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62화 (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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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로맨스가 필요할 때 (1)

“연기요? 뜨거운 물도 문제없어요!”

-8.15특집드라마 ‘우리 오빠’의 촬영 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 감독의 연출, 작가의 완벽한 대본까지. 그중에서도 뒤늦게 드라마에 합류한 배우 이시현의 각오는 남다르다. 촬영팀의 실수로 뜨거운 물을 마시게 됐을 때도 그는 NG를 내지 않으려 단숨에 뜨거운 물을 들이켜는 기염을 토했는데······.

“와, 시현 오빠 짱이네. 근데 타이틀 대개 유치하다. 아하, 세러데이구나.”

슬기는 노란 머리를 흔들어대며 신문에 집중했다. 쉬지 않고 종알거리는 그 모습에 레니가 가차 없이 쓴 소리를 던진다.

“아예 신문에 들어가지 그러냐? 그리고 볼 거면 조용히 혼자 봐. 왜 우리한테 중계방송하는데?”

“넌 어쩜 애가 그렇게 사람한테 비수를 콕콕 꽂냐?”

“너 피그잖아?”

“그거 이제 지겹거든?”

“나도 알거든?”

둘이 티격태격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권혜선까지 없으니 말릴 사람도 없어 아주 살판났다. 그래서 최재환도 모른 척 눈을 감고 있는데.

‘역시 귀마개를 가지고 왔어야 했어.’

우천으로 인해 오소리의 드라마 촬영이 연기돼 오늘은 3W에 합류한 최재환.

“욱아.”

최재환은 열심히 운전을 하는 욱이를 불렀다. 욱이가 고개를 재빨리 돌려서 그를 눈에 담고 다시 앞을 보며 대답한다.

“예, 형님.”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이퍼.

“너 언제까지 나 끌고 다닐래?”

“죄송합니다.”

“이제 그만 불러라. 나 쟤들이랑 있으면 진 빠져. 나도 좀 쉬엄쉬엄 살자.”

그 말에 슬기가 조수석을 향해 냉큼 고개를 내밀었다.

“오빠, 시현이 오빠 여자 친구 있어요?”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냐?”

최재환이 귀찮은 투로 말하자 슬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나 어때?”

“에휴, 그걸 말이라고··· 넌 안 되지, 무조건 안 돼.”

“아 왜!”

“양심이 있어라 이것아. 팬들이 저렇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연애하고 싶냐? 그거 배신이야.”

“배신은 무슨··· 다들 그렇게 살아. 우리는 뭐 연애도 못 하냐? 언제는 사내 연애는 괜찮다며?”

슬기의 계속되는 투정에 최재환이 고개를 내저으며 외친다.

“레니야!”

“어 오빠, 내가 죽일게.”

“부탁한다.”

레니가 솜주먹으로 슬기의 어깨를 두드리느라 차 안이 부산한데도 스타일리스트 강보라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눈을 감고 있다. 저러고 있으니 오히려 스타일리스트가 연예인 같아 보인다.

잘 달리던 차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멈췄다.

비가 너무 와서 잠시 쉬어가려는 것이다.

“아, 화장실 가고 싶다.”

“참아. 참는 게 속 편하니까.”

연예인은 화장실도 맘대로 갈 수가 없다. 몰래 사진을 찍는 팬들도 있고, 심지어 볼일을 보는 중인데도 싸인을 요구하는 팬도 있다.

“못 참겠어?”

레니와 달리 최재환이 나긋하게 묻자 슬기가 풀죽은 얼굴을 끄덕인다. 그러자 최재환도 별수 없어 차 문을 붙잡았다.

“가자. 날이 어두워서 괜찮을 거야. 욱이 너는 애들 먹을 것 좀 사 오고. 슬기 배고픈 것 같으니까 감안하고 사와라.”

“예. 싹싹 긁어올게요.”

“내가 진짜 돼지인줄 알아?”

