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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뮤직비디오 같은 하루 (1)
“성 팀장님, 서 있는 김에 노래 한 곡 해요.”
화장실에 다녀오는 성 팀장을 향해 누군가 크게 외쳤다.
“또 무슨 노래야?”
“노래해! 노래해! 노래해!”
직원들의 박수와 연호에 성 팀장이 난처함이 깃든 미소를 띠고 제 앞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결국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들을 쓱 둘러보고는.
“그럼, 시현 씨가 도와줘요.”
가만히 있던 이시현이 깜짝 놀라서 하얀 손을 정신없이 흔든다.
“저 노래 못해요.”
“에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현 씨 프로필 영상 내가 봤는데··· 보고 얼마나 놀랐었는데?”
“예?”
이시현이 마치 남의 얘기를 들은 것처럼 놀란 눈을 한다. 그 모습에 성 팀장이 입술을 빼죽 내밀고 바람을 뱉었다.
“후, 치사하다 치사해. 알았어요, 나 오늘 여기서 확 쪽팔려 죽지 뭐.”
그녀는 바로 빈 맥주병에 수저를 딱 꽂았다.
짝! 짝! 짝!
매니저들이 군대 박수를 치자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분홍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떠오르는 신나는 노랫말. 두 손에 맥주병을 꼭 쥔 채로 어깨를 흔들흔들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들 흥이 제대로 꽂혔다.
“우와, 가수 뺨친다!”
“성 팀장님 최고!!”
노래를 다 끝낸 그녀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어휴, 한숨을 내쉰다.
“성 팀장님, 나 오늘부터 성 팀장님 팬 할래!”
조 팀장이 두 손을 모아 외쳤다. 그러자 성 팀장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사생팬은 거절!”
하하 웃는 사람들 사이로 성 팀장이 미소 띤 얼굴을 들고 한 사람을 바라본다. 배우 이시현.
“뭐해요? 안 나오고.”
“아, 저 진짜 노래 못해요.”
“우우우!”
사람들의 야유. 이번에는 최재환도 모른 척 가만히 있자, 이시현이 토라진 얼굴로 최재환을 가리켰다.
“전 혼자선 안 할 겁니다. 형이랑 같이 할래요.”
“야! 또 왜 날 걸고 넘어가?”
“그럼 어떻게 해? 우린 한 몸인데.”
이시현의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부럽다고 난리다. 결국 떠밀리듯이 최재환이 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때, 최재환이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아, 잠깐만.”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밖으로 나간다. 그가 귓가에 휴대폰을 붙이려는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가 지금 온 것이다.
“우와 사기꾼이다!”
슬기가 손가락을 내밀며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재환이 냉큼 밖으로 도망친다. 홀로 남은 이시현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러고 삽니다.”
그 말에 여직원들이 깔깔 배꼽을 잡는다.
“근데 저 진짜 노래는 못하고요, 개인기 한번 보여드릴게요.”
이시현이 좀 전에 성 팀장이 내려놓은 병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친애하는, 친애하는··· 회사, 회사··· 동료, 동료 여러분······.”
“우우우!!”
극심한 야유가 쏟아진다. 이시현이 하하! 웃으며 상황을 정리하는데, 신입 매니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저, 하나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가요?”
고개를 갸우뚱하고 묻는 이시현.
“눈물 연기요. 배우분들 순식간에 눈물 흘린다면서요?”
“아······.”
신입의 질문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주춤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니 호기심이 든 모양인데, 배우에게 연기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회식자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현 씨, 신경 쓰지 마, 애가 잘 몰라서······.”
덩치 큰 매니저가 상황을 정리하는데, 이시현이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고 신입을 바라본다.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하고, 따뜻한 미소를 보인다. 그 미소에 스며드는 눈물. 그래서 다들 입을 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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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의 부탁에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늘 하루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모두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따뜻했고, 이 자리에서 느껴지는 이 포근함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지거든.
그렇게 흘러내린 눈물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에도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은 내 미소에 스며들었다.
“우와······.”
나직이 탄음을 터트린 건 삐삐였다.
“이야, 역시 배우는 배우야.”
점차 커지는 속삭임과 박수 소리, 뒤이은 탄성들 속에서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신입이 바로 맥주병을 내밀었다.
