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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뮤직비디오 같은 하루 (3)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최재환은 현장을 지켜보는 동안 처음에는 불안을, 그다음은 안도의 숨을, 그런 다음에는 확신을 가졌다.
‘됐다. 이제 됐다.’
더는 이시현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
이 바닥이 내일을 장담할 수 없을진 몰라도, 머잖아 이시현의 시대가 올 게 분명하다는 생각.
이는 최재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현장의 다수가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있었고, 이시현을 보면서 수군거렸다. 쉼 없이 눈에 담고, 바라본다. 오소리를 따라온 윤 부장도 그중 하나였다.
‘이시현 저놈··· 여태 뭐했던 거야?’
윤 부장의 시선이 구름떼처럼 모여든 인파에 머문다.
여태 이시현이라는 놈은 카메라 앞에서는 대사를 잊어버리고, 말을 더듬는 한심한 놈이었는데. 그 외모에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감만 줄기차게 안겨주던 배우였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아니, 완전히 다른 놈 아닌가?
“와, 시현 씨 진짜 멋있네요.”
오소리를 지원 나온 솜솜의 스태프들이 촬영을 지켜보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한다. 오늘 그녀들은 오소리뿐 아니라 권혜선, 이시현도 케어해주고 있는데, 서로 먼저 이시현에게 다가가려고 난리였다.
‘에이.’
윤 부장이 괜스레 입안의 텁텁함을 달래려 혀를 굴리는 사이 감독이 컷을 외친다.
“오케이,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카메라가 멈추자 또 한바탕 난리다. 여대생들이 이시현에게 몰리는 바람에 흙먼지가 일어 스태프들 눈을 찌른다.
이시현이 비록 톱스타는 아닐지라도 지금 상황과 장소에서는 충분히 그녀들이 웅성거릴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카메라만 멈추면 자연스럽게 이시현에게 붙고 있었다.
“이름이?”
그걸 또 일일이 사인을 해주는 이시현. 덕분에 그의 스타일리스트 한송이가 땀 닦아주랴, 옆에서 부채질해주랴, 얼굴이 벌게졌다.
“저희도 사인해주세요!!”
또다시 여대생 둘이 쪼르르 다가온다. 그녀들이 건넨 펜과 노트를 잡으면서 이시현이 한송이를 돌아봤다.
“송이야 미안.”
“아녜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송이는 씩씩거리며 부채질이다. 부채가 일으킨 바람이 이시현을 지나 여대생의 머리카락까지 흩날릴 정도로 파워스윙이다.
“여기요.”
“아, 저기 사진도······.”
펜과 노트를 돌려받은 여대생들이 사진 한 장을 찍자고 제안한다. 기대에 찬 시선이 이시현을 보는 이때, 두툼한 손이 불쑥 들어왔다. 매니저 최재환이다.
“미안합니다. 이동해야 해요.”
**
무리를 지어 촬영장소를 이동하는 길. 앞서가는 최재환을 이시현이 따라잡았다. 그러더니 냉큼 어깨동무를 한다.
“형, 민 팀장님이 뭐래?”
“별 얘기 없었어. 통화도 길게 못 했고. 아, 좀 떨어져 임마! 더워 죽겠다.”
최재환이 으름장을 놓고 걸음을 서두르자 이시현이 땀으로 얼룩진 그의 등에 부채질을 하며 쫓아간다.
‘어휴, 지겹지도 않나.’
익숙해진 둘의 모습에 한송이는 고개를 휘휘 젓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는 여대생들뿐 아니라 명동에 놀러 온 사람들도 호기심으로 구경 온 듯했다. 그 중에도 권혜선을 보러 온 이들이 많았다.
“언니 여기 좀 봐요!”
“권혜선 예쁘다!!”
“저 3W 앨범 샀어요!”
권혜선이 하늘색 남방셔츠를 펄럭이면서 여기저기 손을 흔든다. 팬들 신경 쓰랴, 다음 씬 신경 쓰랴, 그녀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송이야!”
