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58화 (58/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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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으로 보여준다 (2)

철수하는 성지훈 팬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뭔가에 얻어맞은 모습이다. 맹렬히 치켜들던 피켓을 숲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조연출을 비롯한 스태프들도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확실히 성지훈은 잽도 안 되는 외모의 배우가 지금 나타났는데, 눈으로 봐도 믿기질 않는다.

어떻게 계란세례를 퍼 맞고도 빛이 나지?

‘허··· 장난 아니네.’

조연출이 마른 침을 삼킨다. 그러잖아도 얼마 전에 바닷사람들 이야기를 연출한 감독에게서 이시현에 대해 귀동냥을 들었다. 뭐라더라. 잘해주라고? 친해지면 좋을 거라나.

“안녕하십니까!”

대충 얼굴에 묻은 것만 훔쳐낸 이시현이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한다. 그제야 눈만 깜빡이고 있던 조연출이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나 조연출 황동태입니다.”

“배우 이시현입니다!”

깍듯한 자세에 큰 목소리가 곁들여진 인사. 그런데도 조연출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시선으로 이시현을 바라봤다.

낙하산 타고 내렸으면 바로 드라마국으로 튀어왔어야 하거늘. 자신의 촬영 날이 돼서야 얼굴을 비친다는 건 아주 건방지거나, 개념이 없는 배우 둘 중 하나다.

“근데, 옷을 갈아입어야 할 텐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촬영 들어가면 의상 갈아입잖아요.”

조연출의 걱정에도 이시현은 해맑게 웃는다.

반면 이시현에게 달라붙어 머리를 정리해주는 스타일리스트는 입이 댓바람 나와 있다. 저것들 가만 안 둔다고, 다 기억하고 있다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송이야, 내 말이 맞지? 샵 안 들리길 잘했지?”

“네네, 대단하십니다.”

이시현은 오늘 샵을 들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을 했으니까. 그런데 그걸 웃으며 얘기하고 있으니 한송이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옷에 묻은 계란 냄새 때문에 차에 탈 수가 없어 이시현 팀은 스태프들과 함께 현장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특이한 친구네.’

비포장 길을 걷는 동안 조연출 황동태는 이시현 팀을 흥미롭게 살폈다.

일부러 싫은 티 팍팍 내고 있는데도 해맑게 웃는 배우.

심지어 스타일리스트의 짐가방까지 챙기고 살갑게 그녀의 등을 밀어주기까지 한다.

“사이가 좋으시네요?”

조연출 황동태가 이시현에 대한 경계심을 살짝 풀고 말을 붙였다.

“저희가 이러고 놀아요.”

이시현이 맑게 웃는다. 그 웃음에 황동태는 당황스러웠다.

‘남자 웃음이 왜 저래?’

같은 남자로서 무척 경계심이 느껴지는 미소다. 근데, 저 매니저는 또 왜 저렇게 뚱한 얼굴이야?

“에이씨, 계란 냄새.”

투덜대는 이시현의 매니저.

**

촬영지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배우들이 보인다. 이시현도 한 시간이나 일찍 왔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도착해 있었다. 그 때문에 졸지에 늦은 것처럼 보이게 된 이시현이다.

“감독님!”

황동태가 연출 감독에게 쪼르르 달려간다. 그러자 색이 바랜 청재킷을 걸친 감독이 이시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이시현입니다.”

이시현의 허리가 자동으로 접혔다. 뒤에 있던 강 실장도 이번에는 재깍 허리를 숙였다.

감독이 이시현을 빠르게 훑어보며 코를 막는다.

‘어이구 냄새··· 지에스가 대체 무슨 약점을 잡은 거야?’

국장이 그렇게까지 급하게 주연 배우를 교체하고, VVW에서는 그걸 군말 않고 받아들였다. 정말 요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방송국 입사 10년에 별의별 꼴을 다 봤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

“반가워요. 나 박태라고 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해야지. 근데, 대본은 외워왔어요?”

