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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시현입니다 (1)
「롤리팝, 2000년 8월 12일 토요일」
저녁 9시 40분.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는 주방.
평소라면 한가하게 신문이나 보고 있을 주방장도 오늘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데, 홀 직원이 들어와 과일 부스러기를 집어 먹으며 주방 안을 기웃거린다.
“주방장님, 실장님이 찌개 좀 끓여달라는데요?”
“찌개? 횟집 가서 매운탕이나 먹으라고 그래. 이것들이 자꾸 해주니까 당연한지 알아.”
“에이, 잘만 해주시더니.”
“바쁘다. 그냥 요 앞 횟집에서 사와.”
“그래도 해주실 거면서.”
“바쁘다니까!”
칼자루가 탕!
도마를 내려친 주방장이 눈을 부릅뜨고, 웨이터가 서둘러 주방을 빠져나가자 그 뒤꽁무니를 향해 주방장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니들 오늘부터 홀 놈들 아무것도 해주지 마! 알았어?”
“예!”
손을 탈탈 턴 주방장이 시계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시간 됐다. 준비해라.”
“예!”
주방 직원이 선반 위에 놓인 손바닥 크기의 일제 TV에 손을 뻗는다. 오늘을 위해 옆 당구장에서 빌려온 거였다.
치지지······.
안테나를 이리저리 맞추는 사이 시간이 9시 50분을 넘어간다. 사각형 모니터에 비친 흐릿한 형체가 점점 또렷해지고.
“시작한다!”
주방장을 비롯해 주방 식구들의 시선이 작은 TV 앞에 모인다. 도마를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고,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주방에 가득 차는데.
[‘우리 오빠’ 촬영 현장! 곧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TV에서는 연예가소식 MC의 인사와 함께 오늘 있을 소식들이 간략하게 이어졌다.
[여러분 오늘은 화제의 현장이죠? ‘우리 오빠’ 촬영 현장에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리포터 김성민의 호들갑과 함께 세 명의 배우들이 나온다.
요즘 한창 시끄러운 8.15특집드라마 배우들.
일본의 이시하라 유이, 아역 배우 고우희. 그리고······.
“이시현이다!”
얼마 전까지 이곳 주방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우와 더 잘생겨졌네.”
“조용히 해 임마. 누가 맥주 좀 가져와!”
“야, 볼륨 좀 높여봐!”
서서히 커지는 TV 볼륨처럼, 직원들의 입가에도 맑은 미소가 퍼져가는 밤이다.
**
「백암산, 2000년 8월 13일 일요일」
수용소를 탈출한 박춘삼과 유이는 피난길에 남한군을 마주친다. 하지만 적으로 오인한 남한군에게 총격을 받아 유이가 죽게 되고.
겨우 부산에 당도한 박춘삼은 그를 기억하고 있는 마을 주민에게서 여동생이 남한군 때문에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게 된다.
세 줄 남짓의 짤막한 시놉시스가 박춘삼이 왜 북한군으로 돌아가며, 어떻게 악귀가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박춘삼에게 있어 유이는 처음으로 느낀 사랑이었고 휴식이었다. 그리고 삶의 전부였던 여동생.
그 두 사람이 죽었을 때 박춘삼은 더는 그 자신으로서 있을 수가 없게 됐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린 삶이 된 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박춘삼.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증오뿐이었다. 증오는 총칼이 돼 남한군에게 향했고, 그는 북한군의 선두에 서서 무참한 살육으로 공을 쌓는다.
마지막 씬의 촬영에 앞서 박태 감독은 이시현에게 극한의 한계에 이른 박춘삼을 주문했다. 평소보다 긴 리허설을 거치며, 감독은 이시현에게 콘티를 기억에서 지우고 마음대로 연기할 것을 지시했다.
카메라 워킹 또한 지금까지보다 한층 자유도를 높였다.
일반적으로 배우 1인이 한 씬을 촬영할 때 풀샷과 바스트샷으로 구성되는데, 대규모 씬의 경우 배경뿐 아니라 엑스트라까지 고려하면 계산해야 할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감독은 계산된 촬영기법과 예산, 콘티, 배우들,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단 한 번, 원 씬 원 테이크를 강조했다.