걸음을 재촉하던 최재환이 갑자기 뒤를 돌아본다.
“아, 예!”
“자꾸 그렇게 한눈팔래?”
“죄송합니다.”
헐레벌떡 달려간 그녀가 최재환의 곁에 붙었다. 그러더니 눈치를 살피며 사람들을 가리켰다.
“벌써부터 이런데, 나중에는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오늘은 장소가 장소니까 이러지, 밖에 나가면 그냥 동네 주민이야.”
“그렇지, 그럼.”
최재환이 냉정하게 상황을 얘기하고, 이시현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둘의 모습에 옆에서 따라오던 오소리가 윤 부장을 힐끗 쳐다봤다.
“저 둘, 가만 보면 죽이 잘 맞아요. 그죠?”
“맞기는 무슨, 동네 영감들도 아니고 중얼중얼.”
윤 부장의 찌푸림을 본 오소리의 표정이 굳는다. 그저 말이나 한번 붙여볼 요량으로 얘기를 건넨 건데. 어쩜 저렇게 다른지.
“그래요? 나는 저런 사이좋더라. 부장님하고 나는 나이 차가 있으니까.”
그 말에 윤 부장이 토라진 얼굴로 그녀를 앞서간다.
**
해가 기운다. 바닥의 그림자가 늘어지자 현장 작업 속도가 빨라진다. 그나마 인파가 줄고 있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낮 씬을 오늘 못 끝내면 추가적인 스케줄과 이에 따른 경비가 발생한다.
그나마 오소리가 모든 컷에서 NG 한번 없었고, 의외로 이시현도 NG 한번 없었다.
문제는 권혜선인데, 실수가 잦다. 그 때문에 감독은 한 번에 갈 것을 몇 번에 나누기도 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테이크 하나 남았습니다.”
감독이 지친 숨을 몰아쉬고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는 완연한 주황빛. 다행히 대학교 교정을 배경으로 한 씬이 남았고, 그 뒤 저녁에는 외부 섭외장소에서 촬영이 이어진다.
교정에서의 남은 한 씬을 위해 스태프들이 위치를 잡는 동안 감독은 저녁에 이어질 촬영을 조감독과 상의한다.
그 사이 오소리와 이시현은 단둘이 이어질 씬을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은 시원해진 바람이 불고, 오소리가 고개를 들자 그녀의 눈에 이시현의 얼굴이 비치는데.
“힘들죠?”
그녀가 묻는다. 이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이야말로 안 힘들어요?”
“나는 뭐, 오히려 현장이 편해요.”
그녀가 생긋 웃는다. 피곤할 법도 할 텐데 흐트러진 모습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시현은 오늘 그녀에게서 많은 걸 배우고 있었다.
“바닷사람들 이야기, 시현 씨도 같이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지난 일이잖아요.”
이시현이 그래도 아쉬웠다는 듯 눈썹을 살짝 좁히자 오소리가 붉은 입술에 미소를 새긴다. 서로가 눈을 마주 보고 서는 건 여전히 어색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둘은 연인이었고, 풋풋한 사랑을 연기했다.
“방송 봤어요?”
그녀가 물었다.
“바닷사람들 이야기요? 당연하죠.”
“어땠어요?”
“선배님이야 뭐 두말할 거 없죠. 완벽한 ‘이지현’이었죠.”
“에이, 빈말은.”
“에? 진짜인데. 나 정말 감동했는데.”
“후훗.”
오소리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웃는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데, 이시현이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 선배님.”
“예?”
그녀의 눈이 다시 마주하자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잠깐, 손 좀 대도 되죠?”
오소리가 눈썹을 들어 올리는 것보다 이시현의 손이 한발 빠르게 그녀의 이마에 올라갔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 꽃잎 하나가 그녀의 앞머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여기요.”
이시현이 꽃잎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바람에 실려 보낸다. 마침 감독이 다가왔다.
“자, 조금만 더 고생들 해요.”
**
카페 안의 시계가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시현아.”