“시현 씨, 제가 형님이라고 해도 됩니까?”
“형님은 무슨. 편하게 얘기해요.”
“아닙니다, 제가 감동 먹어서 그렇습니다.”
신입은 들떠 있었고, 나는 눈물의 여운을 삼키며 채워진 잔을 들이켰다. 그러다 문득 권혜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잠시 그녀의 옆모습을 보다가 엉금엉금 들어와 옆에 앉으려는 최재환을 발견하고는 빈주먹을 들었다.
“치사하다, 치사해.”
그가 머쓱한 미소를 보이고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다시 일상의 얘기와 회사 생활의 얘기들이 이어졌다.
신입은 언제 술을 마셨는지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나는 사람들의 얘기를 경청했으며, 최재환은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댔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그렇게 지나간다.
“형, 송이한테 좀 잘해줘.”
내 말에, 최재환이 맥주잔을 흔들며 나를 본다.
“이것도 잘해주는 거야. 지금이야 설렁설렁 다니지만, 너 촬영 다니고 그래 봐? 그런 곳에서 실수하면 큰일 나는 거야. 스타일리스트가 코디 엉망으로 하지? 카메라 돌면 너 그거 평생 남는 거야.”
“알아. 그냥 좀 부드럽게 하라고.”
“부드러운 거 다 얼어 죽었다.”
최재환이 후후 웃음을 흘린다. 그가 한송이를 혼내고 타박하는 것은 미워서가 아닐 것이다. 매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장소를 오가는 생활에서 나긋나긋 가르칠 여유는 없다. 나도, 최재환도.
그래서 때로는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결국에 뒤에 가면 미안해하고, 또 챙겨주고 싶고··· 그렇게 된다. 그게 삶인 것 같다. 남들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자, 마시자!”
짠하고 잔을 부딪치는데, 카운터에서 조 팀장이 뭔가를 들고 촐랑거리며 온다. 디지털카메라다.
“야, 일어나, 일어나! 다들 일어나!”
그 말에 매니저들이 어기적어기적 일어난다. 기콘부 여직원들도 성 팀장의 등쌀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좀 뭉쳐봐!”
조 팀장이 손을 뻗으며 외친다. 그 지시에 우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리를 맞췄다. 포즈를 잡고, 브이를 그리고, 다 함께 외친다.
“김치!”
**
「서울 명동. 2000년 7월 26일 수요일」
회사는 보이스레이드 뮤직비디오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경영지원부서에서 예산을 잡고, 홍보부에서 장소를 섭외하고, 매니지먼트 사업부서에서 뮤직비디오 연출 감독과 스태프들의 스케줄을 조율했다. 물론 연기자들의 스케줄도 맞춰야 했다.
이 모든 준비에 소요된 시간이 불과 나흘.
그만큼 보이스레이드 컴백 일정이 촉박하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촬영은 명동에 있는 여대에서 하는데, 지난주 회식 자리에서 최재환이 제안한 대로 여자 배우는 오소리와 권혜선이 출연하고 남자 배우는 나 홀로 출연한다.
처음 기콘부의 의견과 달리 ATTM의 평가 결과에 따라 권혜선의 최종 합류가 결정됐다.
물론 그에 따라 스토리 수정이 이어졌지만, 영화나 드라마처럼 긴 시간과 인원이 필요한 각색 작업은 아니었다. 한 시간이나 걸렸으려나.
“다 왔다.”
주차장에 차가 멈췄다. 무릎에 닿은 손길에 슬며시 눈을 떠보니, 나를 보고 있는 괜찮게 생긴 얼굴이 보인다.
“가자, 시현아.”
“응.”
내가 몸을 틀어 차에서 내리자, 뒤이어 내린 한송이가 바로 내게 달라붙었다. 그녀가 분주히 손을 움직이며 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위아래를 훑어본다.
오늘은 간단하게 청바지와 흰 티 한 장이 전부. 운동화는 낮은 단화로 충분하고.
콘티에 맞춰 대학생 스타일로 갖췄는데, 한송이는 오늘 입을 청바지를 두고 연청과 진청 사이에서 지난 이틀을 고민했다. 더 놔뒀다가는 그녀의 머리가 터질지도 몰라서 결국에는 내가 맘대로 진청으로 정해 입었다.
