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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로맨스가 필요할 때 (2)
「8.15특집드라마 촬영 8일째. 2000년 8월 9일 수요일」
오늘따라 세트장이 소란스럽다. KIS 예능프로그램 연예가소식팀에서 찾아왔기 때문인데, 나와 이시하라 유이, 그리고 박춘삼의 여동생 역을 맡은 고우희까지 한자리에 모아 놓고 촬영에 들어가기 5분 전이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달갑지가 않은 인터뷰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오전 촬영을 정신없이 마쳐야 했고, 당연히 지금까지 유지해온 흐름도 깨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배우의 소속사 대표 입장이라면 백번 환영이겠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이럴 시간에 어디 구석에 박혀서 한 시간 만이라도 자고 싶다.
“그냥 아무거나 다 얘기해요. 문제 있으면 우리가 편집할 테니까.”
리포터 김성민이 사람 좋은 미소로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저 말 안 믿는다. 편집을 한다는 건 내 권한이 아닌 그들의 권한인데, 내가 하는 말과 표정이 어떻게 잘려 나올지 알고?
“촬영 들어갑니다!”
연예가소식팀 스태프가 박수를 치는 것으로 카메라 두 대가 앉아 있는 우리 셋을 비춘다.
“여러분 오늘은 화제의 현장이죠? ‘우리 오빠’ 촬영 현장에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리포터 김성민이 목소리 톤을 높이고.
짝짝짝!
일단 박수를 치긴 하는데, 여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상황이 낯설다. 인터뷰는 몇 번 해봤어도 배우로서의 인터뷰는 처음이니까.
지금 자세도 어정쩡해서 의자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는데, 이시현의 다리는 이렇게 길쭉하구나 싶은 의자를 가져다 놨다.
무척 신경이 쓰이는 자세지만 뭐 별수 있나.
“지금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요! 알고 계세요?”
다른 건 모르겠고 계란세례를 당한 내 사진이 인터넷을 장식하고 있다는 얘기는 한송이에게서 들었다.
“우희 씨, 드라마 어때요?”
“우리 드라마 최고죠. 호흡 짱!”
올해로 열아홉인 그녀가 엄지를 척 내민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온다.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살아오며 학을 뗀 여자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손에 꼽는 세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마누라.
두 번째는 백유진.
그리고 세 번째는 여기 이 고우희. 특히 너! 널 이곳에서 볼 줄이야.
“두 분, 극중에서 남매잖아요? 촬영 호흡은 어때요?”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김성민의 질문에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 답했다.
“좋죠, 당연히.”
거짓말이지.
“너무 좋아요. 시현이 오빠가 되게 잘해줘요.”
“되게면 대체 어느 정도야?”
김성민이 맞장구 쳐주자 고우희가 냉큼 두 팔을 펼쳐 큰 원을 그린다.
“이만큼!”
깔깔 웃는 김성민.
촬영 분위기는 좋게 이어졌다. 주위의 스태프들도 우리를 구경하며 미소 짓고 있다.
“근데, 드라마에 러브라인이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질문이 나에게 이어진다. 아무래도 내가 김성민 옆에 붙어있기 때문인데, 이 정도면 주연 대우를 제대로 해주고 있는 거다.
사실 내게는 과분한 자리인데, 웬일인지 KIS에서 나를 많이 대우해주고 있다.
“시현 씨, 어떤 러브라인이에요?”
“글쎄요, 약간 운명적 사랑 같은?”
김성민이 언급한 것처럼 나와 이시하라 유이 사이에 러브라인이 추가됐지만 큰 틀의 변화는 없다. 몇몇 씬에서 약간의 변화와 다정함을 연출했을 뿐이다.
“운명적 사랑? 그건 대체 어떤 사랑이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꽃피우는 사랑?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
“그러게? 오빠 무슨 사랑이에요?”
고우희가 나를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얼른 이시하라 유이를 돌아보고 의견을 물었다.
[지금 우리의 러브라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거든요. 이시하라 상이 생각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나직이 속삭여 물었더니, 이시하라 유이가 생긋 웃으며 귀밑머리를 쓸어내리고 김성민을 바라본다. 크고 맑은 눈에 카메라와 김성민이 비치고.
“좋은··· 사랑입니다.”
서툰 우리말이었지만 뜻은 분명했다. 김성민이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눈을 반짝인다.
“우와. 시현 씨 일본어 실력이 보통이 아니네요?”
“조금 할 줄 아는 걸요.”
“그럼, 두 분 자주 대화하겠네요? 금방 친해졌겠다.”
“아무래도 제가 많이 통역해주는 편입니다.”
대충 넘기고, 이시하라 유이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꽤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왜 한국의 드라마, 그것도 이런 역사적 의미를 가진 드라마에 출연했는지에 대한 생각과 촬영 소감.
그녀가 한국에서 이 드라마를 찍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일이다. 고국에서 비난을 받을 것은 뻔한 것이고, 한국에서라고 환대받지는 못할 입장인데, 이 어린 나이에 이런 각오와 생각을 가진 것에 놀랍다.
