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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기다렸다, 준비된 이들을 (2)
차 대표가 월말평가를 위해 연습실로 내려가고서야 우리는 정신을 추스르고 2층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왁자지껄한 건물.
오늘은 연습생들이 총출동해서인지 복도며 사무실이며 정신이 없다.
“안녕하십니까!”
최재환을 본 연습생들은 하나같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
그럴 때마다 최재환은 아이들 등을 한 번씩 토닥여주며 열심히 하라고 응원인데,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실장이라는 직함 때문인지 최재환이 한 단계, 아니 몇 단계 성장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틀린 말 아니다.
카페에 도착하니 다섯 명의 잘생긴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이 최재환을 보자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드르륵.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
최재환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나는 그들을 슥 쳐다봤다. 자식들··· 일어날 거면 제대로 일어나지, 다리를 반쯤 접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다가 다시금 내려놓는다.
‘블랙보이 저 녀석들 인성이 개판이었지.’
나는 저놈들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계약 기간 만료와 동시에 바로 해체해버렸다. 그에 따른 대체재가 ‘TLON’이라는 5인조 아이돌 그룹이다.
우리는 블랙커피 두 잔을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말복이라 그런지 창 너머 하늘이 유난히 눈부시다.
“크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가볍게 생각하자. 드라마에만 신경 쓰는 거야.”
커피 한 모금을 시원하게 빨아들인 최재환이 미소를 흔들며 얘기했다.
“드라마?”
내가 되묻자 최재환이 입술을 찌푸리고 속삭인다.
“8.15.”
“아.”
차 대표가 내게 가르쳐 준 것 중 하나가 ‘약점’이다. 때로는 상대의 약점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걸 그에게 배웠다.
아마 차 대표는 KIS 국장의 약점을 쥔 모양인데, 그게 뭘까? 차 대표가 쥔 약점들이 하도 많아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소수일 뿐이고, KIS 국장에 관한 건 모르겠다. 근데 지금 시기면, 국장이 누구더라.
“이제, 닥치는 대로 움직이는 거야.”
최재환이 그 무서운 말을 피식 웃음과 함께 얘기한다.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재환도 나를 흉내 내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제 바이바이에도 최대한 협조하자. 너 처음 써준 곳이니까, 잊으면 안 된다?”
“당연하지.”
사실 지금까지도 바이바이에는 충분히 협조를 해왔다. 그저 CF 모델로서 대외적으로 활동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였을 뿐이고, 우리는 이미 할 수 있는 부분은 하기로 지난번 회식 때 얘기를 끝냈다. 거기다 영화가 무기한 보류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어찌 됐든 바이바이 CF는 2탄이 곧 들어갈 것 같다.
근데 뮤직비디오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곧 일이 터질 것 같은데, 나는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은 여전히 얼떨떨하지만 8.15특집드라마만 신경 쓸 생각이다.
‘그날 김은수 작가를 만난 게··· 또 이렇게 이어지네.’
8.15특집드라마.
남 주인공의 발연기로 코미디가 된 드라마.
그걸 이번에는 내가 하게 된다니. 기가 막힌 운명의 장난이다.
‘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낙하산. 차 대표가 쥔 약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 인해 배역이 교체된다면 방송국 내 잡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너, 찍히고 들어가야 할 거야.”
최재환이 내 생각을 그대로 얘기해준다. 무거운 얼굴로 속삭인다.
“출연 배우들도 문제지만, 하필이면 주인공이 성지훈이니.”
솔로 가수 성지훈.
그 팬들도 상당하니 여러모로 고생 좀 할 것 같다.
‘머리라도 쥐어뜯기려나.’
어느 시기나 팬덤은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준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죽은 쥐나 칼을 소포로 보내거나, 혈서를 써서 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2016년은 단어 몇 개로 사람을 죽이는 악플 시대다.
아마 그런 과정을 몇 번은 거쳐야 할 것 같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차 대표는 마음을 굳혔고,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피할 생각은 없는데··· 일이 이상하게 흐르네.’
이시현이 배우를 지망했다고 나도 배우로서의 삶을 고집하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내 기준은 오직 행복이라고 처음부터 선을 긋고 지금까지 걸어왔으니까.
“오소리 선배님은 요즘 어때?”
내 질문에 최재환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시선을 빨대에 고정하고 말한다.
“촬영하고, 화보 찍고, 집에 가고··· 뭐 그렇지.”
피식 미소를 보이는 최재환. 조금은 그늘진 표정이다.
“넌 어때? 강 실장이 잘 해주냐?”
“형만 하겠어?”
“자식, 내가 그래도 좀 잘했지?”