“스탠바이 합니다!”
마침내 이시현이 촬영 동선에 선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이제 현장의 모든 스태프는 저 배우를 의심치 않는다. 카메라 앞에 이시현이 서면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열 일 젖혀두고 촬영을 구경하기 바쁘다.
물론 강 실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카메라 밖에서 숨죽이고 이시현을 바라본다. 숲의 나무를 훑고 온 바람이 그의 옷깃을 나부낀다.
사사사사.
바람 소리, 나뭇잎들의 들썩임, 그리고 이시현은 사라지고 북한국 박춘삼이 서 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지난 열흘의 시간을, 정확히는 한 달 같은 열흘의 시간 동안 이시현을 지켜봤다. 그런데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무리 카메라 울렁증을 극복했다지만 어떻게 저런 연기를 펼칠 수가 있을까.
얼마 전 새벽 촬영이 끝나고 감독과 술 한 잔을 기울였는데, 그때 감독은 이시현의 연기가 사람을 관통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다양한 부류의 인간상을 겪지 않으면 가지지 못할, 상대를 꿰뚫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그러려니 할 수는 있다.
한데 그걸 어떻게 이시현이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찌 됐든 이시현은 해내고 있다.
녀석은 더 이상 대본을 읽을 필요도, 대사를 되뇔 필요도 없었다. 그저 행동하면 될 뿐이다. 카메라는 지금까지 박춘삼을 찍었고, 이제부터 찍히는 모든 것 역시 박춘삼이니까.
드라마가 방영되면 이시현은 어떻게 될까.
하루아침에 스타가 될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녀석이 자고 일어나 맞이하는 앞으로의 매일 아침이 달라져 있을 거라는 점이다.
‘참 내, 내가 저놈 촬영 끝나는 게 아쉬워질 줄은 몰랐네.’
이제 촬영이 끝나면 강 실장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시현과 헤어질 그 시점이 못내 서운해질 거란 건 결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조연출 황동태가 우렁찬 목소리를 뱉자 스태프들이 긴장한다.
이시현은 또다시 박춘삼이 돼 호흡을 가다듬고.
메인 카메라 스탠바이!
크레인 카메라 스탠바이!
특수효과팀 스탠바이!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레디······.”
박태 감독의 얼굴이 비장하다. ENG 카메라를 어깨에 올린 촬영감독과 보조 스태프가 이시현의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고.
“액션!”
북한군과 남한군은 서로에게 달려간다. 살아남기 위해서, 죽이기 위해서, 좁혀지는 거리 여기저기에 쏟아지는 포탄. 총소리, 아우성,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 선두에 선 박춘삼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닥치는 대로 총검을 휘두른다. 그의 총칼에 남한군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으아아!”
죽이고, 또 죽이고.
카메라에 담기는 그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촬영을 지켜보는 몇몇 스태프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한다.
“죽어! 죽어!!”
탕!
총에 맞은 박춘삼이 쓰러진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난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일어설 뿐.
탕탕!
또 한발이 그의 가슴을 뚫고, 다리를 뚫는다. 주저앉은 그에게 총알이 빗발치고.
무릎을 꿇고 앉은 박춘삼이 하늘을 본다.
검은 눈동자에 비치는 흐린 하늘. 귀는 먹먹하고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한 얼굴이다.
‘엄니··· 아버지··· 희재야······.’
눈이 감긴다.
박춘삼의 몸은 이제 말을 듣지 않는다. 그저 나직이 속삭임을 뱉을 뿐이다. 달 밝은 그 밤에 불어왔던 바람에 몸을 실을 뿐이다.
“곧··· 갈게··· 네 곁에··· 곧······.”
이 드라마를 시청률로 논해서는 안 된다.
현장에 있는 모든 이의 마음처럼, 눈시울을 붉힌 박태 감독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욕심을 내 러브라인을 넣은 것도 시청률을 떠나 예쁜 그림을 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때로 감독은 배우가 고마울 때가 있다.
최선을 다해서 연기를 펼쳐줬을 때,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줬을 때, 그리고 촬영을 잘 따라와 줬을 때.
