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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적 (3)
“그래서, 뮤직비디오 들어가는 거야?”
“응.”
권혜선은 거울 속 헤어디자이너와 눈을 마주하고 대답했다. 한두 해 본 얼굴이 아니기에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주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잘됐다.”
디자이너가 말 한마디를 뱉고 숨을 고루 내쉰다. 그 작은 코에서 새 나오는 숨소리처럼 손길도 조심스럽다. 헤어드라이어의 윙 소리, 빗이 훑고 지나가는 소리, 디자이너의 손에 머리카락이 닿는 소리··· 디자이너는 비단을 만지듯 권혜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럼 누구랑 하는 거야?”
“이시현.”
“아, 진짜?”
디자이너가 잠시 손을 멈추고 물었다. 분홍빛 화색이 돋은 그 얼굴을 본 권혜선이 못마땅한 듯 한쪽 눈을 찡긋한다.
“근데··· 최 매니저님, 여자 친구 없지?”
다시금 분주히 손을 움직이며 디자이너가 물었다. 그러자 권혜선이 눈썹을 올렸다.
“그건 왜?”
“최 매니저님 은근히 인기 많은 타입이잖아.”
“······.”
“우리 샵에도 매니저님 좋아하는 친구들 많을걸?”
“언니, 그만 얘기하자. 나 피곤해.”
“어? 어, 그래.”
디자이너가 입을 꾹 다문다. 권혜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괜히 보기 싫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오늘 스케줄이 뭐가 있더라. 음악 방송도 있고, 인터뷰도 있고, 예능 녹화도··· 생각이 안 난다. 기억이 꽉 막힌 것처럼.
다시 눈을 뜬 권혜선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용현 오빠!”
그녀의 목소리에 소파에서 잡지를 보고 있던 박용현이 서둘러 달려왔다. 아픈 매니저 욱이를 대신에 지원 나온 매니저인데, 잘생긴 편이라 회사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다.
“왜?”
다가온 그가 짙은 눈썹을 올렸다. 그런데 정작 그를 부른 권혜선은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가서 쉬세요.”
“배고파? 뭣 좀 사 올까?”
“아니라니까요.”
그녀의 얼굴이 식어간다. 그 모습이 더는 얘기하기 귀찮은 상태라는 것을 눈치챈 매니저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언니, 미안한데 나 이어폰 좀.”
“어, 여기.”
권혜선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시 눈을 감았고, 거울 속 디자이너와 시선이 마주친 박용현은 어깨를 으쓱 한번 올리고 다시금 소파로 향했다.
“요즘 까칠해졌다더니만··· 어?”
소파에 앉아 중얼거리며 잡지를 집던 그가 손을 멈칫했다. 유리문이 펄럭이고, 낯선 얼굴들이 샵에 들어온다. 최재환과 이시현이다.
박용현이 반가운 마음에 소파에서 일어서는데, 그보다 앞서 샵의 견습 직원들이 쪼르르 달려갔다.
“오셨어요, 오빠?”
“오빠는 무슨··· 너 몇 살이야?”
“스물둘이요.”
“넌 이제 나한테 삼촌이라고 불러.”
“치.”
유독 어려 보이는 견습 직원의 이마를 톡 건든 최재환. 피식 웃는 그의 곁에서 다른 친구들이 재잘재잘 떠들어댄다. 그 모습이 마치 곰 주변에 모여든 참새 떼들 같다고나 할까.
‘참, 저 형님 이상하게 사람들이 잘 꼬인단 말이야.’
박용현은 그 같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형님.”
한데 그를 본 최재환의 얼굴이 굳는다.
“너 왜 여기 있어?”
“예?”
“너, 나 여기서 못 본 거다. 입 뻥긋하면 알아서 해.”
“그게 무슨······.”
“누가 물으면? 최재환이하고 이시현 봤냐고 물으면?”
“···전 못 봤는데요.”
“그렇지.”
최재환이 흐뭇한 미소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뒤따르던 이시현이 박용현에게 눈인사를 하고 스쳐 간다. 달팽이관 모양의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을 박용현의 시선이 뒤쫓았다.
‘한숨 자려고 하나?’
샵의 4층에는 직원휴게실과 간이식당이 있는데, 가끔 매니저들은 피곤을 견디기 힘들 때면 그곳에서 꿀맛 같은 낮잠을 청하고는 했다.
