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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상황 (1)
“뭐하는 거예요?”
나는 스태프에게 지금의 상황을 물었다. 잠시 차에 가 있었는데, 촬영 장비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리에 다시금 돌아온 참이다. 그런데 권혜선이, 최재환을 살포시 안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지금 시현 씨 매니저님이 혜선 씨하고 리허설 한번 맞춰보는 거예요. 마지막 씬이요.”
“그래요?”
촬영 현장에서의 리허설은 중요하다. 자칫 늘어지고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수를 줄이고 완성도를 높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리허설이다.
아무래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서 최재환이 수고 좀 한 듯했다. 이따가 어깨 좀 주물러 줘야겠네.
“좋습니다, 시현 씨도 왔으니 바로 들어가죠!”
감독이 박수를 두 번 친다. 그러자 권혜선이 최재환에게서 떨어졌다. 살짝 미소를 보이고, 물러난다.
곧바로 3W 스타일리스트가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제야 우두커니 서 있던 최재환이 뒤돌아 나를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온다. 근데, 왜 저렇게 흐물흐물할까. 아무래도 많이 피곤한 모습이다.
“형이 배우 해도 되겠더라.”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가 목을 끌어올린다. 얼굴도 빨갛고. 진짜 피곤한가 보네.
“형? 괜찮아?”
“어? 어, 괜찮지!”
“훗, 뭘 그렇게 놀래? 혹시 감기 걸린 거 아니야?”
나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자주 걸리는 타입이니까.
“형, 아직 밥도 안 먹었지? 이제 마지막 씬이니까, 그사이 가서 밥 좀 먹어. 밥 차 아직 있더라.”
“아니야. 끝까지 봐야지.”
“됐거든?”
나는 최재환의 등을 밀었다. 그제야 최재환이 엉거주춤 밖으로 나간다. 그러다가 스태프들과 부딪치고, 카메라와 부딪치고, 소품 가방과 부딪치고.
“왜 저러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감독이 내게 손을 흔든다.
“시현 씨!”
자, 이제 마지막 씬이다.
**
‘야이 미친놈아!’
최재환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람. 권혜선이 품에 안긴 순간 심장이 고장 나 버렸다. 두근두근. 또 두근두근··· 단 한 번도 그 녀석을 여자로 본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아니지, 아니야. 시현이 말대로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긴 심호흡 끝에 최재환은 밥 차로 향했다. 식판을 챙겨 밥을 담고, 반찬을 담고, 국을 챙기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눈에 힘을 팍 주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마침 구석에서 홀로 밥을 먹고 있는 윤 부장이 보였다. 예전에는 강 실장을 꼭 데리고 다니더니, 요즘은 혼자 있는 모습이 부쩍 잦다.
“부장님.”
곁에 다가간 최재환이 자리에 앉자 윤 부장이 뜻밖에도 반갑게 맞이한다.
“앉아, 앉아.”
최재환이 자리에 앉으니, 어디서 챙겨온 건지 김을 하나 건네는 윤 부장.
“많이 먹어. 너 요즘 너무 무리하더라.”
“무리하긴요. 열심히 할 때죠.”
“하긴, 이시현이 재계약 가지고 말들 많았는데··· 너 하는 거 보면서 쏙 들어가더라. 당분간만 죽었다 생각하고 애들 좀 도와줘.”
“예.”
최재환이 정신없이 뛰는 이유는 그런 부분도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표면적인 것만 보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회사가 이시현을 대우해주는 것 같고, 거기다가 최재환도 관리직함을 달자 샘을 내는 말들이 기어 나왔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나오는 말을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그럴 때 해결할 방법은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근데 부장님.”
최재환이 수저를 들다 말고 윤 부장을 쳐다봤다.
“왜?”
“오소리 가지 않았어요?”
“어, 신입 보냈어. 걔는 뭐 집에 일 있다고 해서, 오소리 데려다주고 퇴근하라고 그랬어. 에이, 마음에 안 들어··· 덧니 보이면서 실실 웃는 거 보면······.”
윤 부장이 어쩔 수 없이 신입에게 양보했다는 얼굴이다. 그러더니 눈동자를 치켜뜨고 묻는다.
“근데 너 얘기 들었냐?”
“에? 뭐요?”
입안에서 밥을 웅얼거리던 최재환이 서둘러 삼키고 윤 부장을 쳐다본다. 그러자 윤 부장이 젓가락을 들어 식판에 남은 반찬을 입에 넣었다. 캔 맥주도 하나 치익 따고.
“일본, 상황이 많이 안 좋다더라.”
