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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 온다, 노 저어라 (4)
최재환의 얘기로는 바이바이에서 어제 촬영한 지면 광고로도 모자라, 아예 새로운 기획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민 팀장님, 어제 촬영장에서는 그런 말 없었는데?”
내 말에 최재환이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 뭐야 이 양반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나.”
전화상으로 한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최재환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후······. 날씨 좋네.”
방송국 주차장을 벗어나기 전, 최재환이 차창을 열어 하늘을 보고 속삭였다. 그 옆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조금 편안해 보인다. 이제 등촌동에 있는 방송국에 3W를 내려주면 어제오늘 그녀들의 임시 매니저를 맡은 그의 바쁜 일상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그럼, 저녁에 맥주나 한잔하자고 할까.
“근데, 너희들 매니저는 등촌동에 도착했대?”
핸들을 돌리며 최재환이 룸미러를 힐끗 보고 물었다. 그러자 레니가 바로 대답을 했다.
“예, 체기 많이 가셨대요.”
3W 매니저가 뭔가를 잘못 먹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제오늘 최재환이 그를 대신해 대타를 뛰고 있다. 좀 전 라디오 방송이 그렇듯, 그녀들의 스케줄에 내가 끼어들었으니 거절하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이 시각 간추린 뉴스입니다. 지난 16일 남북한 양측이 주고받은 8.15 이산가족 상호 방문단 명단에 대해, 북한은 우리 측 방문단 명단을 수용할 입장이라고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밝혔습니다. 우리 측도 북한이 제출한 방문단 명단에 대해 이견을 보이지 않고 수용할 방침입니다. 이로써 다가올 8월 15일, 남북한 이산가족 200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반세기 만에 혈육을 상봉하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도로 위의 경적. 그리고 바람 소리.
최재환은 그 속에서 말없이 운전만 했다. 권혜선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고, 나머지 3W 멤버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형 같은 외모의 여자들이 조용히 있으니 왠지 마네킹을 보는 느낌이다.
“송이야, 정말 괜찮아?”
나는 조수석 뒤로 힐끗 고개를 돌려 맨 뒷좌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한송이를 눈에 담았다. 그녀가 미소를 끄덕인다.
“얼굴색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게 어제 적당히 좀 먹으라니까. 칠칠찮게 흘리면서까지 정신없이 먹더니만.
“알았어, 더 자고 있어.”
“예.”
나는 그녀가 눈을 감는 것을 보고는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았다. 최재환의 옆모습을 한번 보고, 차창에 기대 눈을 감았다.
‘현승아······.’
어떤 여자였더라. 기억을 떠올려보자.
내 기억에 현승아는 이 바닥에서 롱런한다. 지금 나이가 스물여섯이니까, 마흔둘 나이인 2016년에도 방송에 얼굴을 비친다.
한때 일반인과의 스캔들 문제로 위기를 겪었지만, 가상 결혼을 맺는 방송에 출연하면서 다행히 제2의 인기를 얻게 된다. 연상연하 설정이었던가. 아무튼 시기가 잘 맞아떨어진 것도 있는데, 상대 배우의 드라마가 잘 돼 운 좋게 대중의 관심이 쏠린 것도 그녀에게 있어 행운이었다.
하지만 현승아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다. 내 소속 가수도 아닌 데다가, 내가 직접 신경을 쓸 만큼의 흥미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소문에 사생활이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물론 옛날얘기에 불과하겠지만.
‘옛날얘기?’
다른 말로는 지금 얘기일지도.
“니들 배 안 고파? 방송국 들어가면 먹을 시간도 없잖아?”
한참을 달리던 최재환이 넌지시 묻자, 뒤에서 바로 슬기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알았대? 오빠 우리 완전 배고파!”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레니가 지적하자 슬기가 노랗게 물든 눈썹을 찌푸린다. 미간에서 광선이라도 나올 기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둘의 다툼을 보는 게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시현아, 우리 뭣 좀 먹을까?”
최재환이 나를 힐끗 보며 물었다.
“그럴까?”
편의점이 보이는 도로변에 잠시 차가 정차했다. 그러자 한송이가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키며 속삭여 말했다.
