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44화 (4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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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하나 되어 (3)

‘후······.’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옷깃을 펄럭이는 바람을 한차례 맞고, 나는 피식 웃음을 삼켰다.

“뭐가 그렇게 좋아?”

곁에 선 최재환이 내 등을 툭 친다. 아니, 힘껏 두들긴다.

“그냥.”

내가 어깨를 으쓱 올리자, 최재환이 주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윤 부장과 박용현이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최재환이 한숨을 쉰다.

“대표님 말이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오셨나 보더라.”

좀 전의 상황을 다시 얘기한다. 평소의 차 대표답지 않게 짓궂은 장난을 쳤으니 말이다.

“대표님, 기분 좋아 보이던데?”

내 말에 최재환이 웃는다.

그러더니 눈썹을 들고 의외라는 듯 나를 본다.

“너 이제 제법이더라? 적당히 분위기도 맞출 줄 알고.”

“나만 맞췄나 뭐. 여자들도 재밌게 놀더만.”

회사의 모든 프로젝트는 각 부서의 회의를 거치고, 이해당사자 간의 이견을 조율한 다음, 마지막으로 임원회의에서 결정된다.

최종적으로 차 대표의 결재가 남지만, 대표가 결재를 보류할 만큼의 프로젝트가 올라오는 일은 드물다. 지에스엔터테인먼트의 시스템은 꽤 견고하니까.

그러니 보이스레이드 뮤직비디오 건이 차 대표의 지시로 움직인들,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한다.

일을 추진하기까지는 조율하고, 결정하고, 결재하는 일련의 과정이 남았으니까.

“박한영 얘기는 대표님이 그냥 한 얘기란다.”

“그래?”

예상은 했었다. 다음 주가 기자회견인데 박한영이 그걸 할 여유가 어디 있을까. 지금 묶여있는 일들 정리하기도 바쁠 텐데.

“그럼 권혜선 씨하고, 오소리 선배님, 두 사람 출연하는 건?”

“뭐, 상무님 얘기로는 기콘부에서 혜선이는 안 하는 게 날 것 같다고 건의했다는데, 혜선이가 한다고 해서 일단은 기콘부에 얘기해 다시 검토시킬 거라더라.”

최재환이 팔짱을 한 채 말했다.

마침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온 윤 부장이 다가온다. 최재환에게 뭐라고 한마디를 할 것 같은 눈치였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맛을 쩝 다신다.

“최 실장, 애들 전화 좀 해라. 어디까지 왔냐고.”

“예.”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

나는 그들 뒷모습을 눈짓하면서 최재환에게 물었다.

“부장님이 뭐라고 안 해?”

“넌 신경 쓰지 마. 혼나도 내가 혼나.”

최재환이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나는 잠시 그를 보다가, 다시 얘기를 꺼냈다.

“형. 우리 이왕 이렇게 된 거, 뮤직비디오도 하고, CF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하자. 영화 하나에 올인하는 것보다는 그게 좋을 것 같아.”

내 말에 최재환이 입맛을 쩝 다시더니, 아랫입술을 핥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우리가 너무 신중히 가려고 했나 보다. 그래서 대표님이 아까 그런 장난을 치셨나······.”

아무래도 오늘 차 대표는 어제 있었던 기콘부와의 회의 결과를 듣고 우리에게 잘못된 점을 얘기하려 한 것 같다.

이것저것 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래서 바이바이 건을 진행하고, 뮤직비디오라는 소일거리를 줬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또 한 수 배웠네.’

배웠다기보다는 무심코 지나친 걸 다시금 깨달은 기분인데, 젠장··· 나는 언제가 돼야 저 양반보다 한발 앞서갈 수 있을까.

“후··· 혜선이도 그렇고, 누가 연기자들 아니랄까 봐 다들 장단이 잘 맞아. 난 상무님이 얘기하기 전까지는 진짜인지 알았네.”

최재환이 고개를 휘휘 가로젓고 나를 본다.

“시현아.”

