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54화 (5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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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기다렸다, 준비된 이들을 (1)

「지에스 월말평가일, 2000년 7월 31일 월요일」

“송이야.”

차의 시동을 끈 나는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다가 멈칫했다. 텅 빈 차에는 나밖에 없으니까. 최재환은 오소리를 따라다니고 있고, 한송이는 오늘까지 쉬라고 했다. 강 실장도 일이 있어 빠졌고.

“하, 왠지 심심하네.”

홀로 있으면 혼잣말도 늘게 되는 법이다. 한송이라도 있으면 서로 다투는 재미라도 있는데. 후··· 오랜만에 느끼는 외로움을 짧은 한숨에 실어 보내고 차에서 내린다.

“오늘은 차가 많네.”

지하 주차장에 낯선 차들이 보인다. 월말평가일이라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다 온 느낌이다.

가끔은 타 회사에서도 평가를 관람하러 오는 만큼, 이날은 지에스에 매우 중요한 날이다. 누군가는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날이며, 또 누군가는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치는 날이다.

‘음흠흠.’

느긋한 걸음에 허밍까지 곁들여 매니지먼트 사업부에 도착했다. 오전 9시. 사무실에 정신 사나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월말평가일은 이렇듯 항상 바쁜데, 그래서 나는 이날이 좋다. 회사가 살아있는 느낌이 드니까. 물론 대표였을 때 얘기다.

그런데, 아무리 바빠도 배우가 왔으며 알은 척은 해줘야지.

‘후······.’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내 어깨에 투박한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최재환이 미소를 씩 그리고 있다.

“뭐야? 오늘은 오소리 선배님 촬영 없어?”

“이따가 지방 촬영이야. 그리고 임마, 너 아직 대표님 혼자 볼 짬밥 아니야. 나하고 같이 봐야지. 하하.”

최재환이 내 볼을 두드리고, 내 눈이 그를 꽉 붙든다. 며칠 못 봤다고 이 얼굴이 그리워질 줄이야. 자식, 여배우하고 며칠 함께 다녔다고 얼굴색이 아주 좋네.

“가자.”

우리는 5층 기획콘텐츠 개발부서로 향했다. 지난주 차 대표가 월요일에 기콘부로 오라는 얘길 했었고,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오면 알 거라나.

아무튼 기콘부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나는 앉아 있는 이들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성 팀장, 삐삐, 그 외 기콘부 직원들, 차 대표를 비롯한 지에스의 임원진, 그리고··· 외국인들?

“여러분, 배우 이시현입니다.”

정 이사가 나를 가리켜 소개하자 통역으로 보이는 여자가 외국인들의 곁에서 속삭인다. 7명의 지에스 임원진, 5명의 외국인이 나와 최재환을 주목한다. 그런데 옆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시선.

‘카메라?’

기콘부 사무실 한편에는 3대의 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나를 찍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 중에도 캠코더를 손에 쥔 이가 보인다.

“최 실장, 그리고 이 배우.”

정 이사는 우리가 당황하는 걸 이해한다는 듯, 미소와 함께 얘기를 꺼냈다.

“아마 지금 상황이 낯설 거야. 간략하게 얘기해줄게.”

그 말이 끝나자 삐삐가 다가와 뭔가를 건넸다. 두툼한 두께의 시나리오다.

[반추(反芻)]

“왜 그래?”

정 이사가 내게 묻는다.

“예?”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나는 정 이사를 마주 본 상태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금 시나리오를 살폈다. 첫 페이지를 시작으로 정신없이 넘긴다.

‘어떻게······. 어떻게 이게 나왔지?’

중국에서 가경 작가를 찾으러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을 때, 그가 할리우드 자본이 들어간 한·중·일 3개국을 배경으로 시리즈물을 준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제목이 반추였다.

현지 스태프와 빼갈 한잔 나눠 마시면서 들은 기억인데, 그 시나리오가 지금 내 손에 있는 거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2016년에야 얘기가 나오던 시나리오가··· 어떻게 지금.’

