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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뮤직비디오 같은 하루 (2)
감독의 주위로 배우들이 모이자 최재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시현의 등에 따라붙었다.
매일 보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저렇게 잘생겼다는 걸.
고작 2미터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이시현과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후······.’
더위 때문일까.
손에 땀이 흐르자 최재환은 등 뒤로 손을 감추고 다시금 그들을 눈에 담았다. 감독과 이시현, 권혜선에 이어서 그의 시선은 배우 오소리에게서 멈췄다.
‘확실히, 배우는 배우야.’
오소리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 스태프들의 동작이 멈춘다.
넋이 나가 눈을 깜빡이는 모습들이다.
하긴, 걷는 모습마저도 화보로 승화시키고 있으니 시선이 안 갈 수가 없을 것이다. 확실히 오소리는 천생 배우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송이야, 오소리 코디 어떤 것 같아?”
“왜요?”
“보고 배우라고 임마.”
“···알았거든요.”
오소리가 입은 흰 원피스와 줄무늬 반소매 톱, 살짝 드러난 쇄골에 걸려 있는 얇은 목걸이가 최재환의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원피스를 펄럭.
“감독님, 오늘 날씨 참 좋네요.”
오소리가 펄럭이는 원피스 자락을 붙잡은 채로 미소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는 감독의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 여배우님들은 반사판도 필요 없겠는데요?”
“에이, 감독님도 참. 오늘 저희 예쁘게 찍어주셔야 해요?”
“알았어요, 알았어. 근데 다들 콘티는 숙지하셨죠?”
감독이 손에 쥔 콘티를 넘기며 물었다. 대답하는 배우들을 훑어보던 감독이 권혜선에게 다시 묻는다.
“혜선 씨, 문제없죠?”
“아, 예.”
권혜선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켜보는 최재환의 눈에는 그녀의 긴장이 훤히 보였다. 꾹 다문 입술, 불안한 시선 처리. 하필이면 감독도 그녀에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고.
‘하··· 감독의 눈에 보일 정도면 말 다한 건데.’
아무래도 함께 한 시간이 있다 보니 최재환의 입장에서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시현도 신경이 쓰이는 마당에 권혜선까지. 오늘은 어느 때보다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혜선 씨, 어려운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요.”
감독이 다시금 권혜선을 챙긴다.
“예.”
그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가는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최재환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엄지를 척 내밀어 그녀를 응원한다.
“야, 스크립터!”
감독이 스태프를 찾으며 배우들에게 잠시 멀어진다. 덩그러니 남겨진 배우들.
“우와··· 시현이 오빠 되게 여유 있어 보인다.”
한송이가 최재환의 곁에서 속삭였다. 그녀 말대로 이시현은 콘티에 집중하며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식, 누구 보면 10년 차 중견 배우인지 알겠네.
“그러게 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재환은 저 모습이 도통 안심이 되질 않았다.
‘시현아, 잘하자.’
오늘 이시현이 연기할 한정수는 소꿉친구 정은지(권혜선)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늘 함께했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서로를 너무 모르는데, 한정수는 친구를 통해 서정아(오소리)라는 사람을 소개받는다.
‘뭐, 일단 기본 스토리는 이 정도인데······.’
최재환은 콘티의 흐름을 되새겼다. 드라마 촬영도 아니고 뮤직비디오 촬영이니 감독의 디렉션만 제대로 따른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야 빨리 움직여!”
“아이씨, 사람들 물리라고! 반사판 뭐하냐!”
촬영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한층 거칠고 빨라진다. 카메라를 점검하고, 소품들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비키세요.”
찌푸린 얼굴의 스태프가 앞을 지나가자 한송이가 얼른 길을 비켜준다.
“어휴, 정신없네.”
대충 보이는 스태프만 수십 명이다. 불과 5분 남짓한 뮤직비디오에 이 많은 인원이 투입된 것이다. 물론 제작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자!”
감독이 박수를 한번치고 모두를 둘러본다.
“오늘 좀 타이트 합니다. 얘기 들었겠지만 처음에는 여유 있게 사흘 예정했는데, 오늘 다 찍어야 해요.”
다들 들을 수 있게 외치고 다시 배우들을 챙긴다.
“노래는 들으셨죠?”
“예. 좋더라고요.”
이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감독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자신보다 한 뼘은 큰 배우를 눈에 담고 말한다.
“시현 씨한테, 기대가 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을 마주 보는 배우 이시현, 그의 눈에 빛이 서린다.
**
“후······. 덥다.”
이시현이 화단에 엉덩이를 기대고 숨을 몰아쉰다.
한송이와 최재환이 곁에서 열심히 부채질 중.
잠깐 동선을 맞췄을 뿐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면 촬영에 들어가 반사판까지 더해질 때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질 거다.
“시현아.”
최재환의 목소리에 이시현이 표정 좋은 얼굴을 들고 그를 바라본다.
“왜?”
“···아니다.”
“뭐야, 실없긴.”
이시현이 피식 웃는다. 최재환이 부채질을 이어가며 나직이 물었다.
“긴장 안 돼?”
“긴장되지. 이거 봐.”
툭 내민 이시현의 손에 땀이 그득하다. 그 손을 본 최재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권혜선 좀 신경써주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래, 지금 시현이도 제 코가 석 자지.’
그렇다면 기대할 사람은 오소리밖에 없다.
연기력을 갖춘 중견배우를 상대하게 되면 신인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에 녹아들게 되니까. 그러니 오늘 오소리가 제대로 중심에 서줘야 할 것이다.
최재환의 시선이 멀리 오소리 일행을 향한다. 뒤늦게 온 윤 부장이 그곳에서 매의 눈을 하고 있었다.
“형, 부장님 지금 우리 노려보는 거 맞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이시현.