“왜?”

“일단 시나리오는 곧 올 것 같으니까, 그거 보고 움직이자. 넌 아까 대표님 말씀처럼 보이스레이드 뮤직비디오만 집중해. 그거 가볍게 볼 거 아니야. 네가 잘해야, 보이스레이드도 이번에 좀 잘되지.”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이번 뮤직비디오는 빛을 못 본다. 그렇게 될 것이다. 분명히.

“들어가자.”

최재환이 내 어깨를 툭 치고 웃는다. 저녁노을이 몰고 온 여름 바람이 그의 잿빛 티셔츠를 펄럭인다. 그 모습이 못마땅해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아까 산 거 입으면 좋잖아.”

“그걸 어떻게 회식 자리에 입고 와? 고기 냄새 달라붙게··· 그건 나중에 입을 거야. 니가 선물해준 거니까, 아껴 입어야지.”

“어이구, 궁상.”

근데 말이다. 이상하게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 미소가 좋다. 사람 좋은 미소라기보다는 믿음이 담긴 미소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미소 말이야. 비록 우리는 묘한 관계지만.

“들어갑시다.”

최재환의 팔을 붙잡고 들어가려다가, 우리는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초원 위를 달려달려!

구름 위를 달려달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전등이 번쩍번쩍. 스피커 음량이 빵빵한 광고차량이다.

거리를 지나는 차량에서 바이바이 CF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진짜··· 저 노래 미치겠다.”

최재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오소리 선배가 저 CF 찍었으면, 평생 이름 뒤에 젖소가 쫓아다녔을 거야.”

“하긴, 따지고 보면 오소리가 너한테 빚진 거야? 후훗.”

지난 일을 얘기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다가온 그림자가 우리를 덮쳤다. 오소리와 오명숙, 그리고 윤 부장이다.

“그러네요. 내가 빚졌네.”

오소리가 미소를 띠고 우리를 본다. 구릿빛 피부보다 한층 진한 눈동자가 우리를 보고 있다.

“아··· 하하, 그냥 하는 말이죠.”

최재환이 서둘러 손사래를 저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한술 더 떴다.

“그럼, 어떻게 빚을 갚지?”

“에이, 그냥 하는 말이라니까요.”

“후훗.”

오소리가 웃는다.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빚은 나중에 갚는 거로.”

그녀는 장미향과 함께 앞서갔고, 굳은 얼굴의 윤 부장이 그 뒤를 따르며 최재환을 쳐다봤다.

“우리 먼저 간다. 일이 있어서.”

“예, 알겠습니다.”

갈지자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하는 윤 부장. 최재환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송이는 몸 괜찮을까?”

그러자 최재환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나를 본다.

“먼저 들어가 있어.”

“어.”

안으로 들어온 나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는 3W를 볼 수 있었다.

레니는 왠지 화가 난 얼굴이고, 슬기는 삐친 얼굴이고, 권혜선은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그리고 박용현은 눈치를 살피며 통화를 하고 있고.

‘뭐야? 진짜 여자들 기 싸움이었나?’

차 대표의 장단을 맞추다가 제대로 상황에 빠져들었나 보다.

“뭐야?”

뒤이어 들어온 최재환이 서 있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말한다.

“여기 누구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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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환이 풀죽은 그녀들을 보며 수저를 손에 쥐었는데, 그가 수저를 쥔 순간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형······.”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친애하는, 친애하는··· 회사, 회사··· 동료, 동료 여러분······.”

최재환의 유일한 개인기인 확성기 훈화 개그.

회식자리에서 기분이 좋을 때만 한다는 그 개그.

대표가 되고서도 계속된 유일한 개그는 어느 날 한 여직원이 재미없다는 말을 한 이후로 멈추게 된다.

‘삐삐.’

문득 그 생각을 떠올리는데, 발소리와 함께 식당 입구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성 팀장과 삐삐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 뒤로 기획콘텐츠 개발부서 여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오셨어요?”