“오빠, 제가 다녀올게요.”
“됐어. 아픈 애가 무슨······.”
최재환은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차에서 내려서 나도 뒤를 따랐다. 물론 대세인 3W는 차 안에 꼭꼭 숨어 있어야 하고.
딸랑딸랑.
편의점 문에 달린 풍경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우리가 안에 들어가자 점원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최재환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구에 놓인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손에 들었다.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형은?”
“글쎄. 나는 별로 생각이 없네.”
“솔직히 나도 그런데.”
“훗, 그럼 우리 쟤들 거나 좀 사고··· 이따가 회사 가서 순대국밥이나 먹을까? 넌 그거 먹고 2층에서 좀 쉬고, 나는 바로 회의 들어가고.”
“그러자.”
나는 냉큼 대답했다. 회사 앞에 순대국밥을 제대로 하는 식당이 하나 있어서 최근 자주 들리는 편이었다.
“그럼 일단은······.”
최재환은 3W가 좋아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거침없이 진열대를 향해 손을 뻗는다. 과자며 빵이며 그녀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가득 담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물었다.
“형.”
“응?”
“3W, 아쉽지 않아?”
“뭐가?”
“형이 다 키운 거나 다름없잖아.”
“자식, 또 쓸데없는 소리를······.”
최재환이 대답을 꺼리며 움직였기에 나도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 물어볼 생각이다.
한가득 먹거리를 채운 바구니가 계산대에 올라왔다. 점원이 긴장한 듯 바라보고 있자, 최재환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든다.
“아, 잠시만요.”
최재환은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다시금 냉장고 진열장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뒤 손에 인스턴트 죽을 하나 들고 왔다.
“이것도요.”
점원이 바코드를 찍는 사이, 나는 벽에 걸린 TV에 시선을 가져갔다.
“훗, 형 저거 봐봐.”
TV에 바이바이 광고가 나가고 있었다. 젖소 옷을 입은 나와 최재환이 초원을 달려간다. 최재환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휴, 너 진짜··· 다시는 나 저런 거 안할 거야. 진짜야.”
“근데, 바이바이에서 또 뭐 하자고 그랬다며? 그럼 형도 하는 거 아니야?”
내 질문에 최재환의 얼굴이 싹 굳는다. 그러더니 서둘러 고개를 휘휘 젓고 속삭인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
“너 진짜!”
입술을 꾹 깨무는 최재환. 후훗.
“3만 2천 원 입니다.”
“여기요.”
카드를 건네받은 점원이 힐끗 나를 쳐다봤다. 서로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한다.
“저기, 저 CF······.”
그러자 최재환이 그럴지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예, 맞아요. 이 친구.”
나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러자 점원이 우리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흡사, 얘들 뭐야? 그런 시선이었다.
“이거 사시면 저 CF 음료수 하나 서비스거든요. 가서 가져오시라고요.”
그녀가 계산대의 인스턴트 죽을 가리키며 눈을 흘긴다. 최재환이 뻘쭘한 얼굴로 서둘러 냉장고에서 우유병 모양의 바이바이 음료수를 하나 들고 왔다. 편의점을 나오자마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아우 쪽팔려!”
“형, 아까 장난 아니게 웃겼던 거 알아?”
“그러는 너는 임마! 아까 어깨 으쓱 올리던데? 푸하하!”
낄낄 웃는 우리 앞에 어린아이들이 뛰어간다.
“이놈들아, 조심해야지!”
최재환이 어흥, 호랑이 소리를 냈지만 아이들은 상관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 흥얼거렸다. 바이바이 CF 송이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초원 위를 달려달려!
구름 위를 달려달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그 천진한 모습에 곁을 지나던 한 커플이 피식 웃는다.
“어휴, 저 노래 노이로제 걸리겠어.”
“왜? 난 좋던데?”
커플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우리는 차에 다가갔다. 문을 열고, 바스락 소리가 나는 편의점 봉지를 뒤로 넘기자 슬기가 냉큼 받아든다.
“역시, 우리 오빠! 짱짱!”
