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33화 (3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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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 온다, 노 저어라 (2)

타석에 강현 실장(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

딱!

강 실장이 휘두른 배트에 공이 튕겨 나갔다. 그런데 소리가 좋지 않다.

공은 파울 존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투수 앞 땅볼로 굴러갔다. 그 바람에 2루로 진루하던 주자가 바로 잡혔고, 용을 쓰고 1루로 달리던 강 실장도 연달아 잡혔다. 심지어 강 실장은 중간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아웃! 아웃!”

심판을 맡은 윤석규 부장은 흥이 제대로 난 듯 보였다. 반면 팀을 위기에 빠트린 강 실장은 좀 전에 내던졌던 배트를 주워들며 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장 조진수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아 자식아, 내가 그냥 번트하라고 그랬잖아!”

“죄송합니다.”

“어이구 이걸 그냥··· 너 이거 얼마짜리 내기인지 알아?”

조 팀장이 구박하는 통에 강 실장은 고개를 못 들고 운동장 스탠드 구석에 앉았다. 불만으로 입술이 빼죽 나왔지만, 그래도 게임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법이다.

“꺄아아! 카리스마 박 상무님!!”

여직원들이 난리가 났다. 막대 풍선은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거람.

“카리스마 박! 카리스마 박!”

“카리스마 박! 카리스마 박!”

이 시끄러운 소리는 박창수 상무의 별명이다. 그는 평소 말이 없지만 무심한 듯 직원들을 챙기는 상사의 이미지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차 대표를 설득해서 가정이 있는 여직원들은 무조건 정시 퇴근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현재는 여직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휭! 휭!

박 상무는 덩치만 봐서는 씨름 선수 저리가라다. 지금도 방망이를 천천히 휘둘렀을 뿐인데 바람 소리가 쌩쌩하다.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보이는 근육은, 흡사 싱싱한 문어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를 맞이할 상대 팀 투수는 자칭 중학 야구부 에이스였다는 최재환.

“꺄!! 최 실장님 파이팅!!”

“최 실장님 멋있다!”

주책없는 여직원들의 모습에 강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흥, 최 실장은 무슨.’

강 실장이 보기에는 최재환이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저 사람 좋게 생겨 여자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휘익!

최재환이 크게 오른팔을 휘두른다. 그가 던진 공이 큰 궤적을 그리며 포수 미트에 쏙 들어갔다. 반면 타석의 박 상무는 미동도 않는다. 그러더니 두 번째 공이 날아오자.

탕!

엄청난 소리다. 배트에 맞은 공은 마치 총알처럼 운동장 하늘을 가로질렀다. 휘이이! 날아간 방향은 파울존.

“우와! 저거 홈런이죠?”

“아니야, 저건 파울이야.”

천진한 얼굴로 묻는 여직원에게, 강 실장은 턱을 받친 채로 대충 대답했다.

“왜에? 하늘로 날아갔잖아요?”

여직원들은 룰도 모르면서 그냥 하늘로 날아가면 홈런이란다. 쯧쯧, 강 실장은 그녀를 외면하며 혀를 끌끌거렸다. 그때 운동장에 카니발 차량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내린 이는 배우 이시현과 그의 스타일리스트인 한송이였다.

‘어? 한송이잖아?’

강 실장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의 요즘 최대 관심사 한송이··· 듣기로는 아주 엉망이라는데.

며칠 전 중견 배우 최미숙의 영화 시사회가 있었는데, 지에스에도 초청표가 왔고, 이시현이 참석했었다. 지금은 여기저기 얼굴을 비칠 때라서 그런 일정이 있으면 회사에서는 우선으로 이시현을 돌리고 있다.

‘비와 바람에 살다······.’

그런데 이날 이시현이 입은 옷이 흰 통바지에 파란색 목폴라.

기자들이 술렁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튼 그 일로 이시현이 기자들에게 눈도장은 확실히 찍었다. 패션 개척자라나 뭐라나. 성인식을 방금 치른 스머프가 왔습니다?

“오빠, 야구 할 줄 알아요?”

