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43화 (4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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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하나 되어 (2)

“안녕하십니까.”

주차장에 있던 차를 봤을 때 예상은 했는데, 식당 안에는 차 대표와 박 상무, 윤 부장, 박용현, 그리고 3W까지. 아, 오소리도.

“앉아, 앉아.”

차 대표가 우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다. 최재환이 먼저 온 박용현의 옆자리에 앉자, 숨 돌릴 새도 없이 바로 질문이 들어왔다.

“윤 부장한테 얘기 들었지?”

차 대표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대답했다.

“예, 뮤직비디오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래, 보이스레이드 뮤직비디오니까, 한식구끼리 상부상조하는 거잖아?”

“예.”

이유야 뭔들 못 만들어낼까.

“최재환이.”

이번에는 차 대표의 시선이 최재환에게 닿았다. 잠시지만 둘 사이에서 꽤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간 것 같았고, 차 대표가 먼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문제없지?”

“예, 문제없습니다.”

“좋아. 가경 작가 쪽은 아직 시나리오가 안 나왔으니, 좀 더 기다려보자고. 일단 이달은 뮤직비디오에만 집중해봐. 그리고 바이바이 건은 CF만 추가로 가기로 했다며?”

“예.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최재환은 체념한 듯 표정 관리에 들어갔고, 나를 보는 차 대표는 아쉬운 듯 다시 말을 꺼냈다.

“흠··· 지금 CF 반응 좋던데, 방송국에서 그 얘기 많이 나와. 예능도 들어왔다며?”

차 대표가 박 상무를 돌아본다.

“예. 그렇지 않아도 토크쇼에 한 번 나와 달라고, 어떻게 알았는지 피디가 직접 전화를 해왔습니다.”

“토크쇼?”

“그 KIS 서세······.”

“됐어. KIS는 당분간 근처에도 가지마. 사람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인제 와서 무슨.”

차 대표가 눈가에 주름을 새기고 나를 본다. 익숙한 시선과 향수.

“그렇잖아? 지난번 단막극에서 밀어낼 때는 언제고 말이야.”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차 대표는 잠시 얘기를 멈추고 앉아있는 이들을 둘러봤다.

대표가 얘기하고 있어서인지 다들 수저도 들지 않고 있다. 특히 윤 부장은 뭔가 맛이 간 얼굴인데··· 박 상무가 얘기를 꺼냈다.

“오늘 너희들 먼저 부른 건, 다들 알겠지만 보이스레이드 뮤직비디오 때문이야. 그것만 정리하고 대표님은 일어나실 거야. 그래, 이시현.”

왜 또 날 부를까.

“예, 상무님.”

“선택해.”

“뭘요?”

내가 되묻자 3W와 오소리, 그녀들의 맑은 눈이 나를 쳐다본다. 뭐야, 3W는 날 왜 저렇게 보는 거고, 오소리의 볼은 또 분홍빛이고··· 그새 한잔씩들 마신 건가.

“이시현.”

정신없는 내 시선을 박 상무가 멈춰 세웠다. 그가 다시 말한다.

“선택하라고. 네 상대 배역 말이야.”

“그러니까··· 뭘 선택하라는 건지.”

“오소리하고, 권혜선. 둘 중에 누구랑 하고 싶어?”

“예?”

**

“누구랑 하고 싶으냐고.”

박 상무는 대답을 재촉했고, 권혜선과 오소리의 시선은 본드칠이라도 한 것처럼 내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

권혜선은 화난 아가씨 같은데, 오소리는 얄미운 여동생 같은 눈이지만, 저들 시선 너머에는 알아서 ‘잘’ 선택하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네가 선택하면 돼.”

그 말에 나는 여전히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최재환이 나만 믿으라는 듯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나섰다.

“아니, 무슨 그런 걸 시현이가 선택을 합니까? 그거야 혜선이하고 오소리 씨가 둘이서 조율하고, 대표님이 결정하시면······.”

“됐어. 이시현이가 결정해.”

차 대표의 한마디.

왠지 즐기는 듯한 얼굴이다. 이 망할 인간.

“누구를 택하려나.”

레니의 혼잣말.

“나는 믿어요, 우리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믿어요.”

슬기의 말도 안 되는 노랫말.

그나마 차 대표가 슥 쳐다보자 그녀들이 입을 꾹 다문다. 그런데 마치 총알에 맞은 것 같은 타격감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거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야?’

아무튼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선택에 따라서 저 둘 중 하나에겐 무조건 찍힌다. 아니지, 3W는 셋이지.

‘우선 오소리.’

바이바이 CF 건도 있고, 지난번에는 휴대폰도 선물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인생을 바꿔줬다. 물론 그녀가 그걸 알아줄 리 없지만.

‘그럼 권혜선은······.’

계속해서 픽픽 쏘아붙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이라고 해봐야 하도 오래전이라서.

