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36화 (3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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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열심히 사는 중 (1)

지금 막 저녁 8시가 지났다.

“하······.”

사무실에 걸린 벽시계를 보고 있던 여직원이 한숨을 내리 쉰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건만 이러고 앉아 있다니.

데이트도 해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자기 개발도 해야 하는데··· 그나마 회의에 들어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벽 너머의 회의실, 한 무리의 여자들과 남자들이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있는 게 보인다.

기획콘텐츠개발부서 여직원들과 매니지먼트 사업부서 사람들이었다.

오늘 회의 주제는 이시현.

매니지먼트 사업부서는 윤석규 부장과 2팀의 인원들이 참석했다.

조진수 팀장, 강현 실장, 최재환 실장까지.

최근 기획콘텐츠개발부서는 배우 이시현과 관련해 로드맵을 구상해왔는데, 오늘은 중간 조율을 위해서 모인 자리다.

직원들 사이에서 흔히 기콘부라고 불리는 기획콘텐츠개발부서는 1팀에서 음반과 음원, 콘서트 등의 기본 콘텐츠를 관리하고, 2팀은 연기자의 로드맵을 구성해 사업 다각화를 노린다.

“그러니까, 바이바이에서 이시현을 계속 쓰고 싶다 이건 가요?”

사실상 기획콘텐츠개발부서의 주축으로 통하는 성시원 팀장이 최재환에게 시선을 두고 물었다. 바이바이의 제안에 대해서는 그녀도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바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예, 아무래도 지금의 CF 콘셉트를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확장할 생각인 듯 보이네요.”

“그래요?”

성 팀장이 안경을 들썩이며 눈을 기울인다. 동그란 안경 너머의 갈색 눈동자에는 꽤 많은 생각이 움직이고 있었다.

“원소스멀티유스라······.”

OSMU(one-source multi-use).

하나의 소스, 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상품으로 파생시킨다는 뜻이다.

지금 바이바이는 예상치 못한 광고 효과에 힘입어서 이시현의 지면 광고를 추가로 계약했고, 거기에 더해 자신들의 또 다른 기획에 이시현을 끼워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시현 배우는 뭐래요?”

“사실 저희 입장에서는 가경 작가님의 시나리오가 나오고 나서 결정을 했으면 좋겠거든요. 뭐, 신비주의를 하자는 건 아닌데······.”

최재환이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지난번 이시현이 회사와 재계약 과정에서 분명히 의사를 밝혔듯, 당분간은 가경 작가의 차기작에만 집중하고 싶다. 어차피 그동안에도 일이 없었으니 한동안 현 상황이 이어진다고 해도 조급할 건 없으니까.

‘하지만 시나리오가 안 나오고 있단 말이지··· 후, 골치 아프네.’

상황이 제 뜻대로 안되니 최재환은 괜스레 이마를 긁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시선 맞은편에서 성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얘기를 이어갔다.

“그래도 당장은 아니겠죠. 여기저기에서 팀 꾸리는데도 시간이 소요될 텐데··· 언제가 될지 알고 그 하나에만 올인해요? 시나리오도 아직 안 나왔는데.”

성 팀장은 상황을 좀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얘기했다.

지금 회사는 이시현을 지원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려 하는데, 되레 이시현 쪽에서 상황을 관망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지금이 중요한 시기인 만큼 결정에 있어 신중하고 싶은 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부장님은요?”

성 팀장이 이번에는 윤 부장을 보고 물었지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지난번 그녀는 윤 부장에게 이시현 배우를 어떻게 할 거냐고 넌지시 물었는데, 그때 대답이 황당 그 자체였다. 뭐랬더라 ‘알아서 하겠지’라고 했나.

“글쎄, 바이바이 그쪽 제안이 정확히 뭐야?”

윤 부장이 조금 떨어져 앉은 최재환을 보며 묻는다.