“어, 고마워.”
최재환이 감독과 이시현에게 시원한 커피를 건네고 물러났다. 녀석이 많이 지친 얼굴이다. 아무래도 하루 만에 소화하는 일정이니 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치기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
특히 좀 전에 이시현과 헤어지는 씬을 찍은 오소리도 많이 피곤해 보였다. 구석진 곳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최재환이 커피 하나를 들고 곁으로 다가갔다.
“소리 씨가 고생이 많네요.”
“아, 고마워요.”
그녀가 살짝 일어나 커피를 받았다.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기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오늘 밥 차, 소리 씨가 사비로 부른 거라면서요?”
저녁 촬영에 앞서 스태프들 식사를 위해 밥 차가 왔었다. 오소리가 직접 준비했다고 한다.
“뭘요.”
그녀가 지친 미소를 보인다. 커피 한 모금을 삼키는 그녀와 얘기 좀 나누려고 최재환이 잠시 옆의 의자에 앉았다. 물론 자신의 배우를 눈에서 놓지 않는다. 이시현은 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드라마 들어간다면서요?”
최재환이 다리를 꼬고 앉아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오소리의 옆모습을 눈에 담는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가는 턱선과 입술, 코가 보인다.
“곽인경 작가님 신작인데, 사전제작으로 들어간대요.”
“사전제작? 그게 가능한가?”
“처음이라니까, 뭐 해 봐야죠.”
오소리가 고개를 돌려 잠시 미소를 보인다. 최재환이 다시 묻는다.
“무슨 내용인데요?”
“배경은 조선시대고, 저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노비 같은 역이에요. 부모님이 역모에 휘말려서··· 뭐 그런 거죠. 거기다 로맨스 섞였고. 대본이 무척 좋아요.”
그녀가 신이 난 듯 얘기한다. 최재환도 그녀의 얘기를 집중해 들었다. 아역 출신이라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는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늘 불안했는데, 이번 기회에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소리 씨는 잘 될 거예요.”
“말이라도 고맙네요.”
이번에는 오소리가 최재환의 옆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는 한송이와 함께 있는 이시현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마치 동생을 보는 형의 모습이다. 그래서 오소리는 저도 모르게 속삭였다.
“이시현 씨도 잘 될 거예요.”
“예. 시현이는 잘 될 거예요. 빛이 나거든요. 소리 씨처럼.”
다시 그녀를 마주 본 최재환의 얼굴이 너무도 푸근해 보인다.
“두 사람 정말 보기 좋아요.”
“우리요?”
“예.”
“후후··· 사내놈들이 보기 좋아서 뭐합니까.”
최재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깃을 털고, 그녀를 다시 내려다보고 말한다.
“촬영 끝났으니까, 이제 들어가 쉬세요.”
“예, 그래야죠. 하··· 집에 가면 청소나 좀 해야겠다.”
“그런 거 직접 하세요?”
최재환의 의외라는 듯 묻는다.
“그럼 전 청소도 안 하고 살아요?”
“하하, 그게 아니라······.”
“저도 그냥 집에선 평범해요. 라면도 먹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친구들은 안 만나요?”
그 말을 뱉은 최재환이 순간 입술을 머뭇거렸다. 오소리의 얼굴에 그림자가 서렸기 때문이다.
“친구라··· 별로 없어요. 학교는 거의 매일 빠졌었고, 그렇다고 촬영장 가봐야 나하고 비슷한 나잇대의 배우도 없었고, 지금은 또 너무들 서먹서먹해서··· 이제 혜선 씨하고 시현 씨 둘이 붙는 씬 남았네요?”
그녀가 그림자를 밀어내고 최재환을 바라본다.
“예, 이제 끝이네요. 아휴, 회사도 너무하지. 이렇게 촉박하게 말이야.”
“보이스레이드도 오래 기다렸잖아요.”
“그렇긴 하죠.”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오소리를 보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소리 씨.”
“또 뭐가요?”