최재환이 얼른 그녀들을 맞이한다. 여기저기 테이블을 차지한 그녀들 덕에 식당이 북적거리자, 나 역시도 팔을 걷어붙였다.

일단 고기와 술을 주문했다. 음료수도 주문하고, 카운터에 부탁해 조금은 왁자지껄하게끔 노랫소리도 키웠다.

“고맙습니다.”

기분이 들떠서, 나도 모르게 물수건을 건네준 직원에게 함박미소를 보였다. 얼굴이 붉어진 직원을 뒤로하고 테이블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성 팀장님, 물수건이요.”

“어, 고마워요.”

삐삐에게도 하나.

“고, 고맙습니다.”

점차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일단은 2팀의 매니저들만 하나둘 얼굴을 보인다. 1팀은 안 올 모양인가. 언제 왔는지 조 팀장이 최재환과 마주 앉아 있다.

“야, 부장님 한소리 들었다며?”

바로 묻는다. 소식도 빠르지. 최재환이 어색한 미소를 보이자 조 팀장이 고개를 내젓는다.

“어휴, 요즘 계속 찍히시네.”

“강 실장은요?”

“걔 요즘 바쁘지 임마. 한영이 당장 다음 주에 기자회견인데, 그 일 처리하기도 정신없을 테고··· 지 먹고살 거 찾는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거 보면, 내가 다 안쓰럽다.”

“뭐, 잘하겠죠.”

“잘해야지 그럼. 짬밥이 있는데.”

아무튼 식당 안이 제법 소란스러워지자 조 팀장이 조금 떨어진 테이블의 성 팀장을 곁눈질하고 운을 뗐다.

“성 팀장님, 한 말씀 하시죠?”

“에이, 나 그런 거 못 해요. 조 팀장님이 하세요.”

“나는 맨날 하는 거 지겨워요.”

“누군 뭐 다른가.”

“아휴, 빼시기는··· 그럼, 우리 최 실장님께서 해봐.”

“아니 또 왜··· 뭐, 그럼 제가.”

최재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장의 은은한 조명등이 식당을 채우고, 여기저기 자리를 채운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익숙한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그가 수저를 잡는다.

“형, 그것 좀 하지 마.”

나는 수저를 잡은 그의 손을 꾹 붙잡았다.

“아 왜?”

실랑이하는 우리의 모습에 그제야 슬기와 레니가 피식 웃는다.

“그럼 시현이 오빠가 해요!”

슬기의 오른손 검지가 나를 가리킨다.

“예?”

“그래, 시현 씨가 한번 해요.”

성 팀장이 동조하고, 다들 박수를 요란하게 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얼떨결에 소주병을 손에 쥐고 이들 앞에 서야 했다.

“아, 이러면··· 저 안 빼는데?”

깔깔 웃는 여직원들.

“오늘은 회식이니까, 다들 힘든 거 모두 잊고, 뭐 쌓인 감정 있으면 지워버리고, 한잔 씩 하시죠. 그럼··· 위하여 한번 할까요?”

지에스엔터테인먼트를 위하여!

직원들은 잔을 높이 들었다. 꿀꺽꿀꺽 마시는 직원들.

회식자리가 그렇듯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한다.

업무 얘기를 하는 직원들도 있었고, 앞으로의 일을 얘기하는 직원도 있다. 권혜선은 성 팀장과 뮤직비디오 촬영 일정과 내용에 대해서 듣고 있었고, 최재환도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배우들은 한 명도 안 왔네요.”

뒤늦게 온 1팀 매니저들이 자리에 합류하며 식당 안을 둘러본다. 그러자 최재환이 수저를 두들기고 눈을 흘겼다.

“이시현은 배우 아니야? 왜 가만히 있는 내 배우 내다버려?”

“아, 또 말이 그렇게 되나? 하하.”

뒷머리를 긁적이는 덩치 큰 1팀 매니저. 그러더니 누구 하나를 부른다.

“실장님, 우리 팀 신입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정준하입니다!”

