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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적 (2)
“너··· 이 자식.”
김 팀장의 벌어진 입술 틈에서 뭉개진 소리가 나온다.
“저 회사와 계약한 배우입니다.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연기자한테 이 자식, 저 자식 했습니까?”
내가 회사의 대표가 되고 제일 먼저 바꾼 건, 직원들이 소속 연기자를 대하는 호칭이었다.
‘이’, ‘야’, ‘너’ 같은 지칭 대신에 누구누구 배우, 누구누구 작가, 누구누구 씨라고 존칭을 붙이게 했다.
회사에서 연기자를 대우해줘야 연기자도 회사를 존중해준다는 나만의 신념이었다.
“손 안 놔?”
떨리는 김 팀장의 눈동자가 고스란히 보인다. 두려움이 아닌 당혹감이 그의 사고를 일시 정지 시킨 게 분명하다.
그래, 이제야 좀 주변이 들어오나 보지?
네 앞에서 까이던 누군가는 항상 그런 감정이라는 걸 명심해라, 이 x만 한 놈아.
고작 의견 몇 마디 뱉었다고, 그게 많은 사람 앞에서 삿대질을 받을 만큼 잘못한 일이냐?
‘이 어린놈을 그냥······.’
쏟아붓고 싶은 많은 말들이 목 언저리에서 넘쳐났지만,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여기서 더 나가면 최재환이 곤란해진다.
“왜 내 매니저 기를 죽입니까? 그냥 좋게 말씀하셔도 되잖아요?”
“이시현··· 너 이 새끼 많이 컸다?”
김 팀장이 뱉은 단어들에 내 이마가 꿈틀댄다. 우리를 지켜보는 윤 부장이 아니었으면, 아마 내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을 것이다.
“잘들 한다.”
이제야 직원들 틈에서 나온 윤 부장이 혀를 찬다. 나는 붙잡고 있던 김 팀장의 손목을 놓았다.
“이시현 빼고 니들 셋, 내 사무실에 가 있어.”
고개를 숙인 세 사람이 벌게진 얼굴로 움직이자, 윤 부장이 직원들에게 외친다.
“여기가 도떼기시장이야? 다들 구경났어?”
뿔뿔이 흩어지는 직원들 뒤로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자 윤 부장이 미간을 좁히며 쳐다본다.
“이시현이 너는 5층 가서 성시원 팀장 찾아가 봐.”
“5층이요?”
“가면 알 거야.”
“예.”
윤 부장이 뒤돌아선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굳어 있는 내 얼굴이 차가운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다.
‘이제 머잖아··· 태풍이 오겠지.’
지에스엔터테인먼트는 많은 게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와 재계약을 했다. 최재환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
“저, 실례합니다.”
나는 기획콘텐츠개발부서의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앞으로도 쭉 그렇겠지만, 이곳은 여자들만 있는 부서라서 입구부터가 화사하다.
주르륵 놓인 화분들, 벽에 붙은 알록달록한 스티커들.
물론 그 때문에 내가 매번 잔소리를 했다.
저런 것 좀 하지 마라, 남들처럼 평범하게 꾸며라, 여기는 대체 왜 이러냐, 등등.
아무튼,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 보이는 파티션으로 다가갔다. 슬쩍 고개를 넘겨보니, 한 아가씨가 주근깨 가득한 통통한 볼을 움직이며 과자를 깨물고 있다. 오물오물.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고개를 든 그녀가 깜짝 놀란다.
“아, 아, 아.”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서둘러 투두둑 치우는 그녀 모습. 입안에 남은 과자를 꿀꺽 삼키고 다시 나를 본다.
“컥컥.”
어이구··· 가지가지 한다.
나는 서둘러 정수기에서 물을 떠서 그녀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아, 예.”
허둥지둥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백유진, 넌 늘 그대로였구나.’
한결같은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늘 허둥대는 모습.
그런 생각을 하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성시원 팀장님 뵈러 왔는데요. 윤 부장님이 가보라고 해서.”
“아, 잠시만요.”
멜빵바지의 백유진이 아기처럼 뒤뚱뒤뚱하며 창가에 있는 팀장 사무실로 들어갔고, 잠시 뒤에 안경을 쓴 여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나를 훑는 눈빛이 제법 날카롭다.
‘성시원 팀장.’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내 편이니까.
다른 누구의 편도 아닌, 그녀는 나 최재환의 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시현입니다.”
“아이고, 무슨 인사를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그녀가 수더분한 미소를 보이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 힘껏 뻗은 그녀의 손이 따뜻하다.