다만 젊은 최재환에게는 아직은 제 새끼나 다름없는 애들이다. 작년까지 3W의 매니저였으니까. 아직은 좋은 매니저와 좋은 가수의 사이던데, 지금의 내 선택으로 그게 깨질 수도 있다.

“답 나왔어?”

박 상무가 묵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카리스마 박, 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 결정은······.”

말꼬리를 흐리며 최재환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눈을 살짝 감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보고 알아서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알아서 말했다.

“재환이 형의 선택대로 하겠습니다.”

순간 최재환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제가 선택할 수도 있지만··· 저는 매니저의 선택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제가 가는 길이 꽃길이 될지, 혹은 가시밭길이 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제 매니저죠.”

최재환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기세다. 미안해서,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찌 됐든 차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서로 믿고 가야지. 너희 둘 사이는 진짜 좋아 보인다. 자, 그럼 최재환. 어떻게 생각해?”

“그게······.”

최재환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좀 전까지의 느긋함이 사라진 모습이다. 아마 나중에 나를 죽이려 들지도 모르겠다.

“전 오소리 씨가 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민 좀 할 것 같았는데, 최재환이 바로 대답했다. 의외의 모습에 놀란 나와는 달리, 차 대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럼.”

“근데··· 혜선이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술잔을 손에 쥐려던 차 대표가 무슨 소리냐는 듯 이마를 찌푸린다. 그러자 박 상무가 대신해 물었다.

“무슨 얘기야?”

“사실 오기 전에 콘티 봤습니다. 그 내용이 오랜 친구 사이인데, 어느 날 서로에게 낯선 감정을 느낍니다. 그런데 고백을 하면 친구 사이마저 멀어질까 봐 고백하지 못하는··· 그런 내용이잖습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각자에게 서로의 연인이 있다면··· 그 갈등이 한층 커지고, 공감대도 넓힐 수 있지 않을까요?”

예상치 못한 최재환의 의견에 다시 생각을 잇던 차 대표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고거 나쁘지 않네. 흠, 그럼 남자 배우가 하나 추가로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좋아, 아예 이렇게 하자.”

뭐가 이렇게 결정이 빠른가 했는데, 이유가 바로 나왔다.

“박한영이 기자회견 다음 주지?”

“예. 28일 금요일입니다.”

“박한영도 투입해. 은퇴기념 마지막 출연작.”

그 말에 박 상무가 눈을 크게 뜬다. 좀처럼 표정변화가 없는 양반인데.

“그럼 스케일이 커질 텐데요? 시간이 촉박하기도 하고.”

“스토리가 커지면 스케일도 커지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노래에 비해서 우리 애들 인지도가 밋밋하다는 생각이었는데··· 박한영이 끼면 이슈도 되고 좋잖아? 그리고, 우리가 영화 찍어? 대충 손 빠른 친구들로 연출 잡아.”

박 상무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박한영에게 얘기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때, 최재환이 나직이 속삭이며 차 대표를 바라봤다.

“저 대표님.”

“왜?”

“시현이 월말평가요.”

“월말평가?”

“그게, 시현이가 연습생도 아닌데, 월말평가를 하는 건 좀 그래서요.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소리야?”

차 대표가 시선을 돌려 윤 부장을 쳐다본다. 그러자 윤 부장이 최재환을 슥 노려봤다가 얘기를 꺼냈다.

“아, 월말평가 준비하라고 말했더니 저러네요.”

윤 부장이 당황하면서도 최재환을 질책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차 대표가 되레 묻는다.

“월말평가를 왜 해?”

“예? 이시현이 참석시키라고 대표님이······.”

“윤 부장··· 이시현이는, 애들 연기하는 거 평가 좀 해보라고 참석하란 거지, 내가 언제 이시현이 보러 월말평가를 받으라고 그랬어?”

“아······.”

“그리고, 이시현 팀이 시간이 나는지부터 확인해 보라고 했잖아? 얘기할 때 뭐 들었어?”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아이고. 최재환이.”

“예, 대표님.”

날카로운 차 대표의 시선과 단단한 최재환의 시선이 부딪친다.

“이제 됐지?”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벗어둔 웃옷을 챙겨 든 그가 다른 이들을 주르르 쳐다보고 말했다.

“다들 맘 편히 마시고, 오늘 다 스케줄 뺐지?”

“예.”

겨우 정신을 차린 윤 부장이 바로 일어나 대답했다.

“실컷 놀고, 알콜 충전들 하고, 내일 보자고.”

“예!”

차 대표와 박 상무가 테이블을 벗어난다. 윤 부장과 박용현, 최재환이 쪼르르 뒤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이제, 남자는 나밖에 남지 않았네···

‘춥네.’

찬바람이 쌩쌩 분다. 여자들의 화장품 냄새가 마치 쏟아지는 화살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때, 오소리가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을 일부러 모른 척했는데.

