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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적 (1)
「2000년 7월 21일 금요일」
지에스엔터테인먼트 청담동 사옥.
시동이 꺼진 차에서 희미한 들썩임이 느껴진다.
“일어나, 다 왔어.”
나는 차키를 뽑고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바라봤다. 최재환이 목을 북북 긁으며 뒤척이고 있다. 어제 회사 직원이 술에 취한 그를 내 오피스텔로 데리고 왔고, 나는 오늘 그를 태워 회사에 출근했다.
술에 취한 매니저를 모시고 다니는 배우라니······.
차 대표가 알면 난리가 날 것이다.
“형.”
재차 불러도 최재환이 눈을 뜨지 않고 뒤척이기만 한다.
“어, 차 대표님이네?”
“어? 어디?”
그제야 최재환이 눈을 힘껏 뜨고 주위를 돌아본다. 벌겋게 충혈 된 눈을 보니 간밤에 꽤 많이 마신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최재환의 모습에 내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니 말 다했지.
“벌써 지나가셨어.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에이, 자식······.”
최재환이 초췌한 얼굴의 반을 채운 까슬까슬한 수염을 쓸어내린다. 마른세수를 하는 그에게서 별의별 냄새가 흘러나온다. 안 되겠다. 사무실 올라가면 가글부터 시켜야겠다.
“누구랑 그렇게 마셨어?”
“그냥··· 그냥 좀··· 타이밍이.”
“타이밍?”
“됐어, 그런 게 있어.”
더 말하기 싫은지 최재환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나도 뒤따라 쫓아갔는데, 그는 얼마 못 가 허리를 들썩였다.
“우웩!”
쯧쯧.
“괜찮아?”
등이라도 두드려줄까 싶어 물었지만 최재환이 겨우 숨을 토하고 다시 걷는다. 그러더니 괜찮다며 검지를 흔들어대는데.
“문제없거든··· 욱욱!”
“어이구.”
나는 미련한 곰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지하 주차장까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벽에 기대고 어제의 전화를 떠올렸다.
“형, 어제 전화 왜 안 받았어?”
“무슨 전화?”
구겨진 등을 편 최재환이 눈썹을 올리고 되묻는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는 카페가 있는 2층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런 뒤 엘리베이터 손잡이에 엉덩이를 걸터앉고 뒤이어 타는 최재환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현승아 씨 회사에서 노병기라는 사람이 나한테 전화했더라고. 형이 내 번호 알려준 거 아니야?”
“노병기? 노병기 본부장 말이야? 아닌데, 나 연락받은 거 없는데?”
“그럼, 누가 내 번호 알려준 거야?”
“그러게. 이상하네······.”
최재환은 고개를 치켜들고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상태에서 살짝 눈을 흘겨 나를 보고 묻는다.
“뭐라는데?”
“현승아가 나하고 저녁 한번 하자고.”
“그래? 그 여자 뭐야. 네 얼굴 어제 처음 봤잖아?”
“아무튼 형은 아니라 이거지? 그럼 거절할까? 연락 주겠다고 했는데.”
“거절해. 그 회사 안 좋아. 우욱··· 근데··· 하······. 속 쓰려 죽겠네.”
“근데 뭐?”
“내가 노병기 본부장한테 빚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빚?”
“뭐··· 그런 게 있어.”
“뭔데?”
평소답지 않게 내가 다시 묻자, 최재환 역시도 평소와 다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꺼냈다.
“한송이 때문에.”
“한송이?”
“걔, 여기 오기 전에 노병기 회사에 있었거든.”
“근데?”
“후······. 너만 알고 있어.”
이렇게 말하니까 또 뭔가 있어 보인다. 무게를 잡은 최재환이 곁에 온다. 나는 서둘러 손을 뻗었다.
“형, 입 냄새 나니까 거기서 얘기해.”
접근금지명령에 최재환이 치사하다고 투덜댄다. 내게 투정부리듯 헛발질을 하고 나서 얘기를 잇는다.