“소리 씨가 일부러 현장 지켜주고 있는 거 알아요. 감독님이 소리 씨 씬 한 번에 가준다고 했는데, 굳이 섞어달라고 했다면서요?”
오늘 촬영에서 오소리가 중심을 계속 잡아줬다. 권혜선에게 조언도 서슴지 않았고, 이시현과 함께 권혜선의 씬을 대신 연기해서 미리 가이드를 잡아주기도 했다.
“어휴, 혜선 씨는 좋겠다.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많네요.”
“예?”
최재환이 무슨 얘기인가 싶어 보자 그녀가 멀리 있는 이시현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가이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시현 씨가 부탁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시현 씨, 진짜 잘 될 거예요.”
오소리의 달콤한 예언을 귀담고 이시현을 보는데, 마침 그가 등을 돌려 최재환을 쳐다봤다.
“형, 나 차에서 좀 쉴게.”
“어, 그래라.”
지금 촬영 장비에 문제가 생겨서 딜레이가 되고 있다.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시현 홀로 카페를 나간다. 오소리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갈게요. 끝까지 있고 싶은데, 너무 늦은 시간에 청소하면 안 되니까.”
“예, 수고하셨어요.”
오소리가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서 현장을 떠난다. 그녀를 따라다녀야 할 윤 부장은 아마 주차장의 차 속에서 곯아떨어져 있을 것이다. 왠지 오늘따라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 최재환이었다.
‘훗··· 누가 누굴 걱정해.’
커피를 다 마실 때쯤에 감독이 최재환에게 다가왔다.
“시현 씨 어디 있어요?”
“지금 차에··· 불러올까요?”
“흠, 그럴 것까지는 없고요, 그럼 매니저님이 잠깐 혜선 씨하고 동선 좀 맞춰줘요. 그거 맞추고 나서, 마지막 테이크 가게요.”
“저요?”
최재환이 얼떨떨해했지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잠시 이시현의 대타로 서는 거니까.
촬영감독의 지시대로 일단은 자리에 섰다. 그러자 권혜선이 지친 얼굴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인다.
“힘들지?”
최재환이 묻고, 권혜선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답할 힘도 없는 모습이다.
‘어이구, 너도 참······.’
왜 그렇게 연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 최재환은 권혜선이 좀 더 나중에 연기하길 바랐었다. 좀 더 완숙해지고, 준비됐을 때.
“너 오늘 잘하더라.”
그래도 내 새끼 아닌가.
최재환이 손을 뻗어 권혜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준다. 그녀가 강아지처럼 그를 바라본다.
“잘하긴요. 민폐지.”
“원래 처음은 다 그래. 이번에 한 번 해봤으니까,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
“예.”
배시시 웃는 권혜선.
“근데, 너 그러다 진짜 우리 2팀에서 맡는 거 아니야?”
최재환이 피식 웃고 말하자 그녀가 아랫입술을 핥고 속삭인다.
“그럼, 그때는 오빠가 맡아줘요.”
“후훗, 그래라. 레니하고 슬기가 가만히 있겠냐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 최재환. 그때 감독이 말한다.
“혜선 씨, 대사 한번 해보실래요? 해보고 찍는 게 날 것 같은데?”
오늘 몇 차례나 실수한 권혜선이다. 감독이 다시 말했다.
“매니저님은 그냥 서 있기만 해요. 어차피 카메라 안도니까, 쪽팔려 하지 마시고.”
“예.”
권혜선이 심호흡을 하고 최재환을 바라본다. 어서 하라는 듯, 최재환이 눈썹을 한번 올리자 바로 이어진 그녀의 연기.
“나··· 너 좋아.”
받아주는 대사는 없다. 그래도 권혜선은 잘하고 있었다.
“나··· 너 친구 안 할래.”
“나··· 너한테··· 여자 할래.”
최재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연기가, 그녀의 몸이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도 날··· 여자로 봐줘··· 지금부터.”
불쑥 다가온 권혜선. 그 때문에 서로의 볼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최재환이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