“시현 씨, 드라마 얘기 좀 해주세요!”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밀어내려는 듯 김성민이 목소리를 높이고 내게 질문을 이었다.
“이번이 첫 드라마인데 촬영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예. 감독님이 신경 많이 써주셔서 어려움은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매우 빠른 속도로 촬영을 잇고 있다.
촬영 A, B팀이 동시에 움직이는 덕에 사나흘 내로 촬영을 마칠 듯 보인다. 나도 남은 씬이 그리 많지가 않은데, 전투 씬에서의 보충 촬영과, 고우희와 엮인 씬들이 남았다.
“시현 씨, 그럼 극중에서 두 여배우분들과 연기했던 한 장면을 지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한 장면이요?”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제안인데··· 뭐 어려울 것은 없지. 그냥 드라마 장면 그대로 보이면 되는 거니까. 그럼 뭘 해야 하지? 유이에게 선택권을 넘기자 그녀가 별거 아니라는 듯 미소를 보였다.
[우리 49번 씬 해요.]
[49번 씬?]
[응.]
이시하라 유이는 웃을 때 눈이 사라진다.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아빠, 아니 오빠 미소가 지어진다. 물론 박춘삼도 그녀의 미소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49# 논두렁길(혹은 언덕길) / 밤
다리가 다친 유이를 등에 업은 박춘삼. 두 사람은 달빛 아래를 걷는다. 선선한 바람, 논두렁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울음 소리.
유이 : (박춘삼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힘들죠?
박춘삼 : 안 힘들다니까 그라네. (그러면서 숨을 크게 내쉰다)
유이 : (살짝 웃고) 힘들면서.
박춘삼 : 거 진짜, 자꾸 말 시키니까 힘드네.
(두 사람 잠시 말이 없고)
박춘삼 : 진짜 안 힘드니까··· 정 미안하면, 거 노래나 한번 해보시라우.
유이 : 노래요?
박춘삼 : 민요든, 아동가요든, 암거나 해보시라우. 못하면 말고.
유이 : (잠시 뜸 들이다가) 못한다고 골리기 없기에요?
박춘삼 : 못할 리가 있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목소리가 꾀꼬리인데.
유이 : 뭐라고요?
박춘삼 : (놀라서) 거참 뜸 들이네. 할 거면 빨리 불러 보시라우.
두 사람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장면인 만큼 서로의 호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씬이다.
박춘삼의 속마음이 은연중에 표현돼야 하며, 유이가 평소보다 여유 있어 보이게끔 나와야 한다. 아무튼 감독의 까다로운 주문이 있었던 씬이다.
“흠!”
유이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30초 정도의 짧은 노래가 흐른다. 나는 그녀가 이 노래를 익히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옆에서 도와줬으니 말이다.
“···이 밤, 그대를, 꿈에 뵈리까. 이 밤, 그대를··· 꿈에··· 뵈리까.”
여름의 밤, 달빛 아래, 논두렁 아래 풀벌레와 개구리 소리가 들리고, 속삭임처럼 그녀의 노랫말이 박춘삼의 등 뒤에서 들려온다.
늘 무표정이던 박춘삼이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그녀를 업고 있으니 볼 사람도 없을 터. 밤이 깊어서 달님도 아마 못 볼 것 같아서, 그래서 수줍게 미소 짓는데.
“앗, 웃었다.”
그녀에게 들켰다.
“내가 언제······.”
“지금 웃었잖아요?”
“거 쓸데없는 소리는······.”
“에이, 웃었으면서.”
“아니라니까 그라네!”
“내 노래 어땠어요?”
“나쁘진 않네. 뭐··· 들어줄 만 한 것 같기도 하고.”
박춘삼이 참을 수 없는 미소를 숙이고 논두렁길을 걷는다. 바람이 지나가며 그의 땀을 식혀주고, 그녀의 울창한 머리숱을 헤친다. 흙냄새, 물 냄새, 그녀의 냄새가 아득히 퍼지는 밤.
“여기까지입니다.”
김성민을 돌아보니 만족한 듯 미소를 보인다.
실제 촬영에서 이 씬은 몇 번 NG컷이 났다. 이시하라 유이가 노래를 어려워한 점도 있었고, 내가 중간에 소똥을 밟아서······.
“두 사람 호흡 진짜 좋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가족의 사랑!”
김성민의 요청에 나는 바로 고우희를 바라봤다. 그녀가 방실 웃으며 나를 본다.
“오빠, 우리는 어떤 씬으로 할까요?”
“어, 이걸로 해요.”
우리는 호흡을 깊이 맞춰보진 못했지만, 나는 바로 어제 촬영한 회상 씬을 시행에 옮겼다. 그녀의 볼을 엄지와 검지로 집는다. 그리고 확 잡아당긴다. 그녀가 황당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데, 이때 내 대사.
“니 내 고구마 먹었지?”
“어?”
“뱉어라. 뒈지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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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볼만 붉게 핀 고우희의 모습에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붙들고 김성민을 돌아봤다.
“진짜 오빠 동생이네요. 하하하!”
