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53화 (5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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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온도 (4)

화들짝 놀란 강 실장이 바로 등을 돌렸다. 이시현이 생긋 웃으며 여자들을 보고 있고, 여자들은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을 감추고 있다.

“너, 너 일본어 할 줄 아냐?”

“조금요.”

이시현은 그 말을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에 올라탔다. 한송이가 그 뒤를 쫓아 타자, 넋 나가 있던 강 실장이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타고 묻는다.

“뭐라고 한 거야?”

“뭐가요?”

“아까 여자애들 말이야.”

“아, 숨을 못 쉰다고 해서 숨은 쉬어야 한다고 그랬죠.”

“숨을 못 쉬어?”

“제가 좀 멋있잖아요.”

강 실장은 말을 잇지 못했고, 한송이는 게슴츠레 뜬 눈을 휘휘 젓는다.

‘이시현이 이놈··· 준비가 된 놈이었어.’

강 실장은 지금 여러모로 당황하고 있었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는데, 잡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일본어까지 할 줄 안다면······.’

차 대표의 선택지가 커진다. 지금 박한영 대타를 만들려고 이것저것 고민하는 눈치던데, 이시현에게 힘을 실을 가능성이 크다.

‘후······.’

강 실장의 얼굴에 착잡함이 물든다. 이시현이 잘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최재환. 녀석이 뜨면 그는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발언에도 힘을 잃는다.

그저··· 이렇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

「박한영 기자회견, 2000년 7월 28일 금요일」

강당에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진다. 눈부신 빛들의 향연. 단상에서는 의자 끄는 소리와 마이크 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박한영.

이제 겨우 서른의 미래가 보장된 배우는 오늘 기자회견의 주인공임을 천명하듯 단상에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기자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딱히 내용을 전달받지 못했다. 그저 박한영의 중대발표가 있으며, 그것이 혹 열애설이나, 해외진출이 아닌가 하는 얘기만 떠돌았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정확한 내용을 고지받고는 다들 충격 속에 모여든 것이다.

“안녕하세요.”

박한영이 마이크를 잡는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그는 오늘도 시선을 주목하게끔 하는 외모와 눈빛을 지녔다. 그런데 은퇴라니.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입술 끝을 깨물고 기자들을 눈에 담았다.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배우답게 강당이 기자들로 빼곡하다.

“오늘 여러분을 이렇게 모신 이유는······.”

잠시 얘기를 멈춘 박한영이 심호흡을 한다. 후, 숨을 한번 뱉고 결심한 듯 얘기를 꺼냈다.

“저 박한영은, 오늘 배우 박한영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남자 박한영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아······.”

기자들이 웅성거린다. 잠시의 소란 뒤 카메라 플래시는 한층 더 쏟아졌고,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이곳은 지금 전쟁터다.

왜!

고작 서른의 나이에?

이제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다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치켜들고 질문을 하는 것뿐이다.

“왜죠?”

“박한영 씨 왜 은퇴를 결심하신 겁니까?”

묵묵히 질문을 새겨들은 박한영은 떨리는 손으로 물병을 손에 쥐었다. 그는 잠시 입술을 축이고 다시 얘기를 꺼냈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저 박한영은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은퇴의 이유는······.”

조각상처럼 음영이 새겨진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손에 든 종이 위에 뚝뚝.

“은퇴의 이유는··· 완숙하지 못한 연기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 부족함에 대한 자괴감. 그런 많은 이유 속에서 제 자신을 돌아봤고··· 그 결과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설 용기를 냈습니다.”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사이 강 실장은 곁에서 착잡한 얼굴로 자신의 배우 박한영과 함께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을 뿐이었다. 항상 따뜻하게 느껴졌던 이 빛이 지금은 맨살에 채찍을 맞는 느낌이다. 아파서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결국, 이날이 오는구나.’

강 실장의 눈앞에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매니저와 배우라는 공생의 관계. 서로에게 불만도 많았고 참 많이 싸웠는데. 이렇게 떠난다니 아쉽고 또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물론 5년 뒤에 다시 온다고는 하는데, 사람 일을 어떻게 알까. 또 그때 가서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상식적으로 봐도 이거 미친 짓인데··· 또 한편으론 이놈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그래, 그동안 너무 달려왔지.’