한송이의 질문에 이시현은 씩 웃으며 서둘러 푼 넥타이를 그녀에게 건넸다.

“내가 이래봬도 야구부 에이스 출신이야.”

“칫, 최 실장님도 그렇게 말했거든요? 무슨 에이스가 그렇게 흔해요?”

“그래? 훗.”

이시현이 긴 다리를 성큼 내밀어 운동장으로 달려간다.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았기에 정장 차림에 셔츠 단추만 푼 모습이다.

“야, 이시현! 너 그러다가 다쳐!”

최재환이 외쳤지만, 이시현은 피식 웃으며 정 이사에게 글러브를 건네받았다. 정 이사는 늙은 몸은 죽어야 해, 라면서 허리를 툭툭 치고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최 실장, 공 받아!”

심판이 새 공을 건네자 잠시 중단됐던 경기가 다시금 이어진다.

점수 차는 1점.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최재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타석의 박 상무를 바라봤다.

‘조심··· 해야 하다. 박 상무는 괴물이니까.’

관찰력이 집중된 그의 시선에도 카리스마 박 상무는 표정 하나 없는 포커페이스로 배트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포수가 직구를 던지라는 사인을 주자 최재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것도 아니야.’

이어진 사인에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자 밖에서 구경하고 있던 차 대표가 외쳤다.

“그냥 던져 이놈들아!”

곧바로 이어진 최재환의 와인드업.

휘익!

날아간 공.

탕!

이번에도 공은 어김없이 하늘로 뻗었지만, 방향을 잃은 뜬 볼이다. 엄청난 속도로 치솟은 공이 운동장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이시현이 뒤로, 뒤로 물러났다.

“시현아 잡지 마!”

최재환이 외쳤다. 초보자가 괜스레 공 잡는다고 까불다가는 크게 다친다. 더구나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 공이 자칫 얼굴에라도 떨어지면 대형 사고다.

“이시현! 피하라니까!”

최재환이 외쳤지만 이시현은 오직 하늘만 보고 있었다.

휘이이!

공이 떨어진다.

“어··· 어··· 어······.”

구경하던 이들이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웃!”

윤 부장의 우렁찬 외침!

“꺄아아!!”

“이겼다!!!”

이시현이 글로브에 잡힌 공을 높이 흔들자 그제야 최재환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반면 박 상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하지만 강 실장은 그들의 모습보다는 여전히 한송이에게 눈이 가 있었다. 그녀는 카니발 옆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여동생이구나.’

한송이의 동생은 지에스엔터테인먼트 연습생.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웃음도 간간히 보이고, 한송이가 동생 이마에 붙은 잔 머리카락을 쓸어 내주는 모습. 그 모든 장면에 강 실장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하지만 여직원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에 그 같은 감상도 길지 않았다.

‘어이고, 지랄들 한다.’

강 실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운동장에 있는 이시현을 돌아봤다. 녀석은 지금 최재환을 얼싸안고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저기, 강 실장님.”

옆에서 들린 소리에 강 실장이 고개를 돌렸다. 3W 리더 권혜선이었다. 그녀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쓸어 올리며 그의 곁에 다가왔다.

“왜?”

“저, 조 팀장님이··· 이거 사오라고.”

그녀가 망설이며 종이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별의별 물건들이 적혀 있었다.

‘조 팀장··· 이 개······.’

꼭 이런 날에 심부름이다.

“그래, 알았어. 근데 요즘 별일 없지?”

“예.”

권혜선이 살짝 미소를 보인다. 붉은 입술에 가지런한 치아가 돋보인다.

운동장 스탠드를 벗어난 강 실장은 주차장으로 향하며 자연스레 주먹을 쥐었다.

‘권혜선을 잡아야 해.’

지금 그는 맡고 있는 배우가 없다. 그렇다고 신인을 맡을 수는 없고, 괜찮은 애들은 조 팀장과 윤 부장이 관리하고 있으니 끼어들기가 쉽지가 않다.

‘윤 부장······.’