슬기는 최재환을 찌를 듯이 엄지를 쑥쑥 내밀었고, 레니는 안 먹을 것처럼 굴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슬기가 봉지를 휙 빼앗고 그녀를 노려본다.
“안 먹는다며?”
“그런 말은 안 했거든? 이 돼지야.”
“뭐어?”
“하··· 싸우지들 좀 말아라.”
최재환이 질렸다는 얼굴이다. 반면 권혜선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최재환이 손을 뻗어서 그녀의 무릎을 손등으로 툭 쳤다.
“야, 일어나서 먹어.”
“괜찮아요.”
“삐졌냐?”
“아니거든요.”
“뭐가 아니야, 삐졌구만.”
“아니라고요.”
소심하게 흥! 하고 콧바람을 내쉬며 그녀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슬기를 노려보며 타박을 시작했다.
“슬기 너, 또 팀장님한테 잔소리 듣고 싶어? 관리 안 해? 그리고 레니 넌, 애 좀 그만 놀려. 애가 장난감이야? 돼지라는 말도 이제 그만해!”
“그럼 뭐라고 해?”
“···피그라고 해.”
“야아!”
슬기가 두 사람에게 솜 주먹을 휘두른다. 그러자 최재환이 봉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안 먹을 거면 그냥 줘.”
“싫어!”
봉지를 얼른 품에 안는 슬기. 그러더니 셋이 또 잘들 나눠 먹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스타일리스트도 조용히 손을 뻗어 빵 봉지를 하나 챙겨 든다. 그리고 권혜선은 아픈 한송이를 위해 직접 바나나우유를 건네는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시현이 오빠는 안 드세요?”
슬기가 나를 향해 저 큰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먼지 안 들어갈라나 모르겠네.
“아, 전 괜찮아요.”
“에이, 우리 말 놔요. 자주 볼 건데.”
레니가 쿨하게 빵을 하나 뜯어서 내게 건넸다. 진짜 먹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한입 베어 물려는데, 최재환이 빵을 쏙 뺏어가며 말했다.
“야, 니들이나 먹어. 시현이 다이어트 해야 해.”
“에에? 뭐냐? 우리 압살하려는 거냐?”
슬기가 최재환을 흘깃 쳐다보며 장난을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재환은 가뿐히 그녀를 무시하고 편의점 봉지에서 인스턴트 죽을 꺼내들었다.
“한송이. 이거라도 좀 먹어, 하루 종일 안 먹었잖아?”
“예······.”
일단 대답을 하며 그녀가 받았지만 못 먹을 것 같은 표정이다.
“휴··· 그렇게 약해서 무슨 일을 해?”
최재환은 괜스레 투덜대더니 나를 슥 쳐다보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그 말을 하고 그는 차에서 내려 어딘가로 향했다. 한참 뒤에 그가 검은 봉지를 들고 왔다. 그 안에 약국 봉투가 담겨 있었다.
“진통제.”
뒤로 툭 던지더니 차에 시동을 건다. 등촌동에 도착할 즘에는 편의점 봉지가 깨끗이 비워진 상태였다.
“다들 열심히 하고.”
최재환이 차에서 내리는 그녀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자, 권혜선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오빠··· 미안해요.”
단 한마디뿐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제법 자존심을 죽인 모습이다. 최재환이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툭 한번 두드리고 등을 돌린다. 나는 차에 타기 전, 재빨리 그녀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그러자 권혜선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닿는다.
‘뭐야, 진짜 뭐 할 말 있나?’
계속해서 권혜선의 시선이 내게 닿으니 의구심이 든다.
‘혹시 나··· 아니, 이시현하고 뭐 있는 거야?’
설마, 설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나는 당시 둘의 최측근이나 다름없던 매니저였지 않은가.
아니지, 둘이 몰래 사귀었다가 헤어졌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시현이!”
나를 부르는 최재환의 외침. 그제야 나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둘러매며 한 번 더 권혜선을 돌아봤다. 그녀는 체기로 인해 창백해진 얼굴의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회사로 돌아왔다.
한송이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순대국밥을 먹고, 나는 2층 카페로, 그리고 최재환은 회의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