“재인이요?”
최재환은 몬스터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라도 함께 일본에 머물었던 만큼, 아무래도 그녀에 대한 관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 넌 못 들었을 거야. 요즘 밖에만 뛰어다녔으니까.”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예 수저를 내려놓고 묻는다.
“애가 좀 이상하다네?”
“이상해요?”
“연습도 개을러지고, 학교도 자주 빠지고······. 향수병인가.”
“흠··· 그럴 수 있죠.”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 나이니까.
“그래서요?”
빠르게 되묻고, 입안에 밥을 한 움큼 욱여넣는 최재환.
윤 부장이 맥주를 꿀꺽꿀꺽 삼키더니 좀 전에 줬던 김을 한 장 집어 먹는다. 꼬질꼬질한 손으로. 그러더니 혀끝으로 손가락에 묻은 소금을 할짝거리고, 다시금 손을 뻗어서, 부스럭.
“그래서는 뭐. 대표님은 걔를 다시 한국에 부르자니, 시간도 돈도 배로 들 것 같아서 일단은 결정을 보류 중이고, 대신 박 상무가 일본 왔다 갔다 하고 있잖아.”
“아, 그래서 요즘 그렇게 일본을 오가는구나.”
“뭐 그렇지.”
다시 손을 뻗은 윤 부장. 부스럭. 쩝쩝.
“아무튼 말이야. 알고 있으라고.”
“아, 예.”
최재환은 윤 부장이 웬일로 이런 정보를 알려주나 생각하면서도, 김을 보면서 저건 절대 손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 1팀장한테, 그냥 한번 숙여줘라.”
그 말에 최재환이 이마를 접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지 않아도, 분위기 안 좋아서 좀 털려고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안 생기네요.”
이제 와서는 타이밍도 지났고.
“뭐 있겠냐? 그냥 커피나 한잔 마셔. 요즘 사무실 들어가면 내가 부장인지, 아니면 두 팀장 놈 눈치 봐야 하는 신입인지 헷갈릴 정도다.”
“예. 알겠어요.”
최재환은 소시지를 입에 물고 남은 밥을 단숨에 삼켰다.
“맥주 마실래?”
“운전해야죠. 시현이도 집에 데려다줘야 하고.”
“그렇지.”
실없는 양반 같으니라고. 문득 최재환의 시선에 윤 부장이 손에 쥔 캔 맥주가 들어온다.
‘설마.’
최재환이 윤 부장의 모습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윤 부장이 다시 입을 연다.
“너 만약에, 회사 쪼개지면 여기 계속 있을 거냐?”
“예?”
식판을 든 채로, 최재환이 윤 부장을 내려다본다.
“너만 알고 있어.”
“뭘요?”
“회사 쪼개질 것 같다. 2팀이 정말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요즘 위에서 계속 그 얘기 나와.”
그 말인즉슨 배우들로만 구성된 회사를 새로 설립하거나, 계열사에 편입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래전에도 한 번 나온 얘기였기에 최재환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정말요?”
최재환이 잠시 멍하니 윤 부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SN 애들이랑 친하잖아?”
“뭐 아무래도 자주 보니까, 서로 나쁠 일은 없죠.”
“그래, 아무튼 너 살길 알아서 찾으라고.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서··· 쓰읍, 쓸데없는 얘기 했네. 너 입 무거운 거 아니까 하는 얘기야.”
맥주를 다시금 목 넘기는 그를 뒤로하고, 최재환은 이시현에게 돌아갔다. 가는 길에 생각이 이어진다.
‘하긴, 부장님이 요즘 위태위태하지.’
매니지먼트 사업부를 어우르며 조율을 해야 할 윤 부장이 2팀에 편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동안, 어느새 1팀과 사이가 많이 소원해진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통제도 안 되고, 두 팀장이 매번 다투니 오히려 1, 2팀 매니저들이 최재환을 더 신임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밖으로 나오면 관리직들도 재조정되려나······.’
아니, 진짜 밖으로 나가기는 하는 건가.
과거 회사가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최재환은 그 과정을 생생히 봤기 때문에 윤 부장의 얘기를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당시 회사를 옮긴 매니저들도 상당수였고.
‘하긴, 배우들도 불만이 좀 차 있는 상황이지.’
박한영의 재계약 과정에서도 다수의 배우가 박한영을 지지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나마 회사와 박한영이 적당하게 포장하고 아름다운 이별로 봉합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오소리도 재계약을 안 했겠지.’
그녀는 얼마 전에 재계약을 했다.
‘흠······.’