1팀의 신입 로드매니저가 우리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잘생겼네? 반갑다, 한잔해라.”

최재환이 소주병을 내밀자 신입이 서둘러 잔을 붙잡는다. 그러자 옆에서 덩치 큰 매니저가 잔을 가로채 갔다.

“야 신입, 너 술 먹으면 안 된다. 용현이 형님 대신에 네가 3W 데려다 줘야 해.”

“그냥 마시게 둬, 내가 안 마시지 뭐. 근데 나 술 좋아한다?”

박용현이 눈을 동글동글 뜨고 신입을 본다. 그러자 스포츠머리의 군기가 팍팍 든 신입이 외쳤다.

“아닙니다!”

우렁찬 대답에 만족한 듯 박용현이 픽 웃는다.

“됐어 임마, 그냥 먹어.”

고기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최재환이 1팀 매니저들에게 잔을 돌리며 나직이 물었다.

“1팀장님 안 오신데?”

“안 온대요. 일 있어서··· 유 실장님은 오려고 했는데, 팀장님 눈치 보이나 봐요. 그래서 애들만 데리고 왔죠 뭐.”

그 얘기를 들은 최재환이 입맛을 쩝 다시자, 잠자코 있던 조 팀장이 화제를 돌린다.

“신입, 너 3W 잘 모셔라. 이제부터는 네가 쫓아다닌다며?”

그 말을 들은 최재환이 신입의 잔에 소주 대신 음료수를 따르며 입을 연다.

“슬기 쟤는 밥 많이 먹여야 하고, 대표님 몰래··· 훗. 그리고 레니는 그냥 두면 제가 알아서 하거든? 근데 혜선이는 신경 좀 써. 애가 힘들어도 도통 말을 안 하니까··· 일단 알고 있으라고, 당분간은 욱이 대신에 니가 따라다닐 것 같으니까. 어려운 건 여기 용현이한테 얘기하고.”

“명심하겠습니다!”

“뭐, 어려운 거 있어?”

최재환이 3W를 힐끗 보고 나서 신입에게 물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신입.

“아··· 제가 남중 남고 나왔거든요. 그래서 조금 불편합니다. 다들 너무 예쁘셔서.”

“괜찮아, 점점 친해지겠지. 그리고 임마, 지금이니까 여자로 보이지, 나중에 보면 형제보다 더 짜증 날 거다.”

혹 3W가 들을까 낮게 속삭이는 최재환.

“근데 실장님.”

“왜?”

최재환이 고개를 다시 든다. 나는 그들 곁에서 조용히 술을 마셨다. 누군가의 시선에는 잘생긴 사람이 조용히 자작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권혜선 씨, 사귀는 사람 없죠?”

“왜? 뭐 있어?”

“유 실장님이··· 저 보고 특별히 그거 관찰하라고 해서. 요즘 이상하다고······.”

“유 실장이?”

“예.”

“글쎄··· 그런 건 난 모르겠는데? 있으면 벌써 난리 났지. 자식, 여기까지 와서 일은 무슨. 많이 먹어.”

최재환이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기를 추가로 시키려는 모양이다.

“형, 내가 갔다 올게.”

“됐어, 넌 쉬어.”

“아니야, 형이야말로 좀 쉬어.”

우리를 한심하게 보는 조 팀장.

“그냥 외쳐 이것들아, 이모님!”

조 팀장이 큰 목소리로 식당 직원을 부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조 팀장 앞에 놓인 맥주병을 손에 쥐었고, 조 팀장의 잔에 따르기 위해 기울였다.

“팀장님, 한잔······.”

술잔이 오가고, 말소리들이 높아지고, 노랫소리에 취한다.

최재환은 여기저기 테이블들을 기웃거리며 술 한 잔씩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형, 너무 마신다.”

“너 오늘 택시 타고 가라.”

걱정하는 나를 향해 최재환이 씨익 이를 드러냈다. 아무래도 승진 후 첫 술자리다 보니 여기저기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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