강 실장은 밀려든 감정 속에 박한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손길로 쓸어내리자, 박한영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다. 잠시 마주친 시선 뒤로 강 실장은 마이크를 잡고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계속 질문받겠습니다.”

다시 쏟아지는 질문들. 기자들을 둘러보던 강 실장의 눈에 손을 치켜들고 있는 이우정 기자가 보인다. 그녀의 눈이 원망에 가득 차 있다.

“거기 기자님.”

이우정 기자가 바로 일어난다. 그녀는 질문에 앞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호흡을 삼키려는지 목을 끌어올리고.

“세러데이 서울의 이우정 기자입니다. 우선······.”

**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하느라 박한영은 녹초가 돼 가고 있었다. 기자들은 지금이 아니면 그를 못 본다는 생각에 질문하고, 박한영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에 최선을 다해 답한다.

차 대표는 기자회견장의 이 모든 상황을 강당 내 방송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흠······.”

깍지 낀 다리, 무릎에 올린 손가락이 까닥까닥 움직인다. 한여름에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음에도 차 대표의 눈빛에선 차가운 냉기만 흐른다. 곁에서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정 이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 배우에게는 시나리오 온 거 언제 얘기하실 겁니까?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

그러자 차 대표는 모니터 화면에 고정된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렸다.

“정 이사 생각은 어때? 이시현이 말이야.”

“가능성이 큰 친구죠. 그쪽에서 그 정도 그림을 그렸다면 두말할 것도 없고요. 물론, 가능성만 두고 봤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마치 준비한 답을 되뇌듯 정 이사가 대답했다.

“대표님은 정말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정 이사의 회의적인 모습에 차 대표가 다시 한 번 시름을 삼킨다. 까딱까딱. 무릎 위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고 결정이 내려진다.

“페이 프로덕션에 연락해.”

그 말에 정 이사가 입술을 머뭇거린다.

“기회는 주지 못해도, 뺏어선 안 되지. 이제야 겨우 빛 보는 놈이잖아.”

얘기와 달리 차 대표는 즐거워 보였다. 정 이사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차 대표의 결정 방식은 항상 둘 중 하나다.

회사에 유리한 결정이거나, 자신이 흥미를 느낀 상황에 대한 결정이거나. 그리고 대게 후자 쪽은 이익과는 상관없이 호기심에 기반을 둔 도박 같은 결정들이 나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알겠습니다.”

정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 대표는 다시금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그렇게 보더니 나직이 속삭인다.

“박한영이 광고도 슬슬 돌리자고······.”

최근 박한영이 모델로 있는 광고주들을 만나온 차 대표였다.

지에스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있지만 광고주들이 박한영을 택한 것은 안정적인 모델을 원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뉴 페이스, 그리고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탑배우를 원한다.

그러니만큼 박한영을 대타로 세울 인물도 그에 맞는 인물로 준비해 광고주에게 건네줘야 한다. 안 그러면 위약금인데, 물론 박한영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

평소 행실도 좋았고,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광고주들을 직접 만나 설득했다. 오히려 광고주들로서는 위약금 운운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 그 부분은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문제다

“한영이 은퇴 사실 미리 알려준 곳이 어디어디였지?”

“5곳입니다. 삼현, LN, 해링턴, 그리고······.”

“그쪽에 이시현 프로필 돌렸지?”

“예.”

위약금 문제는 둘째 치고, 광고주들에게 줘야 할 것은 줘야 한다. 이 바닥에 지에스가 존재하는 한, 지에스 배우를 광고 모델로 쓰면 성공한다는 인식을 재차 심어줘야 한다.

“쓸모없어 보여 내버려둔 말이 사실은 명마였다? 훗.”

차 대표가 가벼운 웃음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이사가 뒤이어 일어나자 고개를 돌려 확인 차 묻는다.

“뮤직비디오는?”

“서두르라고 했으니까, 아마 월요일에는 편집본 나올 겁니다.”

“잘됐네. 애들 월말평가 때 보면 되겠네. 그날 하자고. 이시현이 오디션.”

“알겠습니다.”

**

길고 긴 기자회견이 끝나고, 강 실장과 박한영이 관계자들과 함께 강당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기자들은 오늘의 충격적인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를 전하느라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이야, 무슨 일이야 대체?”