“사실 한송이가 프리가 아니더라. 노병기 회사, VVW에 소속된 스타일리스트더라고. 노병기가 나한테 직접 전화했어, 한송이 다시 돌려보내라고.”
“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놀라서 눈만 깜빡인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 도착했고, 카페 직원이 맑은 미소를 띠고 우리를 반긴다. 블랙커피 2잔.
“그래서 어떻게 됐어?”
“박 상무님이 정리해줬어.”
“박 상무님이?”
카리스마 박.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한송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걔 왜 그랬대?”
그런 계약을 했으면서 왜 여기에 왔을까. 계약서라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게 아닌데, 가벼운 종이 한 장에 인생이 담기는데.
“한송이, 한 달에 50 받고 일했다더라.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신다고 하고.”
최재환은 그 말을 끝으로 또 배를 부여잡았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커피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최재환이 4층 버튼을 꾹 누른다. 그 사이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든다.
‘노병기.’
어제 나는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조각조각 흩어진 인생의 숱한 기억들을 떠올려봤다. 그 결과 통화를 했던 노병기에 대한 기억도 떠올릴 수 있었다.
‘쓰레기 노병기. 이간질 노병기.’
내가 그 인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노병기가 훗날 나를 한번 엿 먹이기 때문이다. 계약 연장을 해야 할 배우가 있었는데, 배우와 나 사이에서 이간질을 한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확실하게 갚아줬다. 노병기가 방송가에 발도 못 붙일 정도로 아주 작살을 내줬으니까.
“형, 그럼 그것 때문에 그동안 송이한테 팥쥐 역할 한 거야?”
콩쥐는 한송이. 팥쥐는 최재환.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상단의 숫자 표시등을 바라보고 있던 최재환이 눈을 찌푸리고 나를 돌아본다.
“뭔 소리야? 말했잖아, 그건 정리했다고. 하지만 실력 없으면 관둬야지. 아무튼, 내가 노병기한테 전화해볼게. 그러고 나서 얘기하자.”
최재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4층에서 내렸다.
“어이 최재환이!”
사무실에 발을 딛기 무섭게 윤 부장이 우릴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러자 최재환이 성큼성큼 윤 부장에게 다가간다. 나도 그 뒤를 따랐고.
아침부터 윤 부장이 얼굴이라니··· 근데 이 양반 살만 찌는구나.
“한송이는?”
윤 부장이 최재환의 커피를 빼앗아 들며 우리 옆을 보고 묻는다.
“오늘 병가입니다.”
“무슨 스타일리스트가 병가야?”
“아픈 애 끌고 다니는 게 더 힘듭니다. 그래서 쉬라고 했습니다.”
“얌마, 누구는 안 아파서 일하냐?”
윤 부장이 최재환을 핀잔한다. 오리 주둥이를 빼죽 내밀고 있다. 아마 최재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 주둥이를 그냥 확.
“남의 집 귀한 딸인데, 아프면 쉬게 해줘야죠.”
최재환이 목을 끅끅거리며 대답한다. 아무래도 곧 한번 화장실로 달려갈 듯한데. 아니나 다를까.
“우욱!”
“야, 너 왜 그래?”
윤 부장이 놀라 물러난다. 그의 처세술만큼이나 빠른 뒷걸음질.
“죄, 죄송합니다.”
최재환이 화장실로 달려간다. 저돌적인 자세로 사무실을 뛰쳐나가는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으니 진정 곰이 따로 없다. 복사기 옆에 있던 사무실 직원이 놀라 눈을 깜빡인다.
“야, 쟤 왜 저래?”
윤 부장이 나를 돌아보고 묻는다.
“잘 모르겠는데요.”
“자식, 술을 어디서 저렇게 마셨대. 아무튼, 너 뮤직비디오 들어가기로 했거든?”
“뮤직비디오··· 요?”
의외의 얘기다. 윤 부장은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끌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 나를 소파에 앉힌다.
“일단 앉아봐, 그리고··· 어디 보자.”
책상을 뒤지더니 CD 케이스를 손에 집는다. 사무실 책장 옆의 오디오가 입을 벌린다. CD를 넣은 윤 부장이 나를 돌아봤다.
