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52화 (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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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온도 (3)

“송이야, 잠깐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송이가 눈썹을 치켜든다. 나는 그대로 유 작가에게 다가갔다. 그녀들은 카운터에서 음료수를 뭘 고를지를 두고 수다 중이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어머, 여기 웬일이야?”

고개를 돌린 유 작가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뜬다. 진짜 놀란 표정이다.

“잠깐 들렸어요.”

나는 송이경 쪽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에서는 유 작가를 보지 못한 듯했고, 유 작가도 그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서로 안면이 없는 모양이다.

“우와, 이 비주얼··· 어쩐지 내가 여기 오고 싶더라니까.”

유 작가는 대본리딩 현장에서의 모습보다는 한층 가벼워 보였다. 그녀가 미소와 맑은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김은수 작가에게 소개했다.

“김 작가, 이 친구 처음 보지?”

“예.”

수줍은 미소를 끄덕이는 김 작가. 내 눈이 그녀를 담는다.

내가 이시현의 눈높이를 가지게 된 이후로 느낀 것이 하나 있는데, 여자들이 다들 아담해 보인다는 거다.

170센티미터 중반의 키를 가진 최재환, 180센티미터 후반의 키를 가진 이시현.

단지 키 차이만으로도 사람을 보는 감정과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점이다. 물론 이 몸이 아니면 절대 경험해 보지 못했을 일이고.

“안녕하세요, 배우 이시현입니다.”

“반가워요.”

나는 김은수 작가의 작은 손을 조심히 쥐고 악수를 나눴다. 그런 뒤 카운터 여직원을 돌아보며 유 작가에게 물었다.

“작가님 뭐 드시게요? 제가 살게요.”

“진짜?”

“예, 뇌물.”

“오케이. 그럼, 잔뜩 뜯어야겠다.”

카푸치노 두 잔을 주문했다. 그녀들이 합석을 제안해서 한송이가 자리를 옮겨왔다.

“안녕하세요, 이시현 배우 스타일리스트 한송이입니다.”

“어? 혹시, VVW 있지 않았어요? 촬영장에서 한번 본 것 같은데?”

“아, 예.”

고개를 갸웃한 유 작가의 질문에 한송이가 제 입술을 핥고 자리에 앉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얼마 전 최재환이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송이가 VVW에 있었고, 그쪽에서 계약 문제를 거론했었다는 얘기.

‘그러고 보니까, 현승아가 한번 보자고 했었지······.’

이제야 기억이 난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나와 최재환은 아직까지 그쪽에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걸려온 전화도 없다. 솔직히 내 타입도 아니었고.

“지금은 지에스에 계시나 봐요? 그때 그 일 때문인가?”

유 작가가 한송이에게 묻고, 한송이는 어색한 미소를 끄덕인다.

“아, 예, 어떻게 그렇게 됐네요.”

평소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수다쟁이가 되는 한송이인데, 오늘은 조금 이상하다. 유 작가도 더는 묻지 않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시현 씨, 지난번에는 미안하게 됐어.”

미안해야지. 덕분에 단막극도 내려왔으니까.

사실 이렇게 웃고는 있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통보였고 모욕이었다.

“미안하긴요. 그럴 수도 있죠.”

회사와 방송국 간의 문제도 있었고, 뭐 그 덕에 더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있다.

“후후, 이해해줘서 고마워.”

유 작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웃는다. 그러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몸을 낮춰 속닥속닥.

“자기··· 그거 자기지?”

“뭐가요?”

“젖소.”

“맞아요.”

나는 우리 테이블에만 들릴 정도로 유 작가처럼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그녀가 또 내 어깨를 두드린다.

“역시! 그거 재밌더라? 나 요즘 그거만 마셔.”

“그래요? 다행이다.”

자신이 모델로 있는 광고 제품이 잘 나간다면 배우로서는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다.

“근데, 가경 작가 영화 찍고 바로 드라마로 올 거지?”

유 작가는 가경 작가와 친분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나를 추천한 이도 그녀였고.

“작가님이 써주실 거죠?”

“하하하, 나 쉽게 보지 마.”

내 넉살에 유 작가도 넉살로 대응하고 크게 웃는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번뜩인다.

“근데, 영화 들어가는 거 시간 좀 걸릴 것 아니야? 그동안은 뭐해?”

“글쎄요, 아직 확실히 나온 게 없어서요.”

“왜?”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아직 가경 작가님 시나리오가 안 나왔다고 해서요.”

“뭐?”

유 작가가 눈을 크게 뜬다. 무슨 소리냐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난··· 각본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

“예? 무슨 얘기세요? 우리는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유 작가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 내가 잘못 들었나 보네··· 뭐, 그런가 보지.”