이시현은 촬영을 잘 따라와 주었다. 비록 열흘 남짓 짧은 촬영 기간이었지만 무리한 일정에 힘든 내색 한번 않고 혼신의 힘을 다 해줬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컷을 외치는데 있어 박태 감독은 가슴에 고인 애틋함부터 토해내야 했다.
“···오케이, 컷!”
그 외침이 있자 모든 스태프가 한목소리로 외친다.
“수고하셨습니다!”
하늘을 울리는 그 소리에 박태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시현에게 다가갔다.
이시현은 흙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지난 촬영에서도 가끔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 컷만 떨어지면 끌어안았던 감정을 토해내는 모양이다.
“잘했어.”
박태 감독은 이시현의 등에 손을 얹고 쓸어내렸다. 눈시울이 붉어진 이시현이 그를 마주 본다. 서로의 마주친 시선은 첫날의 그 경계 어린 시선이 아니었다.
믿고, 의지하고, 신뢰가 담겼다.
이시현을 부축해 일으키자, 두 사람의 주변에 스태프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지난 시간 배우들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박태 감독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린다.
“자! 사진 찍자!”
**
“다들 수고 많았어.”
강 실장은 배우들의 매니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최미숙의 매니저를 제외하고는 그가 제일 연장자였기에 첫날부터 편히 말을 놓은 사이였다.
“시현 씨 이번에 제대로 뜨겠는데요?”
박춘삼의 동생 역을 맡았던 고우희의 매니저가 살갑게 웃는다. 강 실장도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잘 돼야지.”
“박한영 빠지고 지에스에서 배우 쪽 라인은 손을 턴다는 얘기가 돌더니만··· 이렇게 또 반전 줄지는 몰랐네요.”
“아까 연출팀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편집실 풀로 돌리고 있다는데, 감독님이 아주 작정하고 공을 들이려는 모양인데요?”
“무리도 아니지. 제작비도 그렇고 촬영 방식도 그렇고, 솔직히 이게 드라마야? 완전 영화 수준이었잖아? 욕심이 날만 하지.”
“하하. 적당히들 해, 아직 방송은커녕 편집도 안 끝났구만.”
매니저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얘기한들 의미는 없지만 뒤풀이가 그렇듯 촬영 뒷이야기가 이어졌다.
“차 내려가네.”
장비 차량에 이어 스태프들을 태운 버스가 산에서 내려간다. 이제는 남아 있는 배우들과 매니저들만 떠나면 되는데.
“그럼, 저희는 가볼게요.”
“저도요.”
매니저들이 갈 길을 재촉한다. 오후 4시의 이른 시간이지만 하늘은 어둑어둑하고 날도 서늘하다. 혼자가 된 강 실장은 흘러가는 구름에 담배 연기를 실어 보냈다.
“후······.”
그동안 이시현을 보면서 잊었던 걸 깨우친 느낌이다. 처음에는 즐거운 것 하나만 보고 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자리에만 욕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최재환의 열정을 비웃었고, 이시현이라는 배우를 하찮게 봤고.
부스럭.
강 실장은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냈다. 이시현이 최재환의 문자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던 것처럼, 그도 최근 들어 틈나면 보는 문자가 있었다.
[형, 미안하다는 말 안 할게. 프랑스에서 돌아오면 그때 연락할게. 그때도 내가 필요하다면 말이야. 잘 지내. 몸 건강하고.]
‘새끼······.’
피식 웃으며 다음 문자를 살핀다.
[실장님 파이팅!]
이번에는 송이경의 문자였다. 그녀에게 사정을 얘기하긴 했지만 함께하기로 해놓고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응원의 문자를 보내왔으니 입가에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훗.’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마저 무는데, 아까 떠난 고우희의 매니저가 온다.
“왜?”
“여자들이요.”
그 말을 하고 피식 웃는 매니저.
강 실장은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여자들은 곤란한 점이 많은데, 특히 화장실 문제에서 그렇다.
“근데, 형님은 안 가세요? 시현 씨 아직도 분장 지워요?”
“아니야.”
