화했어? 정말 고맙다는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거야? 차 대표 외롭니?
최미숙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차 대표는 잔을 입가에서 흔들며 전화한 목적을 꺼냈다.
“누님, 최재환이 알지?”
-이시현 매니저?
“응.”
-그 애는 왜? 몇 번 보기는 했는데.
“어떤 것 같아? 쓸 만해 보여?”
-뭐, 호섭이 얘기 들어보니까. 제법 실력 있다며? 걸그룹도 키웠고, 이시현도 그 친구가 처음부터 붙었다던데. 아니야?
“맞아요. 그래서 묻는 거야. 누님이 사람 보는 눈은 있잖아.”
-어이구, 나보다야 그쪽이 더 낫지.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라서, 이 눈이 소용이 없네.”
-천하의 차 대표도 제 앞일은 못 본다? 하하.
최미숙의 웃음을 안주 삼아 차 대표는 술 한 모금을 마셨다. 쓴 술에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피곤하실 텐데, 끊을게.”
-괜찮더라. 최재환이 말이야. 그리고 뭣보다 차 대표 사람이잖아? 알아서 키웠겠지. 끊어. 몸 챙겨가며 일하고.
퉁명한데, 따뜻한 목소리. 그리고 끊어진 전화.
차 대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금 술병을 기울였다. 시야가 탁 트이는 전망을 감상하며 몇 잔을 기울인다.
“흠······.”
차 대표는 크리스털 잔을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올해 들어 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을 외부로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배우만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매니지먼트를 새로 설립하려고 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아니지. 도박을 했는데 꽤 수익이 높았다고 봐야 할지도.
‘이시현이.’
그리고 최재환이.
툭.
다시금 휴대폰을 손에 쥔 차 대표가 까칠한 턱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한번 울리고 바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아빠?
딸과의 통화는 그렇게 잦은 편이 아니다. 특히 이런 밤에는.
“너, 만나는 사람 있냐?”
-만나는 사람?
“있어 없어?”
-없어요. 있으면 아빠가 벌써 눈치 채셨겠죠.
“됐네.”
-예?
“너, 사람 하나 만나봐.”
-아빠?
“괜찮은 친구야. 한 번 만나봐라.”
-아빠아.
“하라면 해. 안 그러면 너 오피스텔 뺄 거니까. 그리고 말이야··· 얼굴은 기대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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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드라마 반응이 아무리 좋아도 인기를 체감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로 생각했다. 아직은 이시현이라는 존재가 대중에게는 낯선 존재니까.
샵에서의 관심?
길가는 중에 닿는 여자들의 시선?
혹은 회사 앞에서 내게 환호해주는 여학생들?
그건 그저 잘생긴 이성의 얼굴에 반응하는 것뿐이다. 눈앞에 신이 작정하고 만든 게 분명한 외모가 지나가는데 안 쳐다보는 게 이상한 거지.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좀 더 천천히 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너무 빨리 달리면 지치니까.
그런데 뭐지? 이 반응은?
함성, 그리고 또 함성.
로드매니저로 시작해 정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되기까지 숱하게 봐왔던, 그래서 당연시 여겼던, 언제부턴가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던 그 함성이 지금 내 눈앞에서 터지고 있다.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여러분, 박춘삼이 안 와서 실망하셨죠?”
사회자의 능글능글 웃음에 한무리 여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아니요! 하고 외친다.
“드라마 방송한지 이제 3일짼데, 왜 이렇게 시현 씨에게 열광하는 건가요?”
사회자가 내게 마이크를 불쑥 내민다.
임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 라고 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미소부터.
“부족한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실 거 믿어 의심치 않고요. 자 그럼, 여러분 질문받겠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대 아래 객석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손이 올라온다. 사회자가 그중에서 감색 옷을 입은 여학생을 가리켰다.
일어선 여학생에게 학생회가 서둘러 마이크를 건넸는데, 머뭇거리며 마이크를 잡은 여학생이 수줍음에 입을 떼지 못했다.
뭐, 별수 있나. 그럼 내가 앞으로 가야지.
그냥 무대 앞까지 나가 몸을 기울여 여학생을 바라봤을 뿐인데, 객석이 다시 들썩인다. 너무 소리가 커서 한쪽 귀를 막고 여학생에게 말했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자, 잘 생기셨어요!”
갑작스런 고백으로 인해 객석에 웃음이 터졌다. 사회자도 웃고, 물론 나도 입가에 미소가 한 가득이다.
“감사합니다. 근데 학생도 너무 예뻐요.”
이제는 무슨 말만 하면 함성이네.
“질문은 없으세요? 저 오늘 다 얘기할 생각인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학생의 등 뒤에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디 살아요?
-전화번호가 어떻게 돼요?
-오빠!!
-앞으로 뭐하실 거예요?
-다음 드라마는 뭐예요!
-속옷 사이즈······.
쏟아진 외침들 속에서 여학생이 수줍은 입술을 뗀다.
“드라마 촬영에서 힘든 점은 없으셨어요?”
-안 돼!
-그딴 질문 하지 말라고!
-다른 질문해요!!
“힘든 점이요? 글쎄요······.”
뭐가 있었더라.
대사 외우는 거야 힘들다고 투정부릴 겨를도 없었고. 연기야 뭐 미친 듯이 집중했고. 먹고 자는 거야 지쳐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으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아 맞아.
“힘든 거 하나 있었어요.”
“뭔가요?”
나는 시선을 돌려 조금 떨어진 무대 측면을 슥 돌아봤다. 그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최재환이 어깨를 움찔하는데,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나는 얘기를 계속했다.