한 여기자가 운을 떼자 여기저기서 지금 상황을 두고 말들이 나왔다. 모두들 황당하다는 얼굴이다. 물론 이우정 기자도 그 사이에 있었다.

‘이상하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녀의 머리에 몇 가지 추측이 이어진다. 박한영이 은퇴하고, 그 매니저인 강 실장은 송이경을 맡는다.

‘그저 관리하는 수준인지 알았는데, 아예 송이경을 맡는 건가 보지? 지에스에서 송이경을 미는 건가?’

그리고 자꾸만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한 사람.

‘어제 본 이시현이라는 배우··· 감이 오는데.’

잘생기고 예의 바른 남자라서가 아니다. 그에겐 여유가 있었고 편안함이 있었다. 마치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어요, 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랄까, 그 나이에 보기 힘든 관록이 있어 보인다고 할까.

그녀가 생각에 허우적대며 노트북을 챙기는데, 옆에서 또 누군가 얘기를 이었다.

“근데 그 소문 들었어?”

“뭐가?”

“지에스에서 얼마 전부터 박한영 광고주들을 만나고 다녔다고 하더라고.”

“그래?”

“근데, 걔들이 박한영을 대체 할 남자 배우가 있다는 얘길 했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솔직히 오늘 은퇴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닌가 했거든.”

“박한영을 대체한다고?”

“그렇다니까! 괜히 또 아니면 지에스에서 난리 칠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데스크에 올릴걸.”

특종을 놓쳐 억울해하는 기자의 모습에 이우정이 눈을 끔뻑인다.

‘대체할 남자 배우? 그럼 걔 말하는 건가?’

촉이 발동한다. 이우정 기자가 눈을 끔뻑이는데, 가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어?’

얼마 전 정치부로 옮긴 선배 기자였다.

“예, 선배.”

-뭐하니?

“오늘 박한영 은퇴 기자회견 있어서요.”

-그래? 나도 아침에 소식은 들었는데, 왜 은퇴한대?

선배도 궁금한 눈치다.

“뭐 연기 스트레스가 많았나 봐요. 별 얘기는 없더라고요.”

-하긴··· 그 일이 좀 그렇지.

“아, 선배 결혼식 다음 달 5일이죠?”

-응.

“제가 그날은 무슨 일 있어도, 결혼식 본방 사수 할 게요.”

-후후. 그래라.

“근데··· 뭐 하실 얘기 있으세요?”

-어, 다른 게 아니고 부탁 좀 하려고.

“부탁이요?”

-응, 배우 인터뷰 하나만 해줘.

“누군데요?”

-이시현이라고.

“이시현이요?”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이우정 기자.

-누군지 알아?

“아, 아니요.”

-너 최재환이라고 알지? 지에스······.

“예, 알죠.”

최재환이라면 잘 알고 있다. 선배와 잠시 사귀었던 매니저인데, 꽤 괜찮은 남자였다. 성격 좋고, 인성도 좋고, 얼굴은··· 뭐, 요즘엔 뭐하나 몰라.

-그 사람이 맡은 배우야. 곧 영화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영화요?”

이우정 기자의 머리가 복잡해진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기자들의 대화가 또 이어진다.

“야, 그 얘기 들었어?”

“뭐가?”

“가경 작가 영화 한대.”

“뭐? 가경이 누군데?”

“왜, 예전에 들새들. 난리였잖아?”

“들새들? 들새들이라··· 앗! 진짜? 너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다들 말을 꺼낸 기자에게 주목한다. 이우정 기자도 선배의 얘기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눈을 깜빡이고 그들의 얘기를 듣는데.

“근데, 그 가경 작가가 지에스 배우하고 영화를 한다는 거야. 난 그래서 박한영인줄 알았는데······.”

이우정 기자의 눈이 동그래진다.

“자, 그럼 우리 오랜만에 다 함께 밥이나 먹고 갈까?”

“그러자.”

다들 일어나려는데, 이우정 기자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한발 먼저 강당을 빠져나왔다. 유리문을 밀치고 뛰어나온 그녀가 코를 벌렁거리며 달린다.

“냄새가 나, 냄새가!”

톱스타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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