“보이스레이드 알지?”
알다마다. 혼성듀엣인 보이스레이드는 2000년 해체 후 각자의 길을 간다. 이후 2015년에 불어 닥친 복고 열풍에 힘입어 재결합을 한다.
당시 보이스레이드가 방송활동을 위해서 찾은 기획사가 바로 나 최재환의 ‘정’ 엔터테인먼트.
‘그러고 보니 걔들 올해 해체하네.’
내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윤 부장이 다시 얘기를 잇는다. 뭐라고뭐라고 하는데, 그 사이 오디오 스피커에서는 묵직한 저음과 함께 보이스레이드의 신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 이 노래··· 활동 시작도 못 하고 해체했었는데.’
기억이 난다. 보이스레이드의 재결합 과정에서 그들의 이력을 다시 살펴봤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난다.
“그래서 이게 보이스레이드 신곡이야. ‘너라서’ 제목 괜찮지?”
“너라서.”
“그래, 이게 어떤 내용이냐면······.”
윤 부장이 곡 해석을 하려 했지만 내 입술이 먼저 움직인다.
“풋풋한 남녀. 오랜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 하지만 어느 날부터 서로를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느끼게 되고, 그러나 고백을 하면 친구 사이도 깨질까 봐 망설이는 남녀의 마음.”
“어라?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윤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다. 나는 오디오를 가리켰다.
“지금 들리잖아요.”
그러자 윤 부장이 팔짱을 한 채 책상에 오리궁둥이를 붙이고 감탄한다.
“이야, 역시 배우는 배우야. 어떻게 그렇게 확 느끼지? 감정이 느껴지나? 그런 거야?”
손을 까딱대면 제 가슴을 두드리는 윤 부장. 하여간 저 깐죽.
“뭐··· 그냥.”
“아무튼, 고거 찍기로 했어. 문제없잖아?”
이제 나는 회사에서 하란다고 무조건 해야 하는 신분은 아니다. 최소한 한번은 튕겨볼 수 있다. 그런데 웬일로 윤 부장이 알아서 내 눈치를 살피며 의견을 물어오니 낯선 기분이다. 저런 인간이 아닌데.
“예, 재환이 형하고 상의해 볼게요.”
나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 깍지 낀 손을 내려다봤다. 바이바이의 제안과는 다른 경우다. 뮤직비디오 촬영이야 날 잡아 하루면 될 것이고, 콘티를 봐야겠지만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닐 테니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
윤 부장이 오디오 리모컨을 누르자 오디오가 다시 입을 벌려 CD를 뱉어낸다. 그는 CD를 거두고, 창문을 열었다. 스킨 냄새와 담배 냄새가 확 풍겨온다. 날씨가 참 좋다.
“이거, 여자 배우도 있거든? 그래서 권혜선이 같이 하기로 했어.”
“권혜선 씨요?”
내가 고개를 들고 윤 부장을 쳐다볼 때였다. 밖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고함이었고, 소란스러웠다. 그러자 윤 부장이 사무실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며 바로 얼굴을 찌푸린다.
“뭐냐?”
“글쎄요······.”
윤 부장을 선두로 사무실을 나왔다. 직원들이 파티션 밖으로 너도나도 고개를 빼 든다. 일부는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야, 뭐야?”
“1팀장님이랑 최 실장님이 싸우고 있어요.”
파티션 너머의 여직원이 대답했다.
“뭐?”
윤 부장이 눈을 찌푸리고 움직인다. 나도 걸음을 서두른다. 얼마 못 가 복도에서 직원들이 끌어안아 말리고 있는 1팀장 김태호와 그 앞에서 화를 삭이고 있는 최재환을 볼 수 있었다. 김 팀장이 최재환에게 삿대질을 한다.
“야 임마! 네가 뭔데? 권혜선이가 연기를 하네 마네 난리야? 2팀은 무슨 철옹성이야? 가수가 연기 좀 하면 안 돼? 그럼 뭐 하러 바쁜 애들 스케줄 빼서 연기레슨 받는데? 왜? 니들 보고 책임지라고 할까봐?”