최재환이 눈꺼풀을 깜빡이며 나를 본다. 참 내, 이거 뭐지··· 나 저 녀석이 왜 이렇게 좋냐.
“그런지 알면 빨리 오시던가.”
“나도 가고 싶은데, 상황이 그러네. 어쩌면 너 드라마 촬영도 강 실장이랑 다녀야 될지도 모르겠다.”
쪽쪽, 빨대를 빨아들이는 최재환.
“됐어. 신경 쓰지 마. 형이 어디 있든, 우린 팀이잖아.”
“자식.”
우리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당장 다음 주부터 또 비가 쏟아진다는 얘기부터, 촬영에 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촬영장에 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최재환이 설명을 해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그의 말을 경청한다.
“일단 가면 무조건 허리부터 숙여야 돼. 알지?”
“알지.”
자세를 낮추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최재환은 그 말을 신신당부했다. 그의 말이, 눈이 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본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불안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최재환의 입장에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흥분될 것이다.
사실 할리우드라는 단어에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미국에도 단역배우는 있고, 지나가는 행인 1도 존재한다. 나라는 놈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그들이 내게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행인으로 원할지, 아니면 총에 맞아 죽는 킬러를 원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단지 하나 확실한 것은, 차 대표가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이시현을 5년이나 내버려뒀을까? 그저 차 대표의 눈에는 지금까지 이시현은 아웃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젠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걸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줬다. 행동으로.
“후··· 너 잘할 수 있어. 부딪치는 거야.”
최재환이 나를 응원한다. 혹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컵에 담긴 얼음까지 아작아작 깨부숴 먹은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여자 연습생들이 카페에 온다.
대체 머리가 몇 개야. 한 열댓 명은 돼 보이는데, 평가가 끝난 연습생들이 유일하게 단거를 입에 댈 수 있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서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이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 하는 거지.
“안녕하세요, 실장님!”
꽃같이 예쁜 아이들이 단체로 최재환에게 인사를 하고, 나를 흘깃 본다. 이제는 붉은 꽃이 된 그녀들에게 최재환이 흐뭇한 미소로 묻는다.
“잘했어?”
“에이, 그냥 그랬어요.”
“이놈들아, 그냥 그러면 어떻게 해? 니들도 어서 데뷔해야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습생이 크게 목청을 높여 말하자, 최재환이 하하! 웃으며 카운터를 쳐다본다.
“니들 뭐 먹을래?”
“앗! 사주시는 거예요?”
쪼르르 다가오는 연습생들. 갑작스러운 호구 아저씨의 등장에 잔뜩 들뜬 얼굴이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는 최재환에 앞서 내 긴 팔이 그의 옆을 지나 카운터 직원에게 카드를 건넨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야.”
“됐어. 내 매니저 내가 챙겨야지. 형은 내 카드나 챙겨줘.”
나를 쳐다보는 초롱초롱한 눈들을 뒤로하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한참 뒤 최재환이 내 옆에 와 카드를 툭 건넨다.
“쟤들 비싼 거 먹었다.”
“훗, 비싸 봐야.”
“10만 원 넘게 나왔는데.”
“···이 자식들이.”
분노의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꾹꾹.
“조금만 기다려. 상황 좀 정리되면 조 팀장님이 오소리한테 붙는다니까.”
“그래, 빨리 와. 10만 원어치 벗겨 먹게.”
“훗.”
최재환이 웃는다. 나는 또 그걸 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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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집에 도착한 나는 소파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부스럭. 캔맥주 몇 개와 과자 하나가 담긴 봉지. 그런 뒤에 비디오테이프를 TV 선반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시원한 물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뜨거웠던 머리가 식어간다.
물기를 닦고, 새 옷을 입고, 베란다 창을 연다. 선풍기를 틀고 소파에 앉았다.
잠시 멍 때리며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를 찾아 한국에 온 페이 프로덕션 스태프진. 그리고 차 대표의 결정, 최재환의 얘기들.
‘특집드라마라고?’
좋은 기회다. 지난번처럼 엎어질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이런 기회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몬스터 프로젝터를 위해 일본과 한국을 오간 이후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정’ 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이 됐다. 그런데 지금은 배우 이시현으로 성장하고 있다.
누군들 이런 경험을 해봤을까?
지금 이 성장은 정상적인가?
치익!
맥주 캔을 따고 한 모금을 마셨다. 탄산과 거품이 목을 채운다.
“크!”
손에 쥔 캔의 차가움을 느끼는 사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행복한 걸까.’
최재환이는 바쁘고, 내 주변도 바람이 들썩이고 있다.
특집드라마의 성공 여부는 모르겠다.