그렇게 뒤에서 살살거렸건만, 최근에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그래. 권혜선이하고, 송이경··· 그 둘만 잡자.’

물론 권혜선은 가수 그룹으로 분류되어 1팀에서 맡고 있지만, 좋은 소식은 권혜선이 연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2팀이 맡을 수밖에 없지.’

보통 2팀의 매니저들은 1팀을 거쳐서 들어온다. 어떻게 보면 게임의 튜토리얼 모드처럼 1팀에서 매니저의 기본 소양을 배워 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2팀의 매니저들 대다수는 가수들의 생리와 그 바닥 돌아가는 걸 어느 정도 경험해본 반면, 1팀 소속의 매니저들은 연기 쪽은 잘 모른다. 그러니 잘하면 이번에 강 실장이 3W를 통째로 인계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송이경은 확실히 될 재목이고.’

지금 순간 강 실장의 눈이 번뜩인다.

**

「2000년 7월 20일 목요일」

“예, 오늘은 요즘 가장 핫한 걸그룹이죠? 3W 여러분 모시겠습니다!”

라디오 부스 안에는 라디오 디제이 현승아와 3W 멤버들, 그리고 나 이시현이 함께했다.

“그럼 청취자 여러분께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디제이 현승아의 말이 떨어지자 3W 리더 권혜선이 예쁜 미소를 보이며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3W에서 리더와 보컬을 맡은 권혜선입니다.”

“서브 보컬을 맡은 레니입니다.”

“여러분 안녕! 귀여움과 랩을 맡은 슬기예요!”

마지막으로 슬기가 발랄하게 인사를 하자 디제이 현승아가 바로 질문을 했다.

“슬기 씨가 귀여움이면, 나머지 분들은 뭐예요? 혹시 섹시?”

그러자 권혜선이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뗐다.

“섹시는 아니고요, 저는 청순.”

“저는 터프요.”

레니가 내키지 않은 말투로 대답하자 슬기가 쿡쿡, 웃었다.

“슬기 씨 왜 웃으세요?”

“레니가 원래 청순 맡고 싶다고 떼썼거든요.”

“야, 내가 언제?”

“맞거든?”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권혜선이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디제이 현승아가 피식피식 웃다가 끝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시죠?”

그녀의 질문과 함께 3W의 시선도 나한테 꽂혔다. 지금의 나는 속된말로 소속사 밀어주기로 이곳에 합류해 있는 상태였다. 3W 스케줄에 밥숟가락 얹었다는 얘기.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 이시현입니다.”

“아, 배우시구나. 여러분 지금 안 보이시겠지만, 굉장히 잘생긴 분입니다.”

“아닙니다. 과찬입니다.”

“에이, 제가 근래 본 남자 중에서 탑입니다! 평소 인기 많으시겠어요? 안 그래요, 혜선 씨?”

디제이 현승아의 질문에 나를 보는 권혜선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다. 서로가 마주 본 시선에서 아찔할 정도로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담고 있으니 정신이 흐려질 것만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난번 미용실에서 마주쳤을 때는 그녀의 눈빛에서 불편함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또 그런 기색이 없다. 이상하네. 권혜선이가··· 원래 이런 아이였나.

“저희 소속사에서도 저분 좋아하는 연습생들 많아요.”

“아, 두 분 같은 소속사?”

알면서도 능청을 떠는 디제이 현승아.

“그렇긴 한데, 어떻게 보니 스케줄이 그렇게 됐네요?”

“에이, 눈에 빤히 보인다. 한식구라 이거죠? 확실히 요즘 3W가 대세는 대세네요.”

“우리도 회사에서 시키면 어쩔 수 없는걸요.”

권혜선의 이어진 말에 라디오 부스 밖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최재환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디제이의 말은 조크라고 볼 수 있지만, 그녀의 말은 원치 않은 스케줄이었다는 뉘앙스가 배 있기 때문이다.

“아, 회사에서 들으면 어떻게 해요? 혼나는 거 아녜요?”

“후훗, 그건 아니고요.”

권혜선이 손사래를 친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레니가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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