“예.”

박태 감독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이시현을 눈에 담는다.

지난 7월 31일에 주연 배우가 교체됐다. 촬영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고사까지 지내고, 배우와 스태프들 상견례까지 끝난 상황에서 갑자기 주연 배우 교체라는 오더가 내려온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이시현에게도 겨우 이틀밖에 시간이 없었을 거란 얘기이니 대본을 외지도 못했을 거라는 게 박태 감독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시현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니 감독의 시선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이시현의 하얀 얼굴이 감독의 눈에 들어온다. 가만 보니 입술이 약간 튼 것 같은데.

“밤 샌 거예요?”

“예.”

낮은 목소리와 함께 이시현이 웃음기 가신 얼굴로 끄덕인다. 그제야 박태 감독은 짧은 신음 속에 턱을 쓸어내렸다.

낙하산 주제에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건 상관없다.

자세가 됐건 안 됐건 그것도 상관없다.

문제는 연기.

그게 걱정이었는데, 이 정도면 준비는 된 것 같고··· 하지만 또 대사만 외운다고 되냐 이거다. 분명 시작부터 NG가 날 게 눈에 훤하다. 배우들과 호흡 한번 못 맞춘 상태니까.

‘그리고··· 비주얼이 너무 센데.’

너무 잘생겨도 문제.

배우를 캐스팅할 때는 기본적으로 캐릭터와 매칭이 돼야 한다. 인지도도 고려해야 하고, 배우들 간의 상극도 고려해야 한다. 캐스팅만 끝내도 드라마 촬영 반이 끝났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에이, 골치 아프네.’

박태 감독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일부터 쏟아진다더니만, 아무래도 어둑어둑한 것이 당장 오늘부터 비가 시작될 것 같다. 망할 놈의 기상청.

‘이거 오늘은 얘만 잡아야 되나.’

정해진 촬영 일정이 있지만 차라리 오늘 날 잡아서 이시현 씬만 몰아 찍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박태 감독의 머리에 스며든다.

어차피 같이 갈 거, 어떤 성향의 배우인지 알고 서로가 빨리 적응하는 게 낫다. 그렇지 않으면 촬영 내내 꼬인다.

다행히 박태 감독은 좀 전에 국장에게서 B팀을 투입해 준다는 확답을 받았다. B팀이 수원 세트에서 촬영을 나눠서 가면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흠··· 아니면 그냥 가야 하나.’

잠시 고민이 이어진다. 어쨌든 감독들과 상의를 해봐야겠지만 10년 경력의 박태 감독이다. 그가 다시 이시현을 쳐다봤다.

“일단은 인사부터 하고 얘기하자고. 동태야, 시현 씨 상견례 좀 시켜줘라. 배우진도 한 바퀴 돌고··· 돼지머리 아직 안 치웠지?”

“예, 꽝꽝 얼려놔서 안 상했을 거예요.”

“배우 씻겨서 상견례 시켜라. 이것들이 계란을 상한 걸 가져왔나.”

감독이 한숨을 내쉰다. 지금 상황이 뭔가 어수선하고 도통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예, 시현 씨 가요.”

황동태가 재빨리 이시현에게 손짓한다. 감독의 기분이 안 좋으니 즉각즉각 움직여야 했다.

“아, 매니저님은 그냥 여기 계시죠? 그게 나을 것 같은데.”

“아, 예.”

황동태의 조언에 강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매니저가 항상 따라다니는 게 좋은 건 아니다. 과잉보호하는 학부모를 좋아하는 선생님은 없으니까.

“우선, 씻으러 갑시다.”

촬영장 근처에 계곡이 있어 씻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황동태는 이시현의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수건과 티 하나 챙겨서 이시현을 계곡으로 끌고 갔다.

“시현 씨, 좀 서두르자고.”

“예.”

황동태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중에 이시현을 무심히 바라봤다. 이시현이 상의를 훌러덩 벗는다.

‘헐.’