망했던 드라마가 나로 인해 성공할 거라는 기대는 가질 수 없다. 하, 멍청이가 된 느낌이랄까. 나 최재환이, 정 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스타에게 쏟아지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환호성, 빛의 향연이 감은 눈꺼풀 위에서 번쩍인다. 그것들을 곁에서만 봤는데, 이제 내게 쏟아질 날이 머지않았음이 느껴진다. 손에 잡힐 듯이··· 정 엔터테인먼트 대표로서, 배우 이시현으로서 분명히 느껴진다.
“할리우드.”
그 단어 하나를 속삭였을 뿐인데, 들뜬 감정이 빠르게 식는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아시아의 배우들은 많다.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꿈의 무대니까. 하지만 대개는 일반인들의 이력서 한 줄처럼 그저 필모그래피를 채울 경험담이나 될 뿐이다.
근본적으로 할리우드에 뿌리내린 인종차별 문제를 극복하기 쉽지 않으며 언어의 장벽도 존재한다. 그러니 나라고 다를까. 일본어야 한때 일본에서 머문 경험에서 습득했지만, 영어는 아니다.
‘후······.’
남은 맥주를 마시고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쥐었다.
“이시현이 노래를 했다고?”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속삭였지만, 그런 기억은 없다.
비디오테이프 옆면에는 ‘캐스팅팀 19950515 이시현(74) 인터뷰’ 라고 적혀 있다. 정확히는 프로필 영상이 아닌 캐스팅 오디션 영상이다.
드르륵.
TV에 달린 비디오데스크에 밀어 넣었다.
치지직······.
잠시 화면이 깜빡이고, 출렁이고,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이시현입니다!
“하······.”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하고 말았다. 서둘러 리모컨을 집어 화면을 정지한다.
거울로 매일 보는 이 얼굴이 아닌, 진짜 이시현의 얼굴이고 모습이다. 시현아, 너는 그런 표정을 가지고 있었구나.
꾹.
다시 리모컨을 누른다.
-올해 나이 스물둘입니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요, 친척들 집··· 오가면서 컸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후······. 전 모델이 꿈이었습니다.
‘근데 내가 데리고 왔지.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재환이 형이 그랬거든요. 저도, 배우가 될 수 있다고.
‘···그랬지. 달콤한 말로 널 현혹했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볼을 닦고 이시현을 다시 본다.
-그래서,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세계적인 배우.
턱 끝의 눈물을 훔치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 막 영화관에 보면 외국 배우들 멋있잖아요? 저도 누군가가 저를 보면, 그게 또 외국인 관객이면··· 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됐으면 합니다.
이시현이 꿈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내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현이는 많은 얘기를 했다. 굳이 해도 되지 않을 얘기도 하고, 캐스팅팀 직원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들어주는 이나 말하는 이나 각자의 입장에서 얘기를 이어간다.
그걸 보면서 나는 정체된 생각 속을 거닐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영상을 보고 싶던 이유도 그다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리모컨을 드는데.
-할 수 있는 거요? 글쎄요. 하······. 저 지금 너무 떨려서··· 그거 카메라죠. 꺼졌다고요? 아, 노래요?
성시원 팀장은 이시현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했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이시현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다.
생각해보니 사내들끼리 그 흔한 노래방도 가본 적이 없네. 이런.
‘아니지.’
리모컨을 눌러 잠깐 다시 화면을 멈춘다.
‘그러고 보니까, 시현이 미팅했던 캐스팅팀 직원이 그달에 퇴사했었지. 그때 나한테 가요계가 어쩌니 마니 하고 나갔었는데······.’
다시 리모컨을 손에 쥔다. 캐스팅팀 직원의 목소리가 앵앵거리는 모깃소리처럼 들린다.
-후······. 그럼 부를게요.
화면 속 이시현이 호흡을 가다듬는다.
“아, 이런.”
리모컨을 내려놓다가 실수로 맥주를 쏟았다. 서둘러 일어나 걸레를 찾으러 움직이는데··· 나는 걸음을 멈췄다. 뒷머리는 오싹 치솟고, 등줄기에는 소름이 밀려온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거실 바닥에 흐르는 맥주를 뒤로하고 화면 속 이시현을 바라본다.
-이상하죠? 하··· 하··· 남 앞에서 불러 본 적이 없어서. 작년에 노래방 알바할 때 가끔 혼자서 불렀어요. 노래도 그때 처음 불러봤고. 하하··· 아, 그래요? 하긴 이 정도는 여기서 다 하겠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베란다를 타고 바람이 넘어온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내 목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속삭인다.
“최재환이 너··· 대체 뭐했던 거야? 이시현 이 자식이··· 진짜 몬스터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