“시현 씨, 오랜만에 보내. 지난번··· 어?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진짜 오랜만에 보네?”
성 팀장이 나를 오랜만에 본다는 것은, 이시현을 기준으로 얘기하는 걸 테지.
“일이 없었잖아요.”
“뭐, 아무튼 요즘 좋은 소식 많이 들리더라.”
“덕분에요.”
“내가 한 게 있나. 최 실장님 덕분이지. 뭐 마실래요?”
“커피요.”
그녀가 나를 회의실로 데리고 가며 통통한 아가씨를 돌아본다.
“삐삐, 커피 두 잔 부탁해.”
성 팀장의 부탁에 주근깨 백유진이 쀼루퉁 입술을 내민다.
“아, 내 정신 좀 봐. 시현 씨 못들은 걸로 해줘요. 저 애 별명이 삐삐인데, 남 앞에서 그 소리 하면 싫어하거든.”
속삭이는 성 팀장. 고개를 끄덕이는 나.
하긴 나도 매번 삐삐라고 놀렸다가 한번 회식자리에서 된통 당한 적이 있다.
백유진이 술에 진득이 취해서는 대표인 나를 삿대질하면서, 삐삐라고 부르면 가만히 안두겠다며 내 입술을 붙잡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직원이 달라붙어 말렸는지.
“유진 씨 부탁해. 후후.”
성 팀장이 가볍게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갔고, 뒤를 따르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어?’
삐삐가 나를 힐끗 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정수기로 다가간다.
‘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이상하게 마음에 걸린다.
“시현 씨.”
성 팀장이 멈춰 있는 나를 부른 이때, 사무실 유리문이 열리고 누군가 성큼 들어왔다. 그 얼굴, 강 실장이다.
“성 팀장님, 할 얘기가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로 인해 성 팀장의 얼굴이 굳었다. 불청객을 대하듯 적의가 보인다. 그런데, 나는 또 그 모습을 보면서 당황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의 결혼식 사회를 내가 봤으니까.
“무슨 얘기요?”
성 팀장이 묻는다. 누가 봐도 귀찮은 표정으로.
“오소리 내일부터 보름 동안 스케줄 조절하는 거 알고 계시죠?”
“예, 알고 있어요.”
“다음 주부터 제가 윤 부장님 도와서 오소리 케어하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 하실 거 있으면 저한테도 알려달라고요.”
“어차피 부서회의 거치잖아요? 그때 알려드릴게요.”
“아니 제 말은, 긴급으로 넘길 것도 있잖아요. 기콘부 일 처리 제가 모릅니까? 저한테도 전화 한 번 주시라고요.”
나는 둘의 대화를 그저 지켜만 봤다. 삐삐도 내 곁에서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두 사람의 대화, 정확히는 싸움을 지켜본다.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팝콘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 기분은 뭘까.
아무튼 저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정이든 모양이다.
“예, 알겠어요. 또 하실 얘기 있어요?”
“없어요.”
얘기가 끝났지만 강 실장은 찝찝한 표정이다. 고개를 휙 돌린 그가 나를 슥 쳐다보고는 누구 들으랍시고 한숨을 푹 내쉬며 사무실을 나갔다.
“어휴.”
성 팀장의 시선이 유리문에 꽂혀 있다. 별꼴이야, 재수 없어, 확 그냥··· 그녀에게서 들리지 않는 숱한 무언의 분노가 쏟아지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들어가요.”
회의실로 들어가 앉아있자, 잠시 뒤 삐삐가 플라스틱 쟁반에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다가 서 있는 그녀를 반사적으로 눈에 담았다.
‘B87 W60 H88.’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인데, 하도 많은 연습생을 키우다 보니 스쳐봐도 치수가 계산이 되는 눈이 돼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뭔가 변태적인 건 아니고, 그냥 직업병이다.
“저기, 맛있게 드세요.”
삐삐가 나를 향해 싱긋 웃는다. 회식자리에서 내 멱살을 쥐던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건만, 지금은 그녀가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다. 아··· 부담스럽다.
“삐삐야, 너 뭐 하니?”
성 팀장이 회의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 나가보겠습니다.”
물러나는 그녀의 모습에 성 팀장이 고개를 내젓고 나를 본다.
“애는 착해요.”
“예, 그럴 것 같아요.”
“그럼, 우리 시작할까요.”
그녀가 바인더를 펼친다. 그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서류와 카탈로그, 계약서와 같은 인쇄물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
“그래서, 위에서 그렇게 결정이 났어요.”