순간 입에서 담배를 떨어트린 황동태.

‘진짜 비주얼 끝판이네.’

이시현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상체를 일으킨다. 물에 젖은 모발이 빛을 반사한다. 물기가 뚝뚝 흐르고, 쇄골을 타고 가슴을 타 배꼽 사이로 흘러간다.

우당탕탕!

불현듯 들린 소리에 황동태가 고개를 돌렸다. 스태프들 챙기러 온 밥 차 아줌마가 식기를 닦으러 왔다가 뒤로 발랑 자빠진 것이다. 이시현이 첨범첨벙, 물을 밟고 달려가 그녀를 일으킨다.

“괜찮으세요?”

“어, 어, 어!”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이는 밥 차 아줌마. 그 옆에서 아줌마를 도우러 온 여자 스태프들도 멍한 건 매한가지다.

“조심하세요.”

생긋 웃는 이시현.

다시 계곡을 가로질러 온 이시현이 황동태를 향해 보고한다.

“감독님, 다 씻었습니다.”

또 생긋 웃는 이시현.

황동태는 그 웃음에 질투와 두근거림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계속 마주했다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것 같아 서둘러 계곡에서 벗어났다.

뒤이어 새 옷을 걸친 이시현과 스타일리스트가 올라온다. 그때까지도 밥 차 아줌마와 여자 스태프들은 그 자세로 이시현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이번 드라마, 왠지 느낌이 좋네······.’

황동태는 생각과 함께 옆을 슥 쳐다봤다. 배우가 키까지 커서 고개를 비스듬히 추켜올려야 시선이 겨우 닿는다.

“드라마 촬영은 처음이시죠?”

“열심히 할게요. 못하는 거 있으면 얘기해주세요. 저 그런 거로 안 삐지니까.”

“하하.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아니에요, 감독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언제든 편히 얘기하세요.”

“감독은 무슨.”

“에이, 조감독님도 곧 입봉하실 거잖아요.”

“하하. 시현 씨, 볼매네.”

“볼매요?”

“볼수록 매력. 하하하.”

싹싹한 이시현의 태도에 황동태가 경계심을 풀고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인다.

이내 두 사람은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진 여배우 앞에 섰다.

그녀는 나무 그늘 옆 의자에 앉아 담요를 무릎에 덮고 있었는데, 이시현이 긴장된 얼굴로 그 앞에 서자 황동태가 소개를 했다.

“선생님, 주연 왔습니다. 주연.”

**

“나 기억나?”

그녀의 질문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중견배우 최미숙.

바닷사람들 이야기 대본리딩 현장에서 마주쳤던 적이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고.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미소인지 치기인지 모를 시선으로 나를 본다. 그래서 문득 생각이 나는데, 내가 매니저들에게 항상 얘기하던 게 있다. 여배우들 본심은 시선에서 찾으라고.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에게 머쓱한 미소를 보였다. 입장이 입장인지라 너무 딱 부러진 것도 좋지 않다. 조금 모자라 보여도 일단은 자세를 낮추는 게 좋다.

“잘할 수 있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해? 잘하는 게 중요하지.”

“예!”

최미숙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다른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했고, 나는 현장에 있는 배우들을 찾아 허리를 계속 숙였다.

어떤 이는 나를 응원했고, 어떤 이는 나를 흘겨봤고, 어떤 이는 귀찮아했다.

그러다 얘기가 길어질라치면 황동태가 중간에서 차단했는데, 촬영장에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산에서는 해가 빠르게 기울기 때문에 촬영 시간이 한정된다.

8.15특집드라마 [우리 오빠]

이야기는 실화를 재구성했다.

해방 전후와 뒤이은 6.25 전쟁의 참혹상을 담는다.

일제의 탄압 속에 고아가 된 박춘삼(이시현)과 박희재(고우희)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광복과 함께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6.25전쟁이 발발하고.

남매에게는 다시 만날 마지막 기회가 찾아오는데······.

