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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 온다, 노 저어라 (3)
광고가 나가는 사이 디제이 현승아가 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시현 씨, 뭐 재밌는 에피소드 없어요? 청취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거.”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남 앞에서 드러낼 만한 게 없다. 그렇다고 개그를 할 줄 아나, 재밌는 얘기를 할 줄 아나. 가만 보면 나란 놈은 그냥 허우대만 멀쩡한 속 빈 강정이다.
‘아니지, 그저 아저씨지.’
그리고 아저씨 농담은 재미없거든? 아니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확성기 개그라도 해야 하나.
“글쎄요. 저 별로 재미없는 사람이거든요.”
“혹시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이어진 질문에 3W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쏠렸다.
“아니요. 없습니다.”
“에이, 거짓말.”
“진짜 없는데.”
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현승아와 3W를 뒤로하고 라디오 부스 밖을 바라봤다. 유리창 너머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광고가 끝나자 바로 현승아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축하드립니다! 어제 기준으로 우리 3W 앨범 판매량이 30만 장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나도, 3W 멤버들도 박수를 치면서 자축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1백만 장 돌파도 시간문제라는 얘기가 있어요?”
디지털 앨범이 대중화된 2016년과 달리 90년대, 2000년 초반은 백만 장의 판매량도 나오던 시기다. 이런 대화가 자연스러울 만큼 대중음악의 황금기였다.
“에이, 설마요.”
현승아의 말에 레니가 손을 가로젓는다. 그녀의 숏커트 머리가 찰랑거리자 현승아가 미소와 함께 다시 물었다.
“그럼, 터프를 맡고 있는 레니 씨는 얼마나 예상하시나요?”
“예상은 무슨. 저희는 이렇게 사랑받는 것만으로도 지금 충분해요.”
“에이, 너무 판에 박힌 답이다. 슬기 씨는요?”
“저요?”
슬기가 눈을 끔뻑이자 레니가 툭 말했다.
“얘는 그런 거 물어도 몰라요. 아마 저녁에 뭐 먹을까 생각하고 있을 걸요?”
“야! 아니거든!”
“하하. 그럼 슬기 씨, 지금 무슨 생각하고 계셨어요?”
“아··· 그게······.”
“저녁밥이라니까요.”
레니가 한 번 더 강조하자 슬기가 씩씩거리며 노려본다. 동그랗고 맑은 눈이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촉촉해진다. 저러다 화장이라도 지워질라.
“둘이 진짜 싸우면 안 돼요, 하하!”
현승아는 능숙하게 라디오를 진행했다. 그 언변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레니와 슬기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레슬링 경기처럼 중계하기도 했고, 때로는 진지하게 그녀들의 꿈을 묻기도 했다.
“근데, 3W가 무슨 약자죠?”
현승아의 질문.
순조롭게 라디오 생방송이 이어지고 있다.
“예, WHAT WOMEN WANT의 앞글자를 따서 3W입니다.”
“아하, 여성이 원하는 것?”
“예.”
“그럼, 혜선 씨는 남자친구에게 원하는 게 있나요? 물론, 남자친구는 없다고 하겠지만··· 있다고 한다면?”
“글쎄요··· 사랑한다는 말?”
“물질은 필요 없다?”
“그야, 제가 벌면 되니까.”
권혜선이 천연덕스럽게 답하고 어깨를 으쓱 올린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있던 가는 어깨가 당당하게 고개를 든다.
‘확실히··· 재능이 있어.’
3W는 훗날 해체하지만, 리더인 권혜선은 다방면으로 활약하며 인기를 이어간다. 방송 MC도 하고, 솔로 음반도 내면서 대중에게 ‘권혜선’ 그 이름 석 자로 불리게 된다.
“근데, 듣기로는 무명시절에 꽤 힘들었다고 들었어요?”
“맞아맞아.”
슬기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자, 현승아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반말은 하지 마시고.”
“아, 죄송합니다.”
“하하, 농담농담. 그럼 슬기 씨,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들었어요?”
라디오 대본을 만지며 현승아가 묻는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대본을 톡톡 건드는 사이, 슬기가 잠시 그때를 회상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또르르.
“어··· 왜? 왜 또 울어? 그러니까 팬들이 울보 슬기라고 그러지.”
당황한 현승아. 그러자 레니가 슬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신 대답했다. 이럴 때는 또 같은 팀이라 이건가.
“다들 우리 안 된다고 했거든요. 회사에서도 포기하려고 했었고.”
“아, 그래서 슬기 씨가 아주 힘들었나 보네. 아니지, 다들 힘들었겠다. 열심히 하는데도 안 되면 그만큼 힘든 거 없잖아요?”
“그때, 유일하게 된다고 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누군데요?”
그 말에 레니가 라디오 부스 밖의 최재환을 가리켰다.
“우리 매니저요. 지금은 아니지만.”
“흑흑, 재환이 오빠 없었으면 우린 벌써 포기했을 거예요. 으어엉······.”