“오늘 좀 이상하시네.”
박용현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 소파에 다시 앉았다. 그 자세로 잡지 한 권을 대충 훑어볼 즘에 권혜선의 메이크업이 끝났다.
‘와······.’
마주 선 그녀를 본 박용현은 순간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그저 청바지에 흰 티 하나 입었을 뿐인데··· 잡티 하나 없는 피부가 이런 거구나 싶다. 어깨를 덮은 긴 머리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 권혜선이 묻는다.
“왜요?”
“아니야.”
“근데 아까 누구 왔어요? 정신없던데?”
권혜선이 큰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이 난다.
“어, 곰이 한 마리 지나갔어.”
“곰?”
“아니야.”
고개를 붕붕 젓는 박용현. 권혜선이 뭐야, 하고 중얼거리며 그를 따라 샵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주차장에 온 그녀가 눈을 크게 뜨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카니발이다.”
그 한마디를 뱉고, 권혜선이 다시금 발길을 돌려 샵으로 돌아갔다. 박용현이 그녀의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본다.
“여기 최 실장님 왔죠?”
유리문을 다시 열고 들어온 그녀의 모습에 직원들의 시선이 닿았다.
“안 왔어요?”
재차 묻자 제일 어려 보이는 직원이 슬쩍 오른손 검지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권혜선이 제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계단을 밟았다. 성큼성큼 4층까지 올라간 그녀. 직원휴게실 문이 조금 열려있다.
“오빠, 저 할 얘기가··· 꺄!”
그녀는 곧장 다시 문을 닫았다. 지금 안에서 대체.
**
쾅! 소리.
나와 최재환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봤고, 최재환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지금, 뭐 지나갔지?”
“권혜선 씨인데?”
“혜선이라고?”
최재환이 갸웃하며 문으로 다가간다. 나는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형, 지금 웃통 벗었어.”
지금 최재환은 웃통을 벗은 상태고, 심지어 내게 달라붙어 내 셔츠를 벗기는 중이었다.
“아 맞아.”
우리는 라면을 하나 끓여 먹으려고 했고, 내가 셔츠에 국물을 흘려서 최재환이 급한 대로 자신의 옷을 벗어 나와 바꿔 입으려는 중이었는데, 그걸 권혜선이 보고 말았다.
끼익.
국물 묻은 내 셔츠를 대충 걸친 최재환이 문을 열었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에 누군가의 또각또각, 급하게 계단을 밟는 소리만이 들렸다. 최재환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들어온다.
“아, 쟤 또 소설 쓰겠네.”
최재환의 혼잣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만다.
권혜선은 내향적인 편인데, 슬기나 레니와 달리 조용한 편이다. 불만도 속으로 삼키는 편이고··· 그런 권혜선의 유일한 취미가 쉬는 날 집에서 순정만화 보는 거다.
“그러게 왜 갑자기 옷을 벗고 그래.”
내가 핀잔을 주자 최재환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한다.
“야, 그러게 누가 라면 국물 흘리래?”
투덜대는 최재환. 그런 그가 갑자기 멈칫한다.
띠리리. 띠리리.
휴대폰 벨 소리에 최재환의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꿀꺽 침을 삼키더니, 바지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어 휴대폰을 꺼낸다. 관자놀이에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
“차 대표다.”
최재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휴대폰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얼빠진 그 모습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잠적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뭘 저렇게 안절부절못한 지.
“이리 줘.”
내가 휴대폰을 뺏으려고 하자 최재환이 거부한다. 그런데 곱게 움직여야지, 통화 버튼은 왜 눌러?
“헉!”
놀란 최재환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거린다.
-어디냐?
“대표님! 저 최재환입니다!”
-알아. 너한테 전화한 거야.
“예··· 그렇죠.”
-싱겁기는. 어디야?
“저희 잠적하려고요.”
그 말에 나도 놀랐고, 최재환도 놀랐다.
최재환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나 싶은 얼굴이다.
-잠적?
순간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 봤고, 잠시 뒤 휴대폰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후후··· 알았으니까, 저녁에 밥이나 한 끼 하자. 기콘부하고, 매니저들하고 한번 뭉치게.
“모, 못 들으셨나 본데요, 저희 잠적했다니까요.”
-알았다고. 그러니까 저녁에 밥 먹자고.