슬기가 소리를 빽 지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재환이 차에서 내려 우산을 챙겨 들자, 안에 있던 여자들이 뒤따라 우르르 내린다.

최재환은 그녀들을 화장실로 인도해주고 밖에서 대기했다. 비가 내린다. 커튼이라도 친 것처럼 세상이 우중충하다.

‘시현이 스케줄이··· 오늘은 수원 세트장이지.’

떨어져 있어도 이시현의 스케줄을 체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잘하고 있을까.’

아마 잘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으니까.

‘후······. 이제 좀 날이 시원해지려나.’

이시현을 생각하고 있으니 지겨운 비도 오늘은 운치 있게 느껴지는데.

웅. 웅.

최재환은 휴대폰을 꺼내 살폈다. 서혜연의 문자다.

[VVW에서 기사 초안 보내왔대. 어떻게 할 거야?]

엊그제 서혜연에게 전화가 온 것은 최재환에게 VVW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VVW는 이번 일에 물먹은 것 때문에 이시현을 악의적 기사로 흠집을 내려는 중이었고, 서혜연은 최재환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알려주려 한 것이다.

잠시 휴대폰을 본 끝에 최재환은 문자를 적어 보냈다.

[기사 그대로 내. 아니, 더 악의적으로 수정해서 내줬음 해]

곧바로 휴대폰이 다시 진동한다. 잠시의 망설임 뒤에 최재환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소리야?

서혜연의 목소리에 최재환은 순간적인 아찔함을 느꼈다. 겨우 한숨 고르고서야 비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문자 그대로야. 악의적으로, 아주 무참할 정도로 이시현을 씹어줘.”

-미쳤어?

“미치지 않았어.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이야. 비가 와서 그런지 시원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데? 난 그래도 그쪽 생각해서 연예부 후배한테 손까지 빌렸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얘기하면······.

“해줘. 해줄 거지?”

가끔은 어떤 부탁을 해도 그녀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해줄 거야. 이유나 알고 싶어서 그래.

“반전을 노려보려고.”

-반전?

“그래. 반전.”

서혜연은 더 얘기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전화가 끊어지기 전, 최재환은 다시 무거운 입을 열었다.

“결혼식··· 연기됐다며?

-어떻게 알았어?

“내가 세러데이에 아는 기자가 너 하나뿐인지 알아?”

-2주 늦췄어. 시댁 쪽에 일이 생겨서.

“···그래? 그럼 준비는 잘 돼 가?”

-응. 잘 되고 있어.

“그렇구나. 훗,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다.”

-끊을게.

뚝. 끊어진 전화에 최재환의 얼굴이 구겨진다. 힘없이 내신 입바람이 앞 머리카락을 흔들자 어지럼증이 다시 돋는다.

‘괜히 물어봤네.’

오지랖도 아니고.

“하··· 대체 나란 새끼는······.”

최재환은 좀 전의 실수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매번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어김없이 후회한다.

“매니저님!”

강보라의 목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봤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들의 모습에 그는 바로 우산을 폈다. 그러자 슬기와 레니가 캥거루 주머니 속에 들어가듯 우산 아래로 모여든다.

“가자.”

**

[아무 걱정하지 마. 까짓것 별거 아니잖아?]

이시현은 최재환이 보낸 문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만 나면 앉아서 저 짓을 하고 있다.

“어이구, 지겹지도 않아?”

강 실장이 물었다. 이전처럼 비꼬는 게 아니라 미소에 친근한 시선까지 담아 묻는다.

“봐도 봐도 좋네요.”

“하··· 이상해. 이상해.”

이시현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고, 강 실장은 구시렁대며 검은 봉지를 펼쳤다. 김밥이다.

“잘 먹겠습니다.”

이시현이 젓가락을 펼쳐 들었다. 녀석은 차 안에서 먹는 김밥이 맛있다고 난리지만, 한송이와 강 실장은 김밥이 물려서 컵라면이다.