**

핵심 내용은 J라는 단체의 이야기다. 그들은 모두 J로 불리며, 각각의 J는 쌍둥이로 구성돼 2인 1조로 움직인다. 한 명은 킬러, 한 명은 사회에 침투하기 위해 키워지며, 쌍둥이는 기억을 공유해 언제든 서로를 대체할 수 있다.

시놉시스에는 남 주인공 성심그룹 회장 김은재의 이름이 진하게 표시돼 있다. 그 옆에 이시현이라는 이름까지.

김은재는 연인 유민서(J)를 사고로 잃지만, 그녀의 기억을 가진 정하연(J)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한다.

종국에는 정하연마저도 잃은 김은재가 자신의 기억까지 조작됐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게 되고, 마침내 스스로 킬러가 돼 J를 없애는 것이 이 시나리오의 줄거리.

총 3부작이며 시리즈 1편부터 한·중·일 3국 올로케이션이다.

“이사님, 이게 정말입니까?”

최재환이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정 이사를 향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을 했다.

“시나리오는 보름 전에 도착했어. 그래서 박 상무가 곧바로 일본으로 가서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을 만났고.”

차분한 설명은 여기까지였다. 정 이사는 기다리는 외국인들을 의식한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오늘은, 여기 페이 프로덕션 스탭진이 이 배우 자네를 오디션 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거야.”

꿀꺽.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내 머릿속은 굳어 버렸는데, 카메라는 계속 돌고 있다. 내 시선이 외국인들에게 닿자 통역이 설명을 잇는다.

“우리는 이시현 배우가 이 역에 맞는지, 이미지를 보러왔습니다. 당신의 연기력은 이미 프로필 영상과 뮤직비디오 영상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솔직히 우린 아직 당신의 연기력을 볼만한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얼굴을 찌푸리자, 통역이 뒷부분은 미국식 농담이라고 명시한 뒤 가볍게 웃는다. 경직된 나를 풀어줄 생각이었다면 실패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아무튼 통역은 계속됐다.

“그대로 서 있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당신을 보고, 촬영하고,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듭 말하는데, 우리는 당신의 연기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보러 온 겁니다.”

이미지캐스팅.

역할과 매칭 했을 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배우를 찾는 과정.

배우는 스토리를 영상으로 변환하는 수단 중 하나다. 자본과 스토리가 약할수록 배우를 향한 기대치는 높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후······.’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지만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심장의 떨림은 없다.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분명한 한 가지는, 세상 어디에도 배우의 머뭇거림을 기다려주는 카메라는 없다는 사실. 스타는 늘 스탠바이 상태여야 한다는 말, 누가 했더라.

바로 나다.

내가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잡자 최재환이 옆으로 물러났다.

잠시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시나리오 첫 장에 적힌 간략한 시놉시스와 정 이사의 설명을 떠올렸다. 그리고 번쩍, 눈을 뜬다.

이제 나는 배우 이시현이 아닌, 성심그룹 회장 김은재다.

J(쌍둥이)는 킬러와 일반인으로 성장한다. 물론 어린 시절의 훈련 과정은 동일하다. 언제든 서로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조작은 완벽하다. 일반인으로 성장해 사회에 스며든 유민서는 평범한 기억을 갖고 살아간다. 자신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어린 시절과 부모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다. 물론 만들어진 기억이다.

이제 나는 두 사람을 보고 있다. 사랑하는 유민서와, 킬러 정하연.

둘은 쌍둥이지만 서로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다. 성형수술로? 아니면 이란성이라서?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그녀들을 상상하고 눈앞에 그린다.

‘유민서······.’

그녀 이름을 나직이 속삭인다. 몰입하고, 다가간다.

인간의 집중력이란 놀라운 수단이지만 이를 원하는 때 십분 발휘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배우라고 이것이 쉽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인물을 창조하고, 눈앞에 그린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놈은 배우가 아니라 반쯤은 미친놈이다. 심지어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상상하고 창조하려 노력할 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흐릿한 형체나마 착시를 동반한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누구나 가능하다.

‘유민서는 어떤 존재일까.’

긴 머리의 청순한 느낌일까, 아니면 단발머리에 조금은 까칠한 느낌일까. 습관은 뭐가 있을까? 성격은? 또 그런 유민서를 사랑하는 김은재는 어떤 사람이지?