“대표님, 저희······.”
-세 번 얘기할까?
용기를 가지고 한 번 더 튕겨본 최재환의 얼굴이 하얀 재가 돼 버렸다.
“어디로 갈까요? 저희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약속장소를 들은 최재환이 휴대폰을 귓가에서 뗀다. 그리고 지금 내 눈은 그를 무척 한심하게 보고 있다.
“형··· 쪽팔리지?”
“···어.”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최재환.
그나저나, 최재환의 옷이 왜 이렇게 헐렁한지.
근데 이 냄새는.
‘이게 그 유명한··· 오징어 냄새구나.’
옷매무시를 고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최재환이 주방에서 셔츠에 묻은 라면 국물을 닦고 있었다.
자신의 배우를 위해서 잠시의 생각도 않고 옷을 벗어 건네는 남자. 그가 차 대표의 전화를 받고 겁을 낸 것은 자신의 결정에 배우가 다칠까 봐 그랬을 거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 요즘은 너무 잘 알 것 같다. 세상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준 적이 없는데··· 눈앞의 최재환은 나를 진심으로 대해준다.
“형, 우리 옷 사러 가자.”
“뭐?”
그가 뒤돌아 나를 보고 뭔 소리냐고 묻는다.
“잠적은 끝났으니까, 옷이나 사러 가자고.”
“옷을 왜 사? 코디 놔두고··· 필요한 거 있으면 송이한테 문자 보내. 내일 출근하면 얘기하던가.”
“내 옷 말고, 형 옷.”
“뭐?”
“자꾸, 뭐? 뭐? 할래? 형 옷 사주겠다고. CF 계약금 받은 거로, 내가 내 매니저 옷 사준다고.”
“자식, 됐어 임마.”
최재환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쭈글쭈글해진 내 셔츠를 입고 단추를 잠근다. 그 모습에 한숨이 나와서 나는 그의 팔을 애원하듯 잡아당겼다.
“궁상맞게 이러지 마시고, 나 진짜 형한테 선물 한번 해주려고 그래.”
“아이 자식. 왜 이래 갑자기.”
“가자.”
나는 최재환의 어깨에 기대서 엉겨 붙었다.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인데, 아무튼 내가 나한테 이러고 있다.
“어? 가자? 가자니까?”
“아 자식······.”
최재환이 못 이기는 척 나를 따라온다. 계단을 내려가자 최재환에게 엉겨 붙어 있는 나를 다들 쳐다본다. 그중 원장이 우리를 발견하고 쪼르르 다가왔다.
“최 실장님, 언제 왔어?”
원장이 생글생글 눈웃음을 보인다. 과도한 그녀의 접근에 최재환이 뒤로 한발 물러나며 대답한다.
“잠깐 휴게실 좀 썼어요. 근데, 남자 휴게실은 창고야? 청소 좀 해요.”
“빗자루라도 사다 주고 그런 소리를 하셔. 그나저나··· 재환 씨가 볼 때, 내 코 어떤 것 같아?”
“예?”
뾰족한 코를 들이미는 원장. 더 뒤로 물러나는 최재환.
“한번 잘 봐, 재환 씨는 애들 많이 보잖아? 내 코 어떠냐고. 어때? 손 좀 댈까?”
“뭐야, 연예인은 나보다 원장님이 더 많이 보잖아요?”
“아이, 재환 씨는 캐스팅 디렉터였잖아.”
“디렉터는 무슨. 아 일없어요.”
최재환이 원장을 밀어낸다. 그러자 그녀가 이번에는 나를 본다.
“시현 씨는 어떤 것 같아?”
이 여자, 참치 캔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을 하고 있다. 가만···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누가 고양이를 키웠었는데. 누구였더라.
나는 문득 스쳐 간 잡생각을 뒤로하고 원장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신중하게, 그녀의 코를 잠시 본 뒤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지금도 예뻐요. 손대지 말아요. 손대면 거북할 것 같아.”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글동글 뜨고 환한 미소를 띤다.
“진짜?”
“예.”
진짜지 그럼. 당신 그거 수술하면, 나중에 개고생하거든? 내가 봤거든? 엉망이었거든?
말 한마디에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일 터. 아무튼.
“형, 가자.”
“아 자식 진짜.”
피식 웃음을 터트린 최재환. 우리는 지금, 옷 사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