“역시, 연청이 나았을라나?”
그녀가 또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에 최재환이 체념한 듯 입맛을 쩝 다시고 외친다.
“가자!”
우리는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송이가 짐 가방을 챙기자, 나와 최재환도 하나씩 나눠 들었다. 걷는 길에 여대생들이 많이 보인다. 파릇파릇한 모습들, 다들 젊고 활기차 보인다. 저 나잇대는 화장 하나 안 해도 예쁜 얼굴이니까. 근데··· 지금은 방학 아닌가?
‘뭐, 상관없지.’
그녀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배우인지를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한번은 쳐다본다. 잘생겼으니까.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그러게요.”
최재환이 주위를 보며 투덜거리고 한송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녀는 요즘 최재환의 눈치를 살피고 일단은 비위부터 맞춰주는 모양이다.
“어이구 힘들어.”
최재환이 숨을 몰아쉰다. 그의 짧은 다리가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내 긴 다리는 성큼성큼 길을 오른다.
“후, 길이 왜 이렇게 높아? 무슨 등산 하나.”
“그러니까요.”
최재환도 헉헉. 한송이도 헉헉.
별로 높은 지대도 아니건만 저리 궁상들이라니. 나는 최재환의 등을 힘껏 밀었다.
“가자 가자!”
“야야, 하지 마.”
촬영 장소에 도착하니 여러 대의 차량과 기재들, 스태프들이 보인다. 그중에는 오소리 일행도 보이고, 권혜선 일행도 있었다. 그런데 오소리는 오늘 아주 대 부대를 끌고 온 듯했다. ‘솜솜’ 그러니까 샵의 직원들도 여럿 대동한 듯 보인다.
‘어라, 오명숙이 안 보이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들을 구경하고 있던 여대생들의 시선이 내게 쏠린다. 알아알아. 놀랐겠지.
“안녕하십니까!”
나는 먼저 스태프들에게 인사부터 했다. 우렁찬 목소리와 깍듯한 자세는 기본이니까.
“이시현 씨!”
연출 감독이 멀리서 손을 흔든다. 콧수염에 베레모를 쓰고 있는데, 이제 막 서른 중반이라고 한다. 최재환이 그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수첩 쥔 손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시현아, 나 저쪽에 좀 갔다 올게.”
그는 권혜선 일행에게 향했다. 반면 한송이는 내 곁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촬영장을 둘러보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쉰다.
“오빠.”
“왜?”
“나 이제 오빠랑 다니면 맨날 사람들이 나 보고 그런 생각 하겠죠?”
“뭘? 무슨 생각?”
“아름드리나무에 달라붙은 코알라?”
나는 그녀를 잠시 내려다봤다. 그녀가 동글동글한 눈을 뜨고 나를 올려본다.
“송이야.”
“예.”
“코알라 모독하지 마. 귀여운 동물이야.”
내 말에 그녀의 입안에 바람이 가득 찬다.
“장난이야, 장난.”
“나 가지고 놀면 재밌죠? 에효.”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한숨을 내쉰다.
“후훗.”
나는 그녀의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며 기운을 복 돋아줬다. 내가 최재환에게 안마해주는 걸 보고는 한번 해달라고 해서 가끔 이렇듯 그녀에게도 장난처럼 안마를 해준다.
마침 감독이 박수를 한 번 치고 외쳤다.
“배우분들 모여주세요.”
나와, 권혜선, 오소리가 감독을 중심으로 모였다.
‘권혜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그녀는 연한 색의 청바지와 하늘색 남방셔츠를 입고 있었다. 맑은 하늘 그대로인 색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가 참 맑네.’
구름 한 점이 뒷짐 지고 흘러가는 걸 보니 비는 안 올 것 같다. 물론 그걸 계산하고 스케줄 잡았겠지만.
아무튼 권혜선의 상의가 그녀의 몸보다 훨씬 커서 사랑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오늘을 위해서 그녀는 옅은 갈색으로 염색한 모양이다. 풍성한 머리카락에 웨이브도 넣었고.
그녀의 팬들이 봤다면 이 모습 꼭 소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오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