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32화 (3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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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 온다, 노 저어라 (1)

「2000년 7월 19일 수요일」

‘후······.’

나는 잠시 거울 앞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평평한 유리에 비친 얼굴.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는 이 모습이, 이런 내가 익숙해져 간다.

“시현 오빠!”

화장실 밖에서 스타일리스트 한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나이 올해 스물다섯. 붙임성 좋고, 성격 좋고, 실력은··· 아무튼 괜찮은 친구다.

‘최재환이가 언제나 마음을 열어주려나.’

그는 한송이를 못마땅해하고 있다. 좀처럼 그녀 앞에서는 웃지도 않고. 이유는 그녀의 실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유예기간이 생겼다. 1개월을 해보고 아니면 그만두기로.

이제 열흘이 지났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그녀는 최재환에게 발전된 실력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진짜, 관두게 하려나.’

최재환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잘은 모르겠다. 그는 자기 일에서는 그냥 넘어가는 일도 내가 관련된 일이면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듯 단호히 행동한다.

“오빠아!”

“알았어.”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그녀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조급해진다. 피식 새 나오는 웃음을 뒤로하고, 나는 서둘러 손을 닦은 뒤 밖으로 나왔다.

“급해요, 급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송이가 품에 끌어안고 있는 정장과 셔츠를 내게 건네고, 코끝을 찡긋 올린다.

“금방 갔다 올게요!”

이번에는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갈 차례.

우리 둘이서 이렇듯 번잡스럽게 행동하는 이유는 오늘 최재환이 곁에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나와 한송이, 둘만이 바이바이의 지면 광고 화보를 위해서 목동에 있는 스튜디오를 찾았다.

‘흠흠······.’

혼자가 된 나는 콧노래를 살살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음이 편해져서일까. 요즘 들어 이렇듯 콧노래가 자주 나온다.

‘응?’

저 멀리서, 늘씬한 여성이 긴 다리를 뽐내며 오고 있다. 붉은색 비키니만 걸친 채로, 어깻죽지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 투명한 피부에 비친 실내 햇살이 찰랑거린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더니 눈웃음을 살짝 보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저 친구··· 나중에 이름 좀 알렸지.’

좀 전의 그녀는 오늘 나와 함께 화보 촬영을 한 모델인데, 기억하기로는 훗날 제법 유명해진다.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않지만.

참고로 오늘 콘셉트는 첩보 영화 속 주인공과 히로인이었다. 바이바이 쪽에서는 CF 결과물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그래서 예정에 없던 지면 광고를 추가로 계약했다.

잠시 뒤에 한송이가 나왔다.

“주세요, 오빠.”

그녀는 내가 들고 있던 옷과 구두를 받아갔다. 그런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뭐야, 저 여자.”

“왜?”

“오빠가 마음에 든다고 꼬신다네요. 지금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있어요. 어디 예의 없게 화장실에서 통화야?”

투덜투덜.

“훗.”

나는 피식 웃음으로 한송이의 투정을 들어줬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그저 가만히 있어도 나라는 존재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것이 얼굴이든, 혹은 어떤 매력이든. 내가 이제 그런 존재다.

“오빠, 가요.”

촬영은 이미 끝났으니, 서둘러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나온 우리는 차에 실을 짐을 정리했다.

촬영 중 갈아입었던 옷가지들과 신발, 구두, 소품들.

그러고 나서야 옷매무새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한송이가 내게 달라붙었다. 맑은 하늘, 뜨거운 태양, 그리고 옷깃을 살랑살랑 흔드는 선선한 바람이 우리를 감싼다.

“매니저님은 바로 운동장으로 가신다죠?”

한송이가 내 머리에 집중하며 물었다. 작고 가는 그녀의 손가락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얼굴을 들고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참, 매니저님도 대단하다. 찾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지?”

한송이의 말대로 매니지먼트 사업부 2팀에서 최재환이라는 존재는 스페셜 아이템 같은 존재다. 스케줄이 꼬이는 날이면 다들 최재환에게 부탁을 해왔다. 물론 직접적인 부탁 전화보다는, 조 팀장이나 윤 부장을 통한 ‘지시’가 내려온다.