슬기가 통곡하며 울먹거리자 최재환이 고개를 내젓는다. 저 양반 지금 쑥스러우면서도, 아닌 척을 하고 있다.
“아, 근데 지금은 매니저가 아니라고요? 오늘 같이 오셨잖아요?”
“저희 매니저가 지금 체했거든요. 저분은 여기 이시현 씨 매니저로 오신 거고, 저희는 덤으로 차 얻어 타고 온 거예요.”
“아하하! 그럼 이시현 씨 아니었으면, 오늘 3W 못 온 거네요?”
현승아가 과도한 액션과 웃음을 보인다. 자칫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질 뻔했는데 다시금 분위기가 진정된다.
“그럼, 저분이 3W가 된다고 했고, 또 그렇게 됐으니까, 이시현 씨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현승아가 내 쪽을 본다. 나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열심히 해야죠.”
그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금 3W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현승아가 쓸데없는 멘트를 남발하는 통에 나한테 넘어온 질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3W가 평소에 잘 해주냐고 해서 그렇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청취자들 역시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스스로도 참 재미없는 남자구나 싶다. 안되겠다. 개인기라도 만들어야지. 성대모사라도 할까. 아니면, 확성기 개그를 업그레이드해볼까.
‘에효, 됐다.’
아무튼 마지막 광고가 나갈 때까지도 포커스는 오직 3W.
그 바람에 최재환이 라디오 부스 밖에서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다. 이시현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냐는 시선으로 말이다.
“아, 요즘 이 광고 재미있다고 난리예요?”
광고가 끝나자 현승아가 몇 장 안 남은 라디오 대본을 보면서 넋두리하듯 얘기를 꺼냈다. 좀 전의 광고, 바이바이 CF다. 요즘 TV만 틀면 나오는.
“그거 시현이 오빠가 광고 모델인데요?”
레니가 툭 던져 말하자, 처음에만 잠깐 관심을 둬 주고는 은근히 차별 방송을 하던 현승아가 나를 돌아봤다.
“진짜요?”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예.”
아무래도 젖소 옷을 입고 찍은 CF라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별로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그만큼 내가 임팩트 있는 존재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정해진 운명대로 오소리가 CF를 찍었다면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오소리와 나는 대중의 인지도에 있어 하늘과 땅 차이다.
“우와 진짜예요?”
현승아가 믿기 힘들다는 듯 재차 묻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하자 그녀가 요란하게 박수를 친다.
“제 조카가 요즘 이 광고만 나가면 좋아서 방방 뛰어요.”
“그래요?”
“아니 이렇게 대단하신 분을 두고 왜 얘길 안 한 거야?”
현승아는 괜스레 3W를 탓하며 화제를 내게 돌렸다.
“그럼, 그 젖소 옷 입으신 분이 이시현 씨라는 얘기인데, 또 한 분은 누구예요? 젖소가 두 마리 던대?”
“저기.”
나는 라디오 부스 밖을 가리켰다. 그러자 최재환이 어깨를 으쓱 올린다.
“매니저요?”
“예.”
“푸하하! 배우하고 매니저하고 함께 CF를 찍은 거예요?”
재차 놀라면서 현승아가 눈을 끔뻑이고 묻는다.
“어떻게 하다가 찍으신 거예요?”
“음료수가 맛있어서요.”
“아, 맞아! 맛있긴 맛있어.”
슬기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레니도 한마디를 거든다.
“어라? 우리는 탄산음료 못 먹는데? 회사에서 식단 조절하거든요. 넌 그거 맛있는 걸 어떻게 알아?”
“어, 어?”
당황하는 슬기.
레니가 서늘한 눈웃음과 함께 입꼬리를 쓱 끌어 올린다.
“내가 대표님한테 말할 거야.”
레니의 귀여운 협박을 보며, 나는 두 사람의 다툼을 말렸다.
“그러지 말아요. 야박하게.”
내 시선 때문인지 레니가 괜스레 큼! 하고 눈을 피했다. 그러자 현승아가 그 상황을 덥석 물었다.
“이거 뭐야? 둘이 이 분위기 뭐죠? 청취자 여러분들은 보지 못하시는데, 지금 이시현 씨가 굉장한 눈웃음 보였거든요? 으아 무서운 눈웃음이다. 전국의 여성분들, 이시현이라는 배우 조심하세요. 한번 보면 못 빠져나갈 것 같아요.”
현승아의 너스레에 최재환이 흡족한 얼굴을 한다. 분량 축에도 못 끼는 타이밍인데, 그래도 방송 말미에 이시현이 제대로 부각 되고 있었다. 한데 왠지 권혜선의 표정은 좋지가 않다. 쟤 진짜 왜 저러지?
“그럼 그 노래도 직접 부르신 거예요? 그 미친 중독 송!”
“예.”
“우와, 이거 특종이다! 그럼 한번 불러주세요!”