얘기를 마친 성 팀장은 지금 무진장 어려운 말을 꺼낸 것이라는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봤고, 미소로서 그녀의 얘기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러자 달칵··· 달칵.
성 팀장이 볼펜 꼭지에서 손을 떼고 내 미소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올린다.
“시현 씨, 표정 진짜 좋아졌네. 뭐지?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 어라, 그럼 큰일인데? 우리 긴급회의 들어가야 해.”
“하하, 여자 친구는 없고요······.”
대충 대답을 하는데,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기콘부 사무실 문이 열리고 최재환이 들어왔다. 나는 그를 곁눈질하며 성 팀장 들으라고 속삭였다.
“여자 친구보다 더 깐깐한 사람이 저기 오네요.”
그녀가 최재환을 바라본다. 성큼성큼 다가온 최재환의 얼굴이 무미건조하다. 그가 회의실로 들어와 성 팀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의자를 빼서 내 곁에 앉았다.
“바이바이에서는 뭐랍니까?”
바로 본론에 들어간 최재환. 여유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성 팀장은 바인더를 거꾸로 돌려서 내밀었다.
“오늘 아침에 제가 바이바이 들렸다가 왔어요. 대표님 지시사항··· 그리고 이건, 바이바이와 미팅한 거 정리한 파일이고요.”
“대표님이요?”
“그러게요. 어젯밤에 전화가 와서 회의 어떻게 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러이러했다고 하니까, 그냥 다이렉트로 지시하셨어요. 회사로 출근하지 말고 아침에 바로 바이바이에 들려서 미팅하고 오라고.”
“그래요?”
아마도 바이바이 민 팀장이 최재환에게 전화를 해오기 이전에, 이미 차 대표는 내용을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결론이 내려졌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잠시 그 생각을 하는 사이에 성 팀장은 계속 얘기했다.
“아무튼, 우선 나눈 얘기가 3분기에 출시될 음료수를 바이바이 CF 2탄으로 기획해서 찍자고 하네요.”
“···이건 뭡니까?”
최재환이 바인더를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성 팀장이 눈썹을 들썩이며 그의 손끝을 확인했다.
“아, 방송 출연인데··· 그건 확정은 아니고, 조율하려고요.”
“조율이요?”
최재환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 KIS 일요일 예능프로그램인데, 연예인들이 팀 짜서 운동하는 거······.”
“알아요, 드림팀 얘기하시는 거잖아요? 거기에 무슨 시현이가 출연합니까?”
“바이바이가 드림팀에 음료수 협찬하는데, 시현 씨가 그 옷 입고 음료수 배달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면 어떻겠냐는 거죠.”
“이 여자가 정말.”
최재환이 아랫입술을 성큼 깨문다. 그러자 놀란 성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성 팀장님 말고요. 바이바이 민다영 팀장··· 하, 미안해요. 잠깐 실례할게요.”
최재환은 바로 사과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들어온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아무래도 1팀장과의 트러블이 데미지가 큰 모양이었다.
“왜 저래?”
성 팀장이 헛바람을 뱉으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그러게 나도 미치겠네요, 라고 동조하지는 못하겠고. 아무튼.
“일단, 저는 방송 출연은 안 할게요.”
“어?”
그녀가 최재환에 대한 생각을 지우기도 전에 나는 정리를 시작했다. 성 팀장의 얘기로는 차 대표가 바이바이에 최대한 협력할 것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배우는 나니까.
“행사 같은 것도 전부 빼주세요. 저는 바이바이 CF 2탄만 들어갈게요.”
“아··· 매니저하고 우선 얘기를······.”
“계약 당사자는 저잖아요? 재환이 형은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미소를 보였다.
“그럼 부탁드려요.”
밖으로 나가니 문 앞에 있던 삐삐가 뒤로 서둘러 물러난다. 이시현의 키 180센티미터 후반. 삐삐의 키 160센티미터 초반.
한 뺨 아래서 올라오는 화장품 냄새와 동글동글한 눈, 붉은 입술.
“유진 씨도 수고하세요.”
“아, 예. 어? 제 이름 어떻게······.”
그녀를 뒤로하고 유리문을 열자, 복도를 돌아오던 최재환이 나를 보고 멈칫한다.
“왜 나왔어?”
“얘기 다 끝났어. 이거.”
나는 성 팀장의 바인더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차 대표님이 다 결정했더라. 일단 CF는 한다고 했고, 다른 건 안 한다고 했어.”
최재환이 눈을 깜박인다.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잘했다.”
그 밖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차 대표의 결정이 떨어진 순간 어차피 최재환은 끼어들 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회사와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 안에는 배우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조항이 붙어있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슬슬 중심을 잡을 생각이고.