드라마는 박춘삼이 속한 북한군이 숲에서 남한군과 대치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여동생을 만나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남으려는 박춘삼.

총알이 빗발치는 그 속에서 남과 북으로 나뉜 동포가 서로를 겨누고 죽여야 했던 당시의 현장이 오늘 카메라를 통해 재현된다.

“시현 씨, 우리 드라마에 일본 여배우 출연하는 거 아시죠?”

“예, 알고 있어요.”

그녀는 남한에서 박춘삼을 도와주는 일본인 선생님의 역할이다.

“근데 통역이 도착하지 않아서··· 에이 모르겠다.”

황동태가 걸음을 서두른다. 그러더니 검은 차량 곁에서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일본의 아역 출신 여배우 ‘이시하라 유이’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 이시하라 상.”

황동태가 그녀 앞에서 괴상한 손짓으로 나를 가리킨다.

“주, 주연··· 메인 엑터.”

용케 말을 알아들은 이시하라 유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현입니다.]

“에?”

황동태가 놀라서 나를 본다. 이시하라 유이도 큰 눈을 깜빡였다.

[일본어를 할 줄 아세요?]

[조금 할 줄 압니다.]

[하, 다행이다.]

그녀가 가슴에 손을 얹고 미소를 보인다.

흔히 똥머리라고 하는 올림머리가 그녀의 작은 머리에 예쁘게 올라와 있다. 이마가 드러나서인지 짙은 눈썹과 어울려 인상이 시원해 보인다.

‘이시하라 유이.’

그녀가 이 드라마를 선택했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드라마 결과가 좋지 못했으니 그녀의 용기는 무의미해졌다. 방송계에도 낙인이 찍혀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을 테고.

내가 그녀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잘됐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시하라 유이가 작은 손을 내밀고 눈을 반짝인다. 오소리와 비슷한 나잇대. 어리고, 예쁘고, 또 앞으로도 무난하게 커갈 여배우. 그녀가 잘되기를 바라며 나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시하라 유이가 차 속으로 들어가자 황동태가 놀란 얼굴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야, 지에스 대단하다. 대단해.”

“뭐가요?”

“아주 준비를 단단히 시켰네요. 하하하!”

기분 좋은 웃음 뒤에, 황동태가 다시 말했다.

“힘들죠? 인사도 보통 일 아니야. 그럼 이제 가요.”

“저기.”

“왜요?”

“저 아직 인사를 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예? 다 끝났어요. 오늘 온 배우들은 다 인사했는데.”

“저기······.”

나는 한쪽에서 우르르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엑스트라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누구는 군인 1이고, 누구는 사망자 1인 그들을 가리키자 황동태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팀이잖아요.”

“팀?”

내 말에 황동태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네··· 반장님!”

황동태가 엑스트라 반장에게 나를 데려갔다.

나는 엑스트라들과도 인사를 나눴고, 그런 뒤 돼지머리에 절 한번 하고, 연출팀, 미술팀, 조명팀, 촬영팀의 스태프들을 거쳐 박태 감독에게 다시 왔다.

“자 그럼 시현 씨, 오늘 시현 씬만 몰기로 했어. 한 열 개는 가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미리 체크는 해줄게.”

“예!”

대답이란 놈은 항상 최우선으로 튀어나온다.

“좋아. 동태야!”

“예, 감독님.”

“스크립터 데려와서 오늘 촬영할 씬 시현 씨한테 알려주고, 시현 씨는 바로 분장 들어가고.”

감독의 지시대로 나는 분장을 시작했다. 미술팀 스태프들이 북한군 군복을 가져온다. 그런데 바지를 손에 든 여자 스태프가 이마를 긁적이며 곤란한 얼굴로 나를 본다.

“아, 길이가 안 맞겠네······.”

덕분에 바짓단까지 뜯어서 수선하느라 시간이 지연됐지만 그 사이 그을음 분장이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렇게 이시현이 아닌 북한군 박춘삼이 완성되어갔다.