김성민이 배를 잡고 웃는데, 고우희도 억지로 웃고 있다. 실상은 저 입속에 불만과 분노가 꽉 차 있음을 알고 있다. 어제보다 더 세게 잡아당겼으니까.
‘숙녀 얼굴을 그렇게 잡아서 미안한데, 너 나한테 한 것 치면 내가 진짜 아휴······.’
내가 고우희를 징글징글하게 생각하는 이유.
이 녀석이 정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했기 때문이다. 참 대단한 연기자였다.
현장에서 싸우고, 스캔들 일으키고, 구설수 오르고, 매니저들 달달 볶고··· 근데 또 뭐라고 할 수 없었던 게, 이 녀석 SN 사장의 조카다.
당한 것만 생각하면 이대로 박치기라도 하고 싶지만 오늘은 내가 참는다. 물론 지금의 너는 죄가 없지만 말이야.
“자, 마지막으로 우리 파이팅 한번 할까요?”
김성민의 제안에 우리 셋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곳에 손을 모았다. 왠지 고우희의 손이 내 손을 찌르는 느낌이다.
“하나둘 셋! 우리 오빠, 파이팅!”
연예가소식팀이 철수하자 바로 조연출 황동태가 다가왔다.
“시현 씨, 오늘 촬영 없어요.”
“왜요?”
저녁에 이어간다고 들었는데.
“강 실장님이 시현 씨 좀 자게 해달라고 감독님에게 부탁했나 봐.”
“아··· 전 괜찮아요. 저 혼자 무슨.”
“에이 괜찮아요. 그동안 고생했는데, 다들 이해하지. 가서 쉬어요.”
황동태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보인다. 신인이 졸립다고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래도 내가 그동안 엉망은 아니었나 보다.
‘자식.’
나는 세트장 한편에 서 있는 강 실장을 쳐다봤다. 그가 딱 붙인 손가락 두 개를 이마에 대고 나를 본다.
“오늘 쉬고, 내일 오후 2시까지 오시면 돼요. 전투 씬 보충 촬영 빼고는 이제 우희 씨하고 붙는 씬만 남았으니까.”
황동태가 고우희를 힐끗 보며 말한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가 서둘러 원위치했다. 어휴, 저거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아무튼, 오랜만에 푹 쉬어요.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예, 감사합니다.”
촬영이 있고는 하루 3시간 이상을 연속해 자본 기억이 없다. 씬이 끝나면 차에 기어가 쪽잠을 자고, 새벽 어스름이 피면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생활의 연속.
그래서 지난날 내 연기자들에게 했던 말들에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했다. 밤샘 촬영으로 비실거리는 애들에게 근성으로 부딪치라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망언도 그런 망언이 없다.
“수고하십시오!”
스태프들과 박태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세트장을 나왔다.
오후 4시.
이른 퇴근을 하는 기분인데, 솔직히 정신이 그렇게 온전치는 못하다. 인터뷰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고.
드르륵.
차에 오르니 한송이가 뒷좌석에서 쭈그려 자고 있다. 그녀도 요즘 정신없이 보냈을 거다. 어디 가지도 못하고 내 옆에서 머리 만져주랴, 의상 챙기랴, 익숙지 못한 일을 꽤 열심히 했다.
내가 유명세를 가진 배우였다면 좀 더 인원을 충원해왔겠지만, 신인에 낙하산이니 현장에서 잔치판 벌여서 좋을 게 있나. 그냥 우리 셋만 적진지 한가운데 떨어진 격이었다.
“고생했다.”
강 실장이 차에 탄 나를 힐끗 보고 말한다. 그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나를 위해서 감독에게 그런 무모한 말을 해준 게 고맙다. 설마, 네가 졸려서 그런 건 아니지?
“고맙습니다. 실장님.”
“고맙긴. 대표님한테는 비밀이다? 나 혼나.”
“후후. 예.”
우리는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먼저 한송이부터 그녀의 집 앞에 내려줬다. 차에서 내린 그녀가 눈을 비비며 나를 본다.
“오빠, 제 꿈꿔요.”
“어.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 풀어야 했는데, 샌드백으로 꼭 나와 줘.”
“예.”
우리의 실없는 대화를 듣고 강 실장이 지친 웃음을 보인다.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그래도 해가 떠 있었다. 물론, 나는 들어가서 바로 곯아떨어질 테지만.
“내일 11시에 데리러 올게. 푹 자두고.”
그 말을 하고 그가 주먹을 내민다.
이건, 뭐하는 짓이지?
알 수 없는 행동에 내가 눈을 말똥말똥 뜨자 그가 허공에 내민 자신의 주먹을 보며 픽 웃는다.
“훗··· 이거 피스트 범프라고, 한영이하고 주먹 부딪치면서 하루 마무리하던 습관이······.”
툭.
나는 주먹을 들어 그의 주먹에 댔다. 강 실장이 멍한 얼굴로 나를 본다.
“그럼 실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어, 어. 그래.”
강 실장이 미소와 함께 주먹을 내린다.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