“사실, 이번에 저희 회사에 일이 있어서 원래 제 매니저가 아닌 다른 매니저님이 우리 오빠 촬영 동안 함께했거든요. 그래서 그게 조금 힘들었어요.”
“어떤 점이 힘들었다는 거예요? 그 매니저님이 제대로 일을 못 하셨나요?”
“그게 아니고··· 우리 매니저 얼굴을 한동안 못 봐서요.”
나와 눈이 마주친 최재환이 입을 마구 벌린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진 않고, 입 모양이 장난 아니게 찰져 보인다.
“대체 시현 씨 매니저 누구예요?”
이어진 사회자의 멘트에 나는 아예 대놓고 어깨를 틀어 최재환을 바라봤고, 녀석은 이마를 찌푸리고 있다.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이 곰의 털을 흔드는데.
그래, 예상 가능할 거야. 내가 지금 뭘 할지 말이야.
“혹시, 보고 싶으세요?”
내 반문에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객석에서 우렁찬 대답이. 반면 최재환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젓는데.
“여러분 누구인지 보고 싶지 않으세요?”
한 번 더 묻자 일시에 객석을 채우는 대답들. 그렇게 내 손이 최재환을 향한다.
“나와 주시겠어요? 지에스엔터테인먼트 최재환 팀장님.”
최재환의 모습이 마치 뭍에 올라온 생선 같다. 손사래를 치면서 아주 발버둥이다. 그러자, 학생회에서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야, 야! 얘들아!”
관객들이 웃고 난리인 상황, 결국 무대로 나온 최재환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를 쳐다본다.
“매니저님,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아, 안녕하세요. 최재환입니다.”
긴장으로 굳은 최재환의 얼굴, 나는 웃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바싹 깨물었다. 사회자가 최재환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위아래로 스캔을 쫙 하고, 질문한다.
“매니저님은 당연히 드라마 보셨겠죠?”
“예, 봤습니다.”
“어떠셨어요? 이시현 배우의 첫 드라마인데.”
“아 뭐, 아직 멀었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최재환의 모습. 어쭈.
“와 섭섭하다.”
내가 불쑥 입을 열자 최재환의 눈썹이 껑충!
“난 그래도 우리 매니저 보고 싶다고 했는데, 정작 우리 매니저님은 이렇게 차갑네요.”
“야, 아니거든. 나도 보고 싶었거든!”
발끈하는 최재환의 모습에 객석에 웃음꽃이 만개하고.
“하하하, 두 분 뭐하는 겁니까?”
“우리가 이러고 놀아요.”
능수능란하게 인터뷰하는 내 모습을 최재환이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만 봐라. 얼굴 뚫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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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햐, 진짜 잘생겼다.”
여학생들은 쉼 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무대에 서 있는 이시현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녀들이 드라마에서 본 북한군 박춘삼은 꾀죄죄한 얼굴에 허름한 옷차림이었는데. 물론 그것으로 잘생김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실물은 이거이거.
“백만 배 잘생겼어!”
하얀 얼굴, 큰 키, 예의 바른 모습, 더구나 상냥해! 센스도 대박이야! 그리고 세상에나··· 어쩜 저리 말도 잘해. 곰 같이 생긴 매니저를 무대에 불러서 어르고 달래고 있어. 저걸 뭐라고 해야 하지?
“조련!”
친구가 손뼉을 치고 외치자 다들 꺄꺄!
“저 매니저 너무 부럽다.”
“매니저면 24시간 함께 있겠지? 밥도 같이 먹고, 목욕탕도 같이······.”
“엄마!!”
그러는 사이 무대에서는.
“근데, 드라마 촬영 직전에 투입··· 됐잖아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나요?”
당연히 그 질문을 해야지!
여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대답을 지켜본다. 이시현의 매니저가 마이크를 입에 대는데··· 그러자 여학생들이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저씨 말고 이시현!
“이쪽 일이 이번처럼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는 딱히 없고요. 그래도 굳이 꼽자면, 시현이가 드라마 투입 소식을 촬영 이틀 전에 알았다는 거?”
“이틀 전? 와우! 그때 알았으면, 그럼 이틀 만에 대본 외우고 연기까지?”
여학생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이시현을 바라봤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자 이시현이 마이크를 잡더니.
“그러게요. 그걸··· 우리 팀이 해냈네요.”
이시현이 매니저를 우수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마치 시의 한 구절이 그의 주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듯한 그림이다.
아아··· 저건 잔인한 눈빛.
아아··· 저건 그대의 눈빛.
“우리 팀이라··· 진짜 낭만적인 단어다.”
사회자의 속삭임과 함께 불어온 바람은 이시현을 쓰다듬듯 머리카락을 흔들어주고, 객석을 한 바퀴 돌아 여학생들에게 다가왔다.
“오빠······. 오빠······.”
일곱 명의 여학생들이 나부끼는 제 머리카락조차 잡지 못하고 오빠를 찾는다. 그녀들의 눈에는 오로지 이시현만 보인다. 저 미소와, 저 눈웃음과, 저 잘생김만이 보인다.
“야야!”
그때 누군가의 외침.
“사람들 봐.”
여학생들이 주위를 둘러본다. 이럴 수가.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다.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생 무리도 있는데.
“장난 아니다.”
그때 무대에 학생회 간부가 올라와 사회자의 귀에 뭔가를 속삭인다. 불안한데. 사회자가 어정쩡한 미소를 짓더니.
“여러분 죄송합니다. 안전상의 문제로······.”
“안 돼!”
그 외침이 시작이었다. 학생회의 방어벽이 출렁이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무대로 달려간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