성심그룹 회장.

젊지만 카리스마를 가진 남자.

그런 자는 무모한 사랑은 지양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을 원할 것 같다. 하지만 빠져들고 나서는 거침없겠지. 마치 모래 늪처럼. 혹은 타오른 불길처럼 그녀를 삼키겠지. 자, 유민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오케이.”

갈색의 머리카락, 뿔테 안경을 쓴 덩치 좋은 외국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예의인지, 진심인지 모를 엄지를 척 내밀었다. 통역이 설명을 잇는다.

“우리는 이미지만을 원했는데, 당신은 10분 동안 무언가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의도나, 시간을 계산했나요?”

“둘 다 아닙니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나요?”

“유민서와 정하연, 그리고 그녀들 눈에 비친 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시나리오의 존재와 오늘 있을 테스트에 대해서 당신에게 함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지에스는 약속을 지킨 것 같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일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나아졌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나는 지금 유민서와 정하연에 대해서 궁금해졌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들이 보고 싶습니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나는 그날부터 그녀들을 생각했을 겁니다.”

“당신은 아까부터 그녀들에 관해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맡을 역은 김은재 입니다. 알고 있는 겁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은재의 존재 이유는 그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나는 무거운 숨을 토했고, 외국인들은 미묘한 표정 뒤로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잔상처럼 남아 있는 유민서와 정하연이 나를 바라본다. 일어선 차 대표와 임원진이 그녀들을 지나쳐 외국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서로가 미소 속에서 통역을 동반한 얘기가 이어진다. 우리를 덩그러니 놓아둔 채로.

“시현 씨.”

마침 성 팀장이 내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왠지 지쳐서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지금 이 상황이 버겁게 느껴져서다.

내가 잘한 걸까. 실수한 건 없을까.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든다.

“전에 프로필 영상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잖아?”

“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자신의 자리로 나를 이끈다. 서랍을 열더니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내게 건넸다.

“찾은 김에 나도 한번 다시 봤는데, 역시 내 기억이 맞아. 그때는 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언권이 없었는데··· 왜 그동안 시현 씨가 빛을 못 봤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더라.”

“······.”

“왜, 아무도 몰랐을까?”

이유를 캐듯 나를 보는 성 팀장. 그때 차 대표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돌린 자세로 서둘러 말한다.

“아무튼 가서 봐요. 복사본이니까 돌려주지 않아도 되고.”

“예,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나중에 커피나 한잔 사던가.”

싱긋 웃고 차 대표에게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정신없어 보인다.

나는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쥔 채로 최재환과 함께 기콘부를 빠져나왔다.

“그거 뭐냐?”

최재환이 묻는다. 흥분과 얼떨떨함이 남은 내 얼굴이 녀석의 눈동자에 비친다.

“별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게 말은 했지만 나는 손에 쥔 비디오테이프를 계속 내려다봤다.

지난번 회식자리에서 내가 노래를 하는 영상이 있다는 얘기를 성 팀장에게 듣고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데 기억을 떠올려봐도 이시현이 노래했던 기억은 없다. 그래서 그때 영상을 볼 수 없겠냐고 성 팀장에게 부탁했고, 좀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실로 자리를 옮겼다. 7층, 전망이 좋은 그 방의 소파에 앉는다.

“할리우드라니.”

최재환이 넋 나가 속삭인다. 믿기 힘든가 보다. 물론 나 역시도 믿지 못하겠다.

‘이게 무명의 배우가 주인공인 영화라고?’

말도 안 된다. 설사 촬영이 된다고 해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당연할 정도로 회의적인 생각에 휩싸였다.

성심그룹 김은재가 될 수는 있어도, 할리우드 배우 이시현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가슴은 뛰는데, 머리는 차가워지는 것이다.

그나마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건 시나리오상의 주요 배역이 나 혼자는 아니었다. 반추에는 몇몇 인물이 더 등장하지만··· 뭐, 그게 지금 상황에 무슨 의미일까. 주인공 김은재의 옆에는 내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는데.

“후······.”

내가 긴 한숨을 쉬며 시나리오를 살피는데, 최재환이 고개를 든다.