‘후······.’

나는 숨을 크게 쉬었다. 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지난 이틀 동안 오로지 대사만 외웠다.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있어 내게 허락된 시간은 단 이틀.

주연 배우가 됐으면 응당 KIS 드라마국을 찾아야 했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저 필사적으로 대사를 외우고 또 외웠다. 쉼 없이 중얼거리고, 감정을 토해내고, 다시 삼키고, 씹어 먹는 과정이 반복했다. 그나마 한송이가 불평하지 않고 대사를 맞춰줬다.

물론 촬영 일정이 있으니 하루 이틀에 올인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대사는 가장 기본이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연기는 매순간 바뀔 수 있어도 대사는 바뀌지 않으니 말이다.

‘씬이 열 개라.’

대규모 폭발 씬과 전투 씬이 섞였다.

‘역시 박태 피디.’

내가 알고 있는 ‘또라이’ 중에서도 상또라이. 어떻게 검증도 안 된 배우의 촬영 첫날에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지? 아니면 아예 망쳐서 지에스에 책임을 묻겠다는 걸까.

어찌 됐든 상관없다. 내가 잘하면 되니까.

그리고 박태 이 양반은 잘하는 배우는 확실히 밀어주고 대우해주는 감독이다.

‘후······.’

나는 잠시 대본을 손에 쥐었다. 촤르르··· 오늘 소화할 씬들이 하나같이 호흡이 길다. 보통 드라마가 편당 70분인 반면 815특집드라마는 120분 분량.

씬 열 개가 하루 만에 가능할까. 산에서?

가능은 하겠지. 일주일에 드라마 2편을 촬영, 편집, 방송까지 하는 사람들이니 불가능한 것은 없다.

문제는 촬영 여건인데··· 숲, 그리고 비가 예고돼 있다.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

아마 감독도 오늘 다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을 테고. 그냥 해보다 안 되면 빼거나 다른 씬으로 돌릴 생각일 테지.

‘총 147 씬······.’

앞으로의 열흘이 정신없이 흐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긴장되냐?”

등 뒤에서 들린 소리. 강 실장이 나를 보고 있다. 그래도 올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매니저로서의 눈빛이다.

“예.”

“별거 아니야. 후딱 끝내자.”

웬일로 매니저다운 소리를 하네.

“그래요. 후딱 끝낼게요.”

강 실장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래도 옛 동료의 응원을 받으니 기분이 묘하다.

5# 숲 / 낮

박춘삼이 행군 중에 나무에 핀 꽃을 보고는 여동생을 떠올린다. (천천히 손을 들어 꽃을 만진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는 북한 장교.

북한 장교 : 뭐하네?

박춘삼 : (서둘러 꽃에서 손을 떼고 총기의 멜빵끈을 붙잡는다)

이어지는 행군. 그때 어딘가에서 들리는 탕! 소리

감독의 디렉션이 정신없이 내 귀에 흘러들어온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분주하고, 긴장된다. 수많은 이들이 나를 보고 있고 이 일에 매진하고 있다.

“자자, 갑시다, 스탠바이!”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나는 촬영 동선에 서서 총기의 멜빵끈을 붙잡았다.

이제 나는 북한군 박춘삼이다.

카메라가 돌아가면 이시현이라는 존재는 사라져야 한다. 실수는 곧 압박이고, 컷 소리는 내게 안도의 숨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후······.’

신인 배우라면 긴장될 수밖에 없는 촬영장 공기가 이곳에 가득하지만, 나는 다르다.

매니저로서 숱하게 찾은 촬영장의 공기는 내 폐부 깊숙이 각인 됐다. 나무와, 흙과, 바람의 냄새가 오랜만이라고 아우성이다.

가끔 산에서 밤을 새는 촬영이 있으면 배우와 함께 새벽의 어스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아침의 숲에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나는 끊었던 담배에 미련을 가지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배우.’

다른가. 아니면 다르지 않은가.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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