한송이가 면을 호호 불고, 이시현이 김치를 건네주자, 그녀가 날름 받는다.

“너희 둘 그렇게 놀다가 정든다.”

강 실장은 흘겨 뜬 눈을 하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실제로 그런 케이스가 가끔 있는데, 매일 보는 얼굴이니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저 매니저만 골치 아파지는 일.

하지만 강 실장의 우려와 달리 한송이는 피식 웃었다.

“오빠, 내 타입 아닌 거 아시죠?”

“오케이, 서로가 오랜만에 마음이 맞는군.”

이시현도 만만찮게 받아친다. 강 실장은 둘의 모습에 질려버린 얼굴을 숙이고 라면을 입에 물었다.

후루룩.

부실한 끼니를 서둘러 때우고, 이시현이 대본을 손에 집었다. 그 열중하는 모습에 한송이와 강 실장은 차에서 나와 자리를 피해줬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갈 곳은 기껏해야 세트장 구석, 겨우 비만 피할 공간이다.

“후······.”

강 실장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비를 바라본다. 뭔가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은 하루인데, 오히려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다.

“후······.”

또 한 번 뱉고 한송이를 힐끗 본다. 그녀는 넋 놓고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무슨 생각 하고 있냐?”

“저요? 헐······.”

느닷없이 한송이가 깜짝 놀란다. 강 실장은 뭐지 싶은 그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녀가 이제는 또 놀란 눈을 하고 있다. 그러더니 ‘허!’ 숨을 토한다.

“왜에?”

“저 지금 매니저님 생각하고 있었어요. 헐··· 내가 왜?”

“최 실장?”

“그러게요? 헐! 내가 왜?”

그걸 왜 자꾸 나한테 묻는 거야, 하는 눈으로 강 실장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자 한송이가 뾰족 나온 송곳니에 손가락 하나를 깨물고 속삭였다.

“나 미쳤나봐. 요즘 매니저님한테 구박을 안 받았더니, 그게 그리워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너희 팀은 진짜 이상해. 진짜로.”

“실장님도 우리 팀이잖아요?”

“난 아직 정상이거든?”

“얼마나 버티나 보자구요.”

“뭐?”

“오빠 옆에 있으면요, 다들 이상해져요.”

한송이가 중대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듯 소곤거리자 강 실장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 보기에는 니가 제일 이상해.”

“치.”

강 실장은 입술을 빼죽 내민 한송이에게서 눈을 떼고 회색 카니발을 바라봤다. 그때 마침 세컨드 조연출이 차에 다가가고 있었다.

“가자, 슛 들어가나 보다.”

서둘러 담뱃불을 끄고 움직인다. 두 사람이 차에 타자 마침 이시현이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거 또 눈빛 변하네.’

강 실장은 이제 놀라기도 지쳤다.

박한영도 저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지만 보통은 촬영 중반 이후, 집중력이 최고치에 올랐을 때,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됐을 때나 그랬다. 그랬는데··· 이시현은 슛만 들어갈라치면 자동으로 박춘삼 모드다.

세트장에 들어가니 이시하라 유이가 대기하고 있었다. 분장을 끝내고 스탠바이 상태인데, 일본에서 온 방송관계자들과 함께다. 인터뷰 중인 것 같았다.

“시현 씨 통역 좀 부탁해.”

이시현을 본 감독이 유이의 디렉션을 위해 통역을 부탁한다.

요 며칠 서로에 대해 조금 알게 된 이후로는 통역은 무조건 이시현에게 부탁하는데, 아무래도 배우의 입장에서 감독의 의향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유이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여기 이 부분에서는 말이야······.”

탈영에 성공한 박춘삼은 간신히 서울에 당도하지만, 이미 북한군에 함락된 서울에서는 여동생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설상가상 북한군에 붙잡힌 박춘삼.

수용소에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이시하라 유이를 만나게 되는데.

32# 수용소 / 밤

자정이 가까운 깊은 밤.