“뻔하죠. 시현이 좀 돌리자는 거죠. 계약 기간 분기 연장하고 몇 개 더 같이하자고······.”

“이건?”

윤 부장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묻는다. 그 저급한 행동에 성 팀장이 눈을 찌푸린다. 최재환도 내키지 않는 얼굴을 감추려는지 마른세수를 하며 답했다.

“일단은 3천? 그냥 넌지시 물었는데··· 그쪽에서는 그 정도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

윤 부장이 눈을 끔뻑인다. 이시현과 바이바이의 3개월짜리 단발 계약이 1천만 원 수준이었는데, 사실 지에스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서는 껌값이나 다름없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델료가 3천이라고?

그 말을 다르게 정의하면 이제 이시현은 3천짜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바이바이로서도 더 오르기 전에 잡아두겠다는 계산일 테고.

“성 팀장 생각은 어때? 우리 생각만 묻지 말고, 기콘부도 생각을 얘기해야지. 그쪽이 전문가잖아?”

따지는 건지, 묻는 건지.

늘 한결같은 윤 부장의 태도에 성 팀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일단 대표님은 인지도를 좀 높이자는 생각이신데··· 지금 이시현 배우는 서두르기보다는 천천히 가자는 얘기고. 뭐 이시현 배우 얘기가 틀린 건 아닌데, 가경 작가의 시나리오가 어떨지 전혀 모르니까.”

잠시 얘기를 멈춘 성 팀장이 손에 쥔 바인더를 만지작거린다.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에 최재환의 시선이 꽂힐 때쯤, 그녀가 다시 얘기를 이었다.

“그뿐 아니라 투자처도 그렇잖아요? 제작도 어디서 누가 하는지를 알 수 없고··· 이거는 뭐 감나무는 심었는데,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또 얼마나 맛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기껏 기다렸는데 떫으면 어떡하냐 이거예요.”

그녀의 말에 최재환이 어금니를 깨문다.

지금 상황에 이런 얘기라니. 탐탁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회사에서 어디까지, 얼마나 지원해줄지, 그런 기대감이 없습니다. 지난 5년 회사에서 이시현에게 해준 게 없었잖습니까.”

최재환은 바이바이의 계약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3천이든 1억이든, 계약금 액수도 중요치 않다.

그리고 이제 와 지원해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하고들 있는 데, 그래 좋다. 지원해 주는 거야 좋은데··· 그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지, 쥐새끼 구석에 몰아놓듯 밀어붙이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튼 바이바이의 이미지가 너무 커지면 가경 작가의 영화로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밟을 이시현에게 있어서는 좋을 게 없다.

젖소 옷을 입었던 배우가 액션 영화 찍고, 로맨스 찍으면, 그게 몰입이 되겠는가.

“아무튼, 좀 천천히······.”

“하······.”

성 팀장이 갑자기 한숨을 쉬자, 그 때문에 최재환이 얘기를 멈칫했다. 그 틈을 비집듯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지금 여기 있는 거예요. 이시현 배우 지원해주려고. 그거 논의하려고.”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날카롭다.

“제 말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이겁니다. 이시현이가 단물만 쏙 빼먹을 만큼의 뭐가 차 있는 배우도 아니고, 이렇게 빙빙 돌려봐야 금방 지칩니다. 그러니까, 장기적으로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는 거죠.”

톡··· 톡··· 톡.

성 팀장이 말없이 볼펜을 매만진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바인더 옆에 놓아둔 노트를 펼쳤다. 그 안에는 메모와 날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원래가 검은 종이였는지, 아니면 하얀 종이인지 분간이 가질 않을 정도인데··· 성 팀장이 최재환을 향해 다시 물었다.

“그럼, 이거 다 덮어요?”

최재환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느릿하게 움직인 입술이 쩝 소리를 내고,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퍼진다. 그 미묘한 공기는 성 팀장의 옆으로 주르륵 앉아 있는 여직원들에게도 닿았다.