“대표님이 얘기 안 한 이유··· 알 것 같다.”

그가 허리를 펴고 앉으며 계속 말한다.

“시현아, 너 만약에 캐스팅이 되면 이거 하고 싶냐?”

“······.”

내가 대답이 없자 최재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의 오디션은 대단한 일이지만, 페이 프로덕션 스태프진에게는 일상이다. 내가 캐스팅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며, 내가 아닌 다른 아시아의 배우가 될 수도 있다.

이 바닥은 그런 곳이다. 모든 게 달콤한 솜사탕이다. 겉으로만 보면 구름처럼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비가 한번 오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 캐스팅도 되고, 영화가 성공할 수도 있겠지.’

문제는 거기에 걸리는 시간이다. 그리고 아시아 배우의 할리우드 진출은 단발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나 이시현의 나이 스물일곱. 빠르게 자리를 잡아야 할 시간에 해외를 돌면서 촬영하다 보면, 일이 년이 훅 지날 것이다.

최재환도, 차 대표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차 대표의 입장에서는 설사 내가 된다 해도 골치일 수 있다. 계약서의 도장은 금세 마르니까.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차 대표가 들어왔다. 정장 앞단추를 여민 그가 소파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고 나를 쳐다본다.

“얘기 안 해줘서 섭섭해?”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때문에 놀란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이 골치 아픈··· 장인어른.

“가경 작가, 이 양반 대단해. 페이 프로덕션이 판권을 가졌을 줄이야······.”

일본의 ‘페이 엔터테이먼트’는 90년대 초반 할리우드의 콜롬비아 픽스를 인수한다. 이후 사명을 ‘페이 프로덕션’으로 변경,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내가 아는 건 딱 여기까지다.

정 엔터테인먼트를 이끌면서 많은 배우와 가수들을 키웠어도 할리우드 진출을 생각한 적은 없다. 물론 가능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나리오 반추는··· 내가 살던 세상에는 탄생하지 않았었다.

“오디션 결과는 한 달 후에 나온다고 하네. 캐스팅되면 1편만 계약할지, 시리즈 전부를 계약할지도 고민해야 할 거야.”

“···예.”

“알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시현이 니 의견이야.”

“알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을 위해 움직일지, 아니면 확실한 걸 쟁취할지.”

솔직히 말해볼까?

나는 차 대표가 왜 내게 이런 선택권을 주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걸 보고 있는 걸까.

“어찌 됐든 오디션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달, 계약이 된다고 쳐도, 촬영까지 앞으로 최소 3개월에서 6개월은 시간적 여유가 되겠지.”

최재환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차 대표가 다시 얘기한다.

“좋아. 그럼 그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할리우드가 우리 배우를 원한다는데, 최소한 우리도 준비가 돼야 될 것 아니야?”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라보니, 차 대표가 소파 옆 단상에 놓인 전화를 손에 쥔다. 그러더니 나를 다시금 본다.

“내가 지금부터 이시현 널 드라마에 꽂아 넣을 거야. 분명 잡음이 크겠지. 그리고 나로서도 이거 꽤 많이 상처가 날 것 같아. 그래서, 할까? 말까?”

차 대표의 눈이 즉흥적인 선택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순간인데, 차 대표는 오랜 시간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때론 선택에 있어 시간은 중요치 않다. 그리고 차 대표의 선택은 늘 옳았다. 틀렸어도 결국에는 옳았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남자가 미운데··· 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대답에 앞서, 나는 최재환을 바라봤다. 그리고.

“하겠습니다.”

차 대표가 바로 전화기를 손에 쥐고 허리를 숙인다. 뚜르르··· 뚜르르······.

“예, 국장님. 저 차현성입니다.”

차 대표의 눈빛이 변한다. 차갑고, 매서운, 상대를 꿰뚫어보는 시선으로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준다.

“이제 빚 갚으실 때 된 것 같습니다. 8.15특집드라마, 내 배우가 해야겠습니다.”

그 목소리와 말투에 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차 대표는 서늘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다시 속삭였다.

“나 두 번 얘기 안 합니다. 내 배우가, 배우 이시현이, 주연 잡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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