“시현아, 성 팀장 화났디?”
바인더를 손에든 최재환이 나를 보고 물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나는 손을 휙 젓고 최재환의 등을 밀었다. 엘리베이터로 고고.
우리는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요즘에는 정문으로 다니지를 못하고 있다. 지난번 차 대표가 애들과 사진 찍는 것을 그만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들리는 얘기에는 그걸 못마땅해 하는 몇몇 배우와 가수가 있다고 한다. 나댄다나 뭐라나. 그러는 지들은 얼마나 잘났다고 내 행복한 생활에 태클이람.
“형.”
손가락에 차키를 걸어 빙빙 돌리며 걷는 최재환을 보다가 그를 불렀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멈춰서 돌아본다. 나는 물었다.
“속은 괜찮아?”
“아······.”
그제야 최재환은 자신의 배를 슥 만졌다. 김 팀장과 싸운 이후 정신이 나가서 아픈것도 잊은 모양이다.
“밥 먹고 가자.”
내 말에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석에 오른 그는 곧바로 근처의 순대국밥집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국밥집에 들어가자 풍채 좋은 여사장이 우리를 반겼다.
“왔어?”
“예, 또 왔어요.”
내가 꾸벅 인사를 하자, 그녀가 내 등을 팡! 내려친다. 아이구야. 그녀는 최재환의 등도 팡! 내려쳤다.
“최 실장은 왜 이렇게 처져 있어?”
“밥이나 줘요.”
최재환이 퉁명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께름칙한 얼굴로 장난치듯 말했다.
“어이구, 무서워라. 이거 완전 남처럼 구네.”
“그럼 우리가 남이지, 가족입니까? 아니면 밥 공짜로 주던가?”
그 말에 그녀가 바로 자세를 바꾼다.
“손님, 뭐 드시겠습니까?”
“으이구.”
최재환이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컵이 딱딱 놓이고 물 한 통이 올라온다. 최재환이 물을 따르고, 내가 수저를 세팅.
“하, 한잔 당기네.”
최재환이 혼잣말을 뱉고 피식 웃는다. 하긴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이 딱이지.
“그나저나, 1팀장님 왜 그런 거야?”
내가 묻자 최재환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얘기를 꺼냈다.
“너, 혜선이하고 뮤직비디오 찍어야 한다더라.”
“알아, 아까 부장님이 그러던데?”
그 말에 최재환이 이마를 찌푸린다. 그건 못들은 모양이었다. 내 눈을 보더니 한숨을 쉰다.
“진짜, 자꾸 이러시네.”
최재환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저 미소, 뭔가 상황이 컨트롤 되지 않을 때 나오는 미소다.
평소의 최재환을 1단계로 친다면, 화를 내며 표정을 드러내는 건 2단계, 그다음 상태가 저 미소다. 흔한 말로 3단계 변신 직전이며 수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상태인데, 이때는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편이다.
“시현아.”
“응?”
“너 계약서 쓴 날,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하지?”
최재환은 그날,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 이제 나는 너를 무조건 믿을 것이고, 너도 나를 믿어라. 그리고 회사와 계약을 했고 소속은 됐지만, 회사와 너는 물과 기름이라고 여겨라.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대충 몇 가지로 짐작할 수 있었다. 최재환은 회사를 온전히 믿지 않으며, 언제든 부딪칠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
지난번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차 대표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을 가진 최재환이지만, 인간적인 감정과 일에서의 판단은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가리고 있었다.
“뭣들 그렇게 속닥속닥이야?”
순대국밥을 가져온 여사장이 두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깍두기를 비롯해 반찬들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그녀. 최재환이 깍두기를 깨문다.
“역시, 국밥집은 이 깍두기 맛을 봐야 한다니까. 이게 맛있어야 맛집이지.”
“파김치하고 젓갈은 또 어떻고? 이 색 봐봐, 이 조합이 끝내준다니까.”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가게 PPL을 잠깐 해주고, 우리는 먹는 데 집중했다. 땀을 쏙 뺄 정도로 정신없이 먹고 나서야 최재환이 빵빵해진 배를 쓸어내리며 물 한 컵을 뚝딱 비웠다.
“후······.”
“후······.”
배가 부른 채로 서로를 마주 본다.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 뒤로 최재환이 나를 부른다.
“시현아.”
“응.”
“우리 잠적하자.”
“뭐?”
그러더니 최재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꺼내 들며 그가 콧노래와 함께 속삭인다.
“바다를 갈까, 산을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