강 실장은 입에 문 담배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저 멀리 주차된 차를 바라본다. 그 안에서 한송이가 잠시 눈을 붙이고 있고, 이시현은.
“우리 배우가 여운을 좀 달래고 싶은가 봐.”
녀석은 촬영장을 한번 둘러본 후 가고 싶다고 했다. 첫 드라마 촬영을 마쳤으니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은 모양이다.
**
잠시지만 홀로 있고 싶어서 숲길을 걸었다.
첫날, 첫 씬 촬영 장소, 북한군 박춘삼의 동선을 눈에 담는다.
대체 지난 열흘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촬영이 끝난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 도무지 믿어져야 말이지. 이렇게 문제없이 촬영이 끝난 것도 행운이고.
신인 배우에, 더구나 낙하산.
제대로 된 촬영 분위기는 기대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었는데,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우려했던 점은 크게 느끼지 못했다.
스태프들이 잘해준 거야 두말할 필요 없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여자 스태프들이 정말 잘해줬었다. 밥 차 아줌마는 매번 밥을 산더미처럼 챙겨줘서 날 힘들게 했고.
“훗.”
배우들과의 호흡도 좋았다. 최미숙이 날 많이 챙겨줬고, 이시하라 유이와는 당연히 좋았다. 고우희와의 호흡도 뜻밖에 좋았고.
엑스트라들과도 나중에 또 보자는 말과 함께 웃으며 헤어졌다.
“하······.”
가슴이 아린다. 오늘의 마지막 촬영에 온 힘을 다해서인 이유도 있겠지만,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그래 일상으로, 최재환에게로 가야 할 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듯,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푸르고 울창한 숲. 아무도 없겠지?
“이 밤 그대를 꿈에 뵈리까.”
박춘삼의 등에 업힌 이시하라 유이가 달빛 아래서 불렀던 노래.
그녀의 발음이나 감정 표현에 있어 내가 꽤 도움을 줬는데, 대화가 통하니 그녀도 나에게 의지한 면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가사를 외웠고.
사랑은 그대를 기억하기 위한 내 고집이란 말이오
사랑은 그대를 꿈에 보기 위한 내 욕심이란 말이오
허니 그대는 내 곁에서 잠시만 있다 가오
“나 그거 하나 간절히 바라니.”
캐스팅 영상을 본 뒤로, 나는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이시현이라는 존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능 있고 아까운 놈이었음을 알았으니까.
나는 대체 무얼 했던 거지?
왜 녀석의 가치를 몰랐던 걸까? 이 멍청한!
그런 죄책감이 시간이 지나면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과연, 나도 노래할 수 있을까?
오늘 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가리
달이 길을 가르쳐준다 해서 바람과 함께 찾아가리
“그대 나를 기다리면 되니.”
내가 노래라니.
뭐, 나름 연극판에 몸담았던 시절도 있는 만큼 잘하진 못해도 음치는 아니었지만··· 내가 살아온 삶은 노래를 부르며 흥에 취할 만큼 즐거운 삶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내 기준에 노래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부르거나, 혹은 세상만사 태평한 사람들이나 부르는 거였으니까. 그랬던 내가, 이시현의 몸을 가졌다고 노래를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하는 걸까.
지금 나는 테크닉도, 비브라토도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엉망이다. 정말 엉망인데,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달 밝은 밤 또 찾아뵈리까 내 그대를 그대를.”
만약, 이시현이 카메라 울렁증이 없었다면.
만약, 이시현이 이 목소리를 제대로 끄집어냈다면.
녀석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그대 보지 못해도 나 슬피 슬피 웃음 지으리 그대 보지 못해도 나 기뻐 기뻐 울음 지으리.”
노랫말 때문일까.
아니면 나는 여전히 박춘삼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다시 못 볼 유이를 향한 박춘삼의 마음이, 한 마디 한 마디에 절절히 흘러나온다.
하, 내가 이렇게 감상적인 인간이었다니.
걸음을 멈춰 고인 숨을 토했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진 시선에 고개를 돌렸는데.
“누구······.”
수풀 사이에 고우희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까.
“반칙이잖아.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와······.”
그녀의 훌쩍임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주 잠시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