북한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 박춘삼은 수용소의 구석진 공간에서 신음한다. 그러던 중 북한군에게 농락당해 쓰러져 있는 일본인을 눈에 담는데.

박춘삼 : (지친 얼굴로 벽에 기댄 채로) 우리말 할 줄 압네까?

유이 : (바닥에 쓰러져 있는 채로 말없이 박춘삼을 바라본다)

박춘삼 : 억울해하지 마시오. 그쪽 나라가 우리한테 한 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진 않으니까.

유이 : 억울하지··· 않습니다.

박춘삼 : (그녀가 말을 알아들어서 살짝 놀란) 거 말은 바로 하라고··· 억울해하지 말라고 했지, 억울하지 않다고 거짓부렁 하라고 한 건 아니오.

유이 : (말없이 박춘삼을 바라본다)

박춘삼 : (역시 말없이 유이를 바라보며) (E) 우리 희재도··· 딱 저만한 나이인데.

3대의 스튜디오 카메라는 각각의 위치에서 연출의 지시를 따른다. 두 배우의 풀샷, 이시하라 유이의 표정, 그녀의 시선, 이시현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뒤에 다시 두 사람의 풀샷을 잡는다.

일본 방송관계자들, 그리고 박태 감독의 눈이 연출 모니터에 집중되고.

“컷.”

힘없는 목소리. NG컷이다.

“왜?”

문제없어 보였는데 NG가 나자 촬영 감독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묻는다. 그러는 사이 박태 감독이 손에 쥔 대본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배, 잠깐만 스톱해요. 아니다··· 동태야.”

“예, 감독님.”

쪼르르 달려온 조연출.

“너 여기 앉아. 몽타주 따고 있어.”

“예? 제가요? 제가 어떻게 해요?”

“그럼 놀까?”

그 말 한마디 하고 휴대폰을 꺼내 든다. 세트장 입구로 나온 박태 감독은 뚝뚝 떨어지는 비를 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작가님, 나 미친 소리 하나만 할게요.”

-뭐예요?

박태 감독은 얘기에 앞서 입술을 훔쳤다. 지금부터 할 얘기, 작가가 정말 듣기 싫어하는 얘기다.

“우리, 대본 좀 수정하고 가요.”

-예?

“박춘삼이랑 유이··· 러브라인 넣읍시다.”

-감독님!

애초 이번 특집드라마에서 로맨스는 완전히 제외하자고 한 이가 박태 감독이었다. 한국 드라마 로맨스판이라지만 단막극에까지 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가 없잖아?

-그렇게 싫다고 하실 때는 언제고요? 그리고 지금 와서 어떻게 해?

“그럼 어째? 배우가 바뀌었는데.”

감독의 시선이 세트장의 이시현에게 향한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그렇게 해요. 배우 얼굴이 로맨슨데 어떻게 하냐고.”

-감독님!

“아, 그리고 다음 주에 연예가소식팀에서 인터뷰 온다는데, 작가님도 오실 거죠?”

-말 돌리지 말고요!

“아무튼··· 당장 수정 들어갔으면 하는데?”

-감독니임!

작가가 뭐라고 하니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안 한다고 하면 새끼작가라도 어디서 하나 주워올 생각으로 휴대폰 전원 버튼까지 꾹 누른 뒤에야 자리로 돌아가는데, 일본 방송관계자들의 통역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저 감독님.”

“왜요?”

“저분들이, 이거 정확히 장르가 뭐냐고 묻는데요?”

“뭐긴 뭐야, 드라마지.”

“아니, 세부 장르 있잖아요. 액션인지, 다큐인지, 전쟁물인지.”

그 질문에 감독은 잠시 통역과 일본 방송관계자들을 번갈아 바라본 뒤에 이시현을 가리키고 답을 내놨다.

“얼굴.”

“예?”

“얼굴이 장르라고.”

통역이 멍하니 쳐다보자 감독이 자리에 앉고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동태야,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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