그녀들은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저 머리카락을 흔들거나, 손톱을 만지거나, 괜스레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만지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들 지쳐서 이대로 테이블 아래에 눕고 싶다는 생각들이 들쯤, 침묵하고 있던 윤 부장이 입을 열었다.

**

“시작도 안 했는데 뭘 덮어. 그리고 최 실장 얘기 틀린 거 없잖아? 여태 기콘부에서 되는 애들만 케어해준 거 사실이고.”

“부장님?”

“말은 바로 하자고.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 기콘부에서 우리 2팀 챙겨줘? 박한영이나 오소리 급이나 돼야 좀 챙겨주지, 나머지 애들은 각자 알아서 먹고 사는 거잖아?”

“말씀이 심하시네요. 회사 주력이 배우보다는 가수 팀이었으니까, 당연히 그쪽에 신경을 좀 더 썼을 뿐이죠. 우리가 언제 2팀을 내버려뒀다고 그래요? 그리고 윤 부장님도 여태 아무 말씀 없으셨잖아요?”

“말다툼하자는 얘기 아니야. 짚고 넘어가자는 거지.”

윤 부장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상황을 정리한다.

“아무튼 일단은 방향이나 정하자고.”

그 말을 끝으로 윤 부장은 다시 팔짱을 한 채 의자에 등을 붙였다. 위에다 보고할 것 하나만 정하고, 이 지겨운 회의를 끝낼 생각이다.

‘이시현 때문에 회의를 할 날이 올 줄이야. 허.’

지금 상황에 코웃음이 나오는 윤 부장과 달리, 성 팀장은 바인더를 내려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입안을 반쯤 채웠던 바람이 힘없이 흘러나온다.

“가경 작가 시나리오는 언제쯤 올 것 같아요?”

고개를 든 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얼굴. 최재환은 그 얼굴을 잠시 보다가 대답했다.

“다음 주 중에 초고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윤 부장이 또 등을 들썩인다.

“세월아 네월아 구만. 그러게 뭐랬어? 투자자가 누군지부터 물으라니까.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어, 안 했어?”

또다시 같은 얘기에 최재환이 이마를 찌푸리려는 이때, 내내 조용히 있던 강 실장이 나직이 말했다.

“가경 작가인데··· 투자가 문제겠습니까. 그러잖아도 충무로는 전부터 그 작가에게 러브콜을 보냈었고, 일본도 관심이 있다니까, 투자 걱정은 굳이 하실 필요 없을 겁니다.”

최재환이 강 실장을 쳐다본다. 저놈이 웬일로 편을 드나 하는 시선이다. 강 실장은 계속 말했다.

“일단, 바이바이 건은 시나리오 도착하면 결정하시죠.”

그 말에 윤 부장이 아예 등을 돌려 강 실장을 쳐다봤다.

“강 실장, 너 이 건 관련해서 뭐 들은 거 있어?”

“아니요. 저도 모르죠. 그냥 가경 작가니까 좋게 보자는 거지, 지난번과 같은 대작이 나온다는 보장이야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때가 처녀작이었다는데.”

물론 다들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뭐든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니까.

다만 가경 작가라는 이름의 프리미엄은 어떤 시나리오라도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설사 쓰레기 같은 시나리오라도 대중은 그 내용에 의미를 붙일 것이다. 그만큼 이름값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다.

“좋아.”

윤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손목시계를 슥 보고는 회의를 정리한다.

“그럼 오늘은 이쯤하고, 다음에는 홍보부 애들도 회의 들어오라고 해. 광고는 걔들이 더 잘 알 거 아니야?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빼고들 난리야. 그리고 최재환.”

“예.”

“이시현이, 이번 월말평가에 참여시켜. 대표님이 그렇게 하라네.”

“예?”

최재환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그리고 묻는다.

“왜요?”

“왜긴 왜야. 하라면 하는 거지.”