“말씀드렸잖습니까? 혜선이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연기로 힘 빼냐 이 말입니다.”
“이 새끼가 아직도 입이 살았네. 그러니까 니가 뭐냐고? 니네 2팀, 은근히 가수 애들 무시하는 거 내가 한번 날 잡아 얘기하려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현장 땜빵도 안 나오려고 하고··· 니네 뭐하는 새끼들이야?”
심각해 보이는 상황과 달리, 뜻밖에 윤 부장이 나서지 않고 둘을 지켜보고 있다. 이때 비상문을 열고 2팀장 조진수가 튀어나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조 팀장은 김 팀장이 아닌 최재환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고, 최재환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입술만 깨물고 있다.
“뭐긴 뭐야? 눈 안 보여?”
김 팀장이 눈을 부릅뜨고 대꾸 했지만, 조 팀장은 그를 보는 대신에 여전히 최재환을 타박했다.
“넌 이 새끼야, 왜 병신처럼 여기서 욕 처먹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 모습에 김 팀장이 헛바람을 내쉬더니 욕을 뇌까린다.
“니들 뭐하는 거야? 나 들으라는 거야, 뭐야?”
그러더니 육두문자를 나직이 속삭였다. 그제야 조 팀장이 눈을 돌려 김 팀장을 노려본다.
“형님, 애를 깔 거면 사람들 없는 데서 까던가, 아니면 나를 거쳐야죠. 그리고 씨발이요?”
“뭐? 너를 거쳐? 네가 뭔데?”
1팀장 김태호, 2팀장 조진수.
두 앙숙이 붙었다.
그리고 나는 이 둘의 싸움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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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매니저들끼리 크게 다툴 일이 없다. 가뜩이나 방송국가면 눈치 보고 사는 인생들인데, 회사 안에서도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지에스엔터테인먼트도 설립 초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회사가 몸집을 불리고, 체계가 잡히고, 외부 인사들이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긴다. 몇몇 인사들이 낙하산처럼 내려오게 되면서부터다.
2팀장 조진수는 설립 초기 멤버이고, 1팀장 김태호는 기획콘텐츠 개발부서를 담당하는 변혜경 이사의 사람이다. 그렇다고 윗사람들이 사이가 안 좋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저 아랫사람들끼리만 치고받는 것이다.
2팀장 조진수는 원래 1팀장이 될 동기가 회사를 그만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 반면 1팀장 김태호는 자신이 조진수보다 나이도 많겠다, 낙하산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더 날뛰는 것이다.
나는 이걸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시현이 내 곁을 떠난 이후, 내가 몬스터 프로젝트 때문에 일본에 가 있는 사이에 회사가 분열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이 외부로 나가게 된다. 머잖아 지에스엔터테인먼트는 오로지 배우만을 매니지먼트 하는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게 아마 내년쯤인데.
‘그 덕에 내가 최대 수혜자가 됐었지.’
내가 당시를 떠올리는 사이에도 김 팀장과 조 팀장의 말다툼은 계속됐다. 최재환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두근두근··· 내 심장에 열이 오른다. 나는 사람들 틈을 가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형님, 최재환이가 3W 그렇게 도와주는데 그러시면 안 되죠!”
“뭐가 안 돼? 겨우 이틀 땜빵해준 거 가지고 생색이야?”
김 팀장이 최재환에게 삿대질한다. 파리가 앵앵거리듯 최재환의 눈앞에 손가락을 들이민다.
“최재환이 너 임마, 실장 달더니만 완전히 제멋대로······.”
순간, 김 팀장이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그 삿대질하는 손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뭐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김 팀장.
“그만하시죠.”
“뭐?”
“내 매니저입니다. 왜 남의 매니저한테 삿대질입니까?”
아마 지금 내 얼굴은 일그러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재환이란 놈은 많이 화가 날 때 이렇거든. 그래, 지금 나··· 많이 화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