최재환은 요즘 윤 부장과 데면데면한 상태였다.
“부채질 그만해. 팔 아프겠다.”
화단에서 엉덩이를 뗀 이시현이 최재환과 한송이를 두고 움직인다.
뮤직비디오 인트로는 서정아(오소리)와 한정수가 두 손을 맞잡고 교정을 걷는대서 시작한다.
그 모습을 멀리서 한정수의 오랜 소꿉친구인 정은지(권혜선)가 물끄러미 보고 있는 아련한 장면인데, 연출과 촬영감독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배우들이 각자의 동선에 자리를 잡았다.
“후······.”
최재환의 시선이 잠시 촬영장 주변을 돌아본다.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송이야, 잘 봐둬라. 이게 바로 촬영장이니까.”
야외 촬영장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배우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배우들, 준비됐죠?”
감독의 외침이 있자, 오소리가 준비가 끝났다는 듯 이시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구릿빛 피부, 흰 원피스, 맑은 하늘, 그리고 이시현의 미소.
누가 봐도 예쁜 한 쌍의 모습에 감독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구경꾼들, 스태프들, 매니저들의 시선이 모인다.
“아, 떨린다.”
한송이가 곁에서 괜스레 발을 구른다. 최재환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과묵한 겉모습과 달리 입술을 빨아들이며 초조하게 지켜본다.
‘잘할 거야. 시현이는 잘할 거야.’
사실 최재환은 이시현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려다가 묻지 못한 게 있었다.
카메라 울렁증은 정말 괜찮아진 건지, 문제는 없는 건지··· 매니저로서 직접 확인해봐야 하는데도 차마 묻지를 못했다. 그 일이 녀석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잘할 거야, CF 촬영도 문제없었고, 라디오 방송도 잘했잖아. 잘할 거야.’
하지만 실전 연기는 이번이 처음.
그동안의 숱한 오디션과 이시현의 노력이 최재환의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와, 저 사람 누구야? 얼굴에 빛이 나네.”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최재환이 고개를 돌렸다. 구경하는 여대생들의 재잘거림을 들으니 왠지 위안이 된다.
“오소리 진짜 예쁘다.”
여대생들의 시선은 당연히 배우들에게 향해 있었다.
한여름의 구름 한 점이 만든 그림자 아래서 이시현과 오소리가 손을 잡고 있고, 그 뒤에 권혜선이 조금 떨어져서 서 있다.
“권혜선도 장난 아닌데? 나 이따가 사인 받아야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계속 들린다. 스태프들이 조용히 좀 해달라고 몇 번을 부탁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결국에는 감독도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어차피 오디오가 맞물려도 상관없다. 이건 뮤직비디오니까.
“자, 슛 들어갑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촬영감독의 눈이 번쩍 뜨인다.
**
“아, 거기 밀고 들어오지 마시라니까요!”
스태프가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자꾸만 선을 넘어오고 웅성거리면 배우들이 연기에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 진짜··· 거기 안으로 들어가시라고요.”
한 번 더 짜증을 냈지만 소용없다. 학생들은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금 우르르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스태프도 찌푸린 얼굴을 뒤로하고 하소연을 했다.
“조용히만 좀 해주세요.”
“근데 오빠, 저 남자 배우 누구예요? 처음 보는데?”
여대생들이 수줍은 얼굴로 묻는다. 오빠라는 소리에 스태프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선심을 쓰듯 말한다.
“배우 이시현이요.”
“이시현이요?”
“예, 지에스엔터테인먼트라고··· 왜 박한영 있는데 있잖아요?”
“아아······.”
아는 배우 이름이 나오자 여대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야, 너 지난번에 박한영 봤다며?”
“어 봤는데, 박한영도 멋있는데··· 저 사람이 더 멋있어.”
“이따가 사인받자.”
“카메라 있으면 좋겠는데··· 야, 누가 동방가서 카메라 좀 가져와라.”
“네가 가져와!”
수다도 이런 수다들이 없다. 여기저기서 떠드는 통에 스태프는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그때,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선 안으로 한 발짝 들어오자 스태프가 눈에 불을 켜고 외쳤다.
“거기, 들어오지 마시라고요!”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모습이 왠지 수상한 여자다.
“알았어요! 왜 신경질이야?”
투덜대며 뒤로 물러나던 그녀가 허리를 숙이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뒤로 물러나며 전화를 받는다.
“예, 팀장님.”
-너 어디야?
“집이죠. 아프다니까요.”
-장난해? 내가 지금 너희 집 앞이거든? 문 잠겨 있는데?
“아··· 병원이요 병원. 그냥 집이라고 한 거지.”
-진짜야?
“진짜라고요. 사람 말을 못 믿어. 근데 왜 오셨어요? 저 오늘 연찬데.”
-블랙보이 4분기 기획안 가지러 왔지. 네가 가지고 있잖아? 너 언제 와?
“앗! 저 지금 진료실 들어가야 해요. 끊을게요.”
-백유진! 야, 삐삐!
서둘러 전화를 끊은 백유진이 다시 학생들 틈을 파고든다. 이리저리 어깨를 부딪친 끝에 이시현의 미소를 눈에 담은 백유진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래, 저 미소지.’
회사 내 누구도 모르지만, 사실 그녀는 이시현의 오랜 팬이다. 현재는 1천 명으로 불어난 ‘시현 수호천사들’을 관리하는 팬클럽 회장으로서, 오늘을 위해 연차까지 냈다.
‘오빠,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연기에만 집중하세요. 오빠는 우리 시현 수호천사들이 지켜드릴게요.’
눈을 반짝이면서, 백유진의 입술이 뭔가를 속삭인다. ‘알러뷰 쏘 머치!’ 그 모습을 본 스태프가 뜨악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