시름이 깊어진다. 지금 시기는 그냥 이시현만 생각하고픈 최재환인데, 꼭 이렇게 좋을 시기에 쓸데없는 일들이 생겨 신경을 쓰게 만든다. 마치 나태하게 살지 말라고 하늘이 채찍질이라도 하듯 말이다.
‘후······.’
시름에 이어 한숨을 내쉰 최재환. 그때 이시현과 한송이가 카페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가 이 밤에 쩌렁쩌렁 울린다.
“촬영 끝났어?”
“예.”
최재환이 한송이의 가방을 손에 쥔다.
“송이 너도 데려다줄 테니까, 오늘은 택시 타지마.”
“아 진짜요?”
한송이가 맑게 미소 짓는다. 이시현과 한송이의 집이 거리가 있어서 스케줄이 늦게 끝나면 그녀는 택시를 타곤 했다. 물론 회사에서 경비처리를 해주지만 여자 혼자 다니기는 불편했을 것이다.
“앗싸!”
한송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주먹을 불끈 쥔다. 그 모습에 최재환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꾹 눌렀다.
“으이구!!”
일은 엉망이고, 건들건들 한데,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카페에서 나오는 연출 감독에게 최재환이 허리를 숙인다. 그러자 베레모를 고쳐 쓴 감독이 그를 향해 엄지를 척 내밀었다.
“매니저님, 내가 장담한다. 이번 뮤직비디오 대박 날 겁니다.”
“하하, 그렇게만 됐으면 좋겠네요.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또 봅시다.”
“예!”
멀어지는 감독의 모습. 최재환이 한송이와 이시현을 돌아본다.
“가자! 슬슬 비도 올 것 같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이시현 일행.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권혜선과 3W 스타일리스트 강보라였다.
“언니, 송이 씨 일 잘해요?”
껑충껑충 뛰어가는 한송이의 뒷모습을 보며, 권혜선이 물었다. 그러자 강보라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못해. 듣기로는 이력서 적힌 거 죄다 구라라고 말들 많아. 최 실장님이 저렇게 구박하는 것 같아도, 사람이 여려서 자르질 못해··· 근데 또 이시현은 다른 것 같고.”
“뭐가?”
“아까 살짝 물어봤거든. 나중에 바빠지면 어떻게 하냐고.”
“그랬는데?”
“그전까지 한송이 실력이 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 근데 그 눈빛이, 장난 아니었어.”
“그래?”
“그게 맞는 거지. 실력이 없는 걸 어떻게 끌고 다녀.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시현이 한송이보다 눈썰미가 좋을걸?”
“그 정도야?”
“응, 이시현 눈 보통 아니야. 은근히 스타일링 좋아. 약간 대표님 같은 타입이랄까? 아까 솜솜 애들 봤잖아? 이시현 볼 때마다 꺄꺄더만. 걔들이 연예인 한두 번 보는 애들이야? 뭐, 그만큼 외모가 받쳐 주기도 하지만.”
강보라는 이시현을 생각하며 두서없이 얘길 꺼냈다. 오늘 하루, 한송이보다는 솜솜 직원들과 그녀가 더 많이 그에게 붙었다.
아무래도 한송이가 실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고, 처음에 촬영 장소에 오자마자 최재환이 다가오더니 부탁을 해왔다. 오늘 좀 많이 도와달라고. 어쨌든 그동안 최재환에게 받은 도움이 많으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근데, 너 마지막 씬 대사, 네가 생각한 거야? 괜찮더라.”
[그러니까 너도 날 여자로 봐줘, 지금부터]
그 대사는 원래 없던 대사였다. 강보라는 권혜선을 도와 대사를 몇 번 맞춰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아까 NG가 날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괜찮았어?”
권혜선이 수줍은 미소를 보인다. 그러더니 다시 묻는다.
“언니, 나 오늘 어땠어? 큰일이지? 대표님이 호출하는 거 아니야?”
오늘 누구보다 많은 실수를 한 그녀였다. 이런 질문이 스스로도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묻게 된다.
“됐어, 잘했어. 최 실장님도 그러더라.”
“뭐라고?”
기대감이 어린 시선.
“역시 내 배우야, 라고. 지나가면서 그렇게 혼잣말하던데?”
“진짜?”
초롱초롱 빛나는 권혜선의 눈.
저 눈을 보고 거짓이라고 어떻게 말해. 물론 진짜지만.
“진. 짜. 라. 고! 근데, 윤 부장님 왜 안 와?”
“저기 오네.”
마침 저 멀리서 윤 부장이 온다. 차 키를 흔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