나는 바로 CF 노래를 불렀다. 현승아가 쿡쿡 웃고 있고, 라디오 부스 밖의 작가들도 배꼽이 빠지라 웃는다.
“하하하!! 지금 메인 작가님이 얘기하는데, 이 가사 직접 붙이신 거라고요?”
밖에서 스토리보드를 흔들고 있는 메인 작가.
“예.”
가사 쓰느라 고민 좀 했지.
너털웃음 뒤에 현승아가 아쉬운 듯 시간을 살핀다.
“아··· 이것 참, 벌써 헤어질 시간 이내요. 이시현 씨 그러면 안돼요, 진작 얘기해주셔야죠. 내내 꼭꼭 숨기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하하······.”
“그럼 혹시, CF에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어요?”
“예, 있는데, 이미 시간이.”
“아 진짜! 그라믄 안 돼!!”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럼 청취자 여러분, 내일 또 봬요. 오늘도 우리는, 사랑을 할 겁니다. 현승아였습니다.”
현승아가 마무리 멘트를 마치자 다들 일어나 그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나이도 그렇고, 데뷔 역시 현승아가 3W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예, 다들 수고했어요.”
현승아가 3W 멤버들을 일일이 끌어안고 나서야 나를 돌아봤다. 배우와 가수는 선후배를 따지기가 모호한 계열이다. 더구나 여자와 남자라는 포지션 차이는 서로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수고하셨어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현승아가 미소를 띠고 악수를 청하며 묻는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 올해 스물일곱입니다.”
“아, 저는 스물여섯인데, 우리 앞으로 알고 지내요.”
“예.”
그녀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해서, 나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모든 사회생활이 그렇듯이 이런 식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하는 말일 공산이 크다.
“근데, 그 광고 진짜 재밌던데? 어떻게 찍었어요?”
“운이 좋았죠. 뭐.”
그렇지 않아도 윤 부장이 요즘 나를 보는 시선이 맵다. 제 딴에는 오소리 것을 내가 빼앗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수수한 원피스 차림의 메인 작가와 청바지의 보조 작가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녀들은 내 맑은 미소에 피로가 한층 풀린다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시현 씨, 나중에 꼭 다시 오셔야 해요?”
“예.”
“매니저님, 시현 씨 우리가 찍었어요!”
두 작가가 너도나도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의외의 환대를 받으며 방송국 주차장으로 나왔다. 나오는 중에 최재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권혜선을 돌아봤다.
“혜선아.”
“예, 오빠.”
“너 아까 그 멘트 뭐야?”
“뭐가요?”
권혜선이 바로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자 최재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됐다.”
괜스레 파고들어 서로 스트레스만 쌓이느니 적당히 끝낼 생각인 듯했다. 그런데 권혜선은 그게 또 불만인 모양이다.
“왜요?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하세요!”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나와 3W 나머지 멤버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얌전한 권혜선이가. 그 바람에 최재환의 얼굴도 싸늘하게 식었다.
“권혜선.”
그가 걸음을 멈추고 아예 뒤돌아 정면으로 권혜선을 마주 봤다. 권혜선이 주춤한다.
“너 입 조심해.”
“제가··· 뭘요.”
“그런 식으로 천지 분간 못하고 다닐 거면 리더 자리 애들에게 넘겨. 여기가 너희 숙소야? 팬들 안 보여? 어디서 큰 소리야?”
최재환은 높낮이 없는 어조로 그녀를 훈계하고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그 말대로 몇몇 팬들이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말없이 서 있는 권혜선. 슬기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나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최재환을 쫓아갔다.
“형······.”
“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차에나 타.”
나는 한마디 말도 붙이지 못하고 차에 탔다. 곧이어 뒷좌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송이를 볼 수 있었다.
“송이야, 괜찮아?”
그녀는 몸이 안 좋다고 했다. 그래서 방송국에도 들어가지 않고 차에서 쉬는 중이었다.
“예, 괜찮아요.”
“가는 길에 병원 들리자.”
“아니야, 진짜 괜찮아요.”
“그러게 어제 편육을 그렇게 많이 먹더라.”
“아니거든요.”
한송이가 입술을 뾰족 내민다. 지쳤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 모습에 나도 더 말하지 않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재환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3W 팀은 이제야 천천히 차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드르륵.
밴의 뒷문이 열리고 그녀들의 스타일리스트가 먼저 올라탔다.
이름이 보라였나.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 어떻게 연기자들보다 짙은 향수를 쓰나 싶은데, 아무튼 그 뒤를 따라 탄 권혜선의 시선이 또 나를 쏘아본다.
‘쟤는 왜 나한테만 자꾸 저러는 거야?’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아무튼 그녀들이 모두 타고, 잠시 뒤 최재환이 차에 타 룸미러를 만지며 나를 불렀다.
“시현아.”
“어?”
“바이바이 민 팀장님한테 전화 왔는데······.”
“근데?”
“판을 키우자는데?”
“뭐?”
판을 키우자고? 그게 무슨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