그녀가 씩 웃는다. 나를 흔드는 건지, 아니면 진짜 뭘 알고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저 기대가 커요. 작가님이 어떤 영화를 쓰셨을지.”

내 말에 유 작가가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나도 기대하고 있어. 과연 이시현이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하고.”

왠지 그 말이 매섭다. 연기력이 있어 보인다면 앞으로도 그녀가 나를 기억할 테고, 별로면 가차 없이 버리겠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김 작가, 이 친구 미리미리 알아둬. 곧 연락하기 힘들 정도로 바빠질걸?”

유 작가가 조용히 있는 김은수 작가에게 자신의 예지력을 십분 발휘했다.

“그래요?”

김은수 작가가 배시시 미소 짓는다. 수수한 그 모습이 참 그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 몇 번 자리했을 때도, 그녀는 잘나가는 작가임에도 겸손하고 수줍음이 맞은 여자였다. 반면 오디션 현장에서는 180도 변하는데, 그게 가식적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일에 있어서는 프로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 말씀들 마시고요, 저 나중에 꼭 써주세요. 열심히 할게요.”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도 써주지 않으면 그저 병풍이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뿐이다.

“아니다, 아예, 김 작가 이번 거 이시현 할 만한 배역 없을까?”

뜬금없는 유 작가의 중계에 나는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김 작가가 뻑뻑한 제 입술에 카푸치노 거품을 묻히고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거야 이미 캐스팅 끝났죠. 당장 다음 주부터 촬영인데.”

곤란해 하는 김 작가. 나는 틈을 봐서 물었다.

“무슨 드라마예요?”

“이산가족 상봉 기념, 8.15특집드라마. 2시간짜리요.”

김 작가는 속삭이듯 답했고, 얘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아······.”

“왜 그래?”

“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커피를 손에 쥐며 떠오른 기억을 잠시 되새긴다.

‘이산가족 상봉 기념, 8.15특집드라마.’

2시간짜리 특집드라마는 정부의 기획으로 제작됐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당시에는 몬스터 프로젝트 때문에 일본에 있었는데, 일본도 8.15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 꽤 많은 관심을 보였었다. 뉴스와 신문에 그에 관한 온갖 기사가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특집드라마’에 대해서 논란이 있던 게 기억난다.

내용 자체가 대한민국의 과거사에 관한 내용이고, 일본의 아역 출신 여배우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여배우는 일본이 저지른 과오에 사죄의 마음으로 출연 결심을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리고··· 엉망이었지.’

여배우의 문제가 아니라 주연인 남자 배우의 문제였다. 가수 출신의 주연배우. 희대의 발연기로 드라마의 기획의도까지 무참히 어지럽힌 그 남자.

‘뭐,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당장 다음 달 15일 방송인데, 이제 촬영 시작이라면 촉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미 캐스팅도 끝났을 테고.

아무래도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될 가능성이 낮았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성사되니 부랴부랴 준비에 들어간 것 같다.

‘하여간 정부가 하는 게 그렇지.’

나도 몇 번 데어 본 적이 있는데, 이 바닥에 있으면 의외로 그쪽과 자주 닿는 편이다. 후··· 잊고 싶은 기억들. 생각을 뒤로하고 유 작가를 바라봤다.

“작가님.”

“왜?”

“바닷사람들 이야기 정말 잘 봤어요.”

“봤어?”

턱을 괴고 있던 그녀가 눈을 깜빡인다.

“그럼요.”

수십 번을 봤고, 이번에도 또 봤다.

내 역할은 신인 배우가 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박태식이라는 인물을 충분히 소화했으며, 자신의 배역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유 작가와 나는 바닷사람들 이야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다. 나로서는 수없이 본 단막극에 대한 얘기였지만 그녀에게는 아쉬움이 남은 작품이자 제 자식이었다.

언젠가 그녀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피를 짜내는 아픔을 동반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작품을 사모하고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마치 사랑의 노래 세레나데를 부르듯이 말이다.

“고맙다. 시현 씨.”

“뭐가요?”

“그냥 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작가님도 참.”

마침 송이경의 인터뷰가 끝난 듯했다. 드르륵 의자 소리가 이어졌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그녀를 보니 나도 슬슬 일어나야 할 듯 보인다.

“그럼, 작가님들 편히 있다가 가세요. 나중에 또 뵐게요.”

“그래.”

유 작가가 손을 흔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강 실장을 보니, 그가 나를 향해 나가 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다가 유 작가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아무튼 우리는 밖으로 나왔고, 나는 쪼르르 앞서가는 한송이의 티를 붙잡았다.