“부장님, 이시현이 연습생 아닙니다. 리그 뛰고 있는 프로라고요.”

“거 하라면 하지.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윤 부장이 눈을 번뜩인다.

**

최재환의 볼이 꿈틀거린다. 그 미묘한 변화와 분위기 속에 회의실 공기가 무거워지는데, 강 실장이 나직이 얘기를 꺼냈다.

“저 부장님.”

“왜?”

윤 부장은 세상만사가 귀찮은 얼굴로 강 실장을 쳐다봤다.

“1팀 유 실장이 그러는데, 권혜선이가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네요.”

“권혜선이?”

“예.”

“걔는 또 무슨 바람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윤 부장이 다시 고개를 내젓는다.

“가수가 무슨 연기냐? 안 그래?”

“그래도 하고 싶다는데··· 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 말에 윤 부장은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시선을 들었다.

“성 팀장.”

“예.”

그녀가 안경을 들썩인다. 그 얼굴을 윤 부장이 가만히 바라봤다.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그녀의 입술 끝은 갈라졌고, 눈은 피곤해 보인다.

“피곤하긴요. 낼모레 있을 임원회의 준비하느라 바빠서 그렇죠.”

“바쁘기는··· 성 팀장이 그 정도면 ATTM(아티스트메이킹)은 피를 토하게?”

성 팀장은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바인더를 치우고 노트를 덮는다.

‘말을 해도 꼭 저렇게 하지.’

얼굴을 찌푸린 성 팀장의 모습에도 윤 부장의 얘기는 계속 이어진다.

“그럼, ATTM 자료는 받았겠네?”

“받았죠. 그거 정리하느라 내일도 야근인데.”

“어때? 권혜선 연기는 늘고 있대?”

“글쎄요······.”

그녀가 바인더를 다시 손에 들고 뒤적였다. 페이지를 넘기고, 힐끗 시선을 들어 얘기를 꺼낸다.

“ATTM에서 올린 자료 보니까··· 늘고는 있는데, 솔직히 포지션 측면에서 보면 아직 가수가 연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그렇지.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가수 출신은 연기에 무리가 있다. 지에스에서는 멀리 내다보고 연습생들을 키우지만, 현시점에서는 이렇듯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 있었다.

“저 부장님··· 그래서 말인데, 권혜선이 뮤직비디오 출연시켜보면 어떨까요?”

강 실장이 다시 끼어들며 최재환을 흘깃 쳐다봤다. 최재환은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뮤직비디오?”

“예. 이번에 보이스레이드(혼성듀엣), 타이틀 뮤직비디오 콘티가 나왔다는데, 출연 배우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거든요.”

“흠··· 그래?”

“뭐, 해보는 거죠. 우리 식구 거 하는 건데.”

그 말을 들은 조 팀장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반면 윤 부장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겠네.”

윤 부장은 강 실장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권혜선이 이상하게 삐딱하게 굴어서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얼마 전에는 밤중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왔다는 매니저의 얘기도 있었다.

물론 차 대표에게는 보고하지 않았지만.

“콘티 가져왔어?”

“예. 여기.”

강 실장이 서둘러 일어나 1팀에서 받아둔 콘티를 윤 부장에게 건넸다. 최재환이 쓱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본다.

“남자 배우도 있네?”

몇 장을 훑어보던 윤 부장이 눈을 가늘게 뜬 상태로 물었다.

“예. 그래서 그 부분은······.”

뜸 들이는 강 실장.

“뭐?”

“이시현이를 썼으면 해서요.”

“이시현이?”

“예. 시현이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안됩니다.”

최재환이었다. 얘기가 잘돼 가는데 끼어들자, 강 실장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왜 안 돼? 이시현이 그렇게 아껴서 뭐하려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이어지자, 최재환이 물끄러미 마주 보고 말한다.

“시현이가 아니라, 혜선이 연기시키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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