“그럼, 그렇게 결정이 나면 각자 파트너가 나뉘는 건데, 이시현 씨는 누구랑 같이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까 못한 선택의 연장, 이번에 정하라는 것이다. ‘자, 게임을 시작해 볼까?’ 하는 얼굴이다. 그래서 짐짓 모른 척, 최대한 수수한 미소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누구하고 커플이 되고 싶으냐고요. 저예요, 아니면 여기 권혜선 씨예요?”

이번에는 권혜선의 시선이 닿는다. 레니와 슬기의 시선은 덤.

잠시 가라앉았던 3W의 눈에서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다.

활활.

지금 그녀들은 오소리를 적으로 규정한 듯하다. 그리고 나란 놈은 그녀들에게 아군이 될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최소 3개월은 적군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하하······.”

나는 일단 미소를 보였다. 만약 내가 아무나 괜찮다고 하면 그녀들에게 있어 선택도 제대로 못 하는 남자가 되는 것이고, 누구 하나를 선택하면, 역시 아까의 생각대로 결론이 나는 것이다.

‘이 여자들 오늘 호구 제대로 물었네.’

하지만··· 너희들이 날 가지고 놀기에는 내가 좀 살아봤거든. 내게 있어 이런 상황, 그다지 어렵지 않지.

훗.

가소로운 녀석들.

“어차피 스토리상 둘 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오소리 씨와 연인이어도, 결국에는 오랜 친구인 혜선 씨에게 갈 거고,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거고. 확실한 건··· 저는 두 분 모두에게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표현할 거라는 거죠. 하하.”

어떠냐. 연륜과 경험을 통해 얻은 내 순발력이··· 이쯤 하면 대답이 됐다 싶은데.

“에이, 고것이 아니제.”

뜬금없는 사투리가 끼어들었다. 그 정체는 오소리의 스타일리스트.

‘오명숙이 너······.’

그녀가 계속 말한다.

“결국에는 우유부단 아니여? 확실하게 해야제. 고라고 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여. 오케이, 그럼 일단 정하고 시작혀. 지금 시현 씨는, 우리 소리하고 사귀고 있는 거고, 그라고 권혜선 씨는 시현 씨의 오랜 친구고. 자, 이제 시현 씨라면 어쩔 거여요?”

일주일 정도 연습한 것 같은 서울말과 사투리를 번갈아 구사하며 눈을 반짝이는 오명숙. 지금 그녀의 질문은 ‘오빠,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같은 류가 확실하다. 여기서 답을 제대로 해야 한다. 두뇌 풀가동이 필요한 시점인데.

“시현아.”

“어 형!”

마침 최재환이 식당에 들어온다. 나는 벌떡 일어나 의자에 앉으려는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일부러 큰 목소리로.

“뭐? 잠깐 나가자고?”

나는 무작정 최재환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

“훗, 우리 이 배우님 귀엽네.”

오소리는 샐러드 한 조각을 입에 물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레니가 다리를 꼬고 눈을 흘긴다.

“참, 못돼먹었다.”

“예?”

오소리의 시선이 레니에게 향하자, 이번에는 슬기가 나섰다.

“시현 오빠 마음도 참 착해. 아까 분명히 혜선 언니 쳐다보던데, 차마 말을 못하더라.”

“너도 그거 봤어? 난 아까 오빠가 혜선 언니 선택하면 소리 씨 민망해서 어쩌나 싶었는데.”

레니가 어깨를 으쓱 올린다.

그걸 지켜보는 오소리의 시선이 묘하게 웃고 있다.

“그렇게들 생각하셨구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네.”

“뭐라고요?”

“난 시현 씨하고 데이트도 했는데.”

“에?”

눈을 크게 뜬 슬기.

“저기요. 책임지지 못할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우리 내기할래요?”

여유 있는 오소리의 모습에 슬기가 콧바람을 흥! 내뱉는데.

“동생, 그만혀. 내가 정리할게.”

오명숙이 팔을 슥 걷어붙인다. 그러자 오소리가 그녀의 팔에 손을 얹고 말했다.

“언니, 고모가 함부로 힘쓰지 말라고 그랬잖아. 지난번에 누구야? 야구부 걔, 언니가 콧대 부러트려서 5백만 원 물어준 거 잊었어? 운동선수 티 내지 말라니까.”

둘의 대화에 레니가 피식 웃는다. 어디서 약을 판다는 듯 흘겨보며.

“지금 유치하게 힘으로······.”

시비조로 한마디를 뱉는데, 오명숙이 갑자기 제 입에 맥주병을 욱여넣는다. 뭔 짓인가 싶어 지켜보는 레니, 오명숙이 생니로 뚜껑을 따버리는 게 아닌가.

똑!

테이블 위를 구르는 병뚜껑에 3W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상태로 오명숙이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고는 꺼억! 그다음 입가에 흐른 것을 쓱 닦고··· 3W를 향해 한마디를 툭 던진다.

“그 짝들도, 한잔하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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