“너, 유 작가님이 얘기한 거 ‘그때 그 일’이 뭐야?”

아까 흘려들은 걸 묻자 그녀는 티 늘어난다고 투덜투덜. 그리고 하늘을 보고 딴청을 피운다.

“와, 하늘 맑다.”

“어쭈?”

내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자.

“하지 말아요. 경고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한송이. 지금 날 겁주려는 거냐?

“싫은데?”

“아 진짜.”

“뭐야? 너 작가님한테 찍힌 일 있었어?”

다시 묻자, 한송이가 입술을 요리조리 움직이고는 체념한 듯 얘기를 꺼냈다.

“VVW에 있을 때, 변태 새끼 한 놈 있었거든요.”

“그래서?”

“촬영장에서 귀싸대기를 날렸죠.”

“니가?”

“왜요? 못 믿겠어요?”

한송이가 손바닥을 쓱 내민다. 그렇다면야, 믿어줘야지.

“송이야, 너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필요한 거라든가.”

“아니요.”

“말해. 사줄게.”

“진짜요?”

눈을 게슴츠레 뜨는 한송이.

“응, 만 원짜리로.”

“하··· 나 경고했어요, 자꾸 놀리면 알아서 해.”

“어쭈?”

웃고 다투는 사이에 강 실장이 나왔다. 송이경과 함께였다. 그녀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해서, 나는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뒤로 나온 기자가 나를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나는 저 기자를 잘 알고 있다.

‘뭐 하고 있어? 나한테 와야지, 이우정 기자.’

세러데이 서울 이우정 부장님, 냄새를 맡았으면 와야 할 거 아니야? 당신이 그토록 잘 맡는, 톱스타 냄새!

**

강 실장은 카페 앞 담벼락을 향해 탐탁지 않은 시선을 가져갔다. 이시현과 이우정 기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덕분에 곁에 있는 송이경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 듯 보이자 송이경이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실장님, 전 이만 가볼게요.”

“차, 주차장에 있죠?”

“예.”

강 실장은 주차장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하얀색 승용차에 그녀가 올라탄다.

“실장님, 저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차창을 연 송이경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소를 보인다. 혀끝을 살짝 깨물고 배시시 웃는 그녀의 모습에 강 실장은 달뜬 얼굴을 끄덕였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헤.”

좀 전에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유 작가를 소개해준 탓일까. 송이경의 표정이 무척 밝다. 인터뷰에, 드라마 작가와의 인연까지. 오늘은 그녀에게 나쁘지 않은 하루일 것이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예. 실장님도 운전 조심하시고요.”

송이경의 차가 멀어진다. 강 실장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차가 외제차로 바뀌는 날이 머지않았지.’

최재환이만 홈런 치라는 법 있나. 이 바닥 구른 시간은 똑같다. 누구라고 허송세월 보내진 않았다.

‘나도 한번 보여줄게!’

다짐 속에 다시 카페 앞에 왔을 때는 이시현이 카메라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포즈랄 것도 없이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카메라맨은 연신 같은 말을 외치고 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좋긴 뭐가 좋아, 그냥 서 있기만 할 뿐인데.

그런데 팔짱을 켠 채로 지켜보던 강 실장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여자들이 이시현을 구경하고 있는데, 가만 들어보니··· 일본어?

‘갓코이이?’

그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이시현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덕분에 강 실장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해진다. 그녀들과 이시현을 번갈아 쳐다보느라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확실히··· 많이 달라졌어. 전에는 자신감이라고는 개뿔도 없어 보였는데, 요즘에는 저 얼굴에 여유가 넘쳐흐른단 말이야.’

최재환이야 말할 것도 없고.

[와, 진짜 멋있다]

[그러게. 연예인인가 봐? 아니야, 연예인이 맞을 거야]

[아하··· 한국 여자들은 좋겠다]

그녀들의 계속되는 속삭임으로 강 실장이 혼란에 빠진 틈에, 이우정 기자가 이시현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러더니 강 실장에게 눈인사를 한다.

“매니저님, 그럼 수고하세요.”

“아, 또 봬요. 기자님.”

강 실장이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자 빙긋 웃으며 멀어지는 이우정 기자. 그녀를 뒤로하고 이시현이 다가온다. 여자들의 수군거림이 한층 커졌다.

[어머? 눈 마주쳤어]

[난, 난 숨을 못 쉬겠어]

소란스러운 여자들의 모습에 강 실장은 눈을 찌푸렸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그냥 외면하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이시현의 목소리. 근데···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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