“형이 일을 잘하니까.”

“하긴, 사무실 사람들이 최 실장님 요즘 원맨올킬이라고 하던데.”

“원맨올킬?”

“아, 다 됐다.”

내게서 한 발짝 떨어진 한송이가 흐뭇한 듯 미소를 띠고 나를 본다. 그러더니 다시금 짐에 손을 대며 바람에 얘기하듯 속삭인다.

“혼자서 다 쓸어버린다고 원맨올킬이래요. 뭐라더라? 실장 되더니 그동안 쌓아둔 내공이 폭발했다고 하던데.”

“훗.”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요즘 최재환이는 장난이 아니다. 그가 방송국에 가면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동안의 경험에 관리직함이 붙으니 방송국에서도 대우를 해주는 모양이다. 물론 아무나 대우를 해줄까. 어디어디 실장이라고 받아둔 명함이 중국집 전단지만큼 쌓여있을 피디와 작가들인데.

“근데, 조 팀장님은 1팀 지원하는 거 싫어하던데··· 왜 그런 거예요?”

한송이가 짐을 챙기다 말고 묻는다. 청색 멜빵바지 끈을 매만지는 그녀의 모습이 참 시원해 보인다.

“글쎄다. 뭐 2팀에 매니저들이 몇 없으니까 그렇겠지?”

“그런가?”

나는 에둘러 대답했다. 그녀에게 시시콜콜하게 할 얘기가 아니었다. 사실 한송이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회사의 주력이 배우보다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들어온 배우들보다는 직접 키운 가수에게 좀 더 집중하는 편이고, 그것 때문에 2팀의 매니저들은 소외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배우들이 불만을 가지는 건 아닌데, 지에스엔터테인먼트가 영입을 했을 정도의 배우라면 충분히 홀로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배우들인 데다가, 계약 조건 자체가 배우에게 유리한 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았었지만.

‘이전까지는······.’

아무튼 오늘 최재환은 3W를 지원해주러 나갔다. 3W 매니저가 탈이 났다나 뭐라나. 그리고 오늘은 회사 사내 체육대회가 있는데, 최재환은 그곳으로 바로 온다고 했다.

“하긴, 1팀은 정신이 없더라고요.”

한송이가 코끝을 찌푸린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또 묻는다. 이 녀석 오늘 질문이 많네.

“근데, 회사에서는 배우들 보기 힘들더라. 원래 그래요?”

“다들 바쁘니까.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뭐하겠어.”

“뭐 그렇긴 한데, 저는 지에스 들어오면 배우들 많이 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박한영도 그렇고.”

“아, 너 전에 있던 회사는 가수들만 있다고 그랬지?”

“예.”

한송이가 미소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아 맞아! 오빠 3W 노래 들어보셨어요? 대박이야 대박!”

“그래?”

“예, 노래 진짜 좋아요.”

3W는 지난주 2집 앨범을 냈다. 1집 앨범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었고, 올해 초 찍은 휴대폰 광고 덕에 제대로 가속도가 붙었다. 광고주 쪽도 그녀들을 전략으로 밀고 있으니 지금 시기에 앨범이 나온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무엇보다 지금 시기는 디지털 앨범이 아닌 실물 앨범에다가, CD 한 장에 곡을 꽉꽉 채우는 시기다. 그러니 활동 역시도 후속곡까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녀들 세대는 길어야 7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형태의 2세대 아이돌 그룹의 등장으로 머지않아 가요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근데 오빠, 운전할 수 있겠어요?”

한송이가 안쓰러운 시선으로 묻는다. 내가 장장 3시간 동안 서서 촬영을 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다.

“이 정도야 뭐. 그나저나 너 배고파서 어쩌니?”

촬영 중에 간식이 나오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과자와 빵 정도였다.

“훗,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오빠야말로 배 안 고프세요?”

한송이는 어깨의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며 물었다. 약간은 건들건들한 행동. 긴장을 풀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보이는 그녀의 버릇인데, 최재환 앞에서 저러다가 몇 번 혼이 났는데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운동장 가서 먹어야지. 맛있는 거 많을 걸?”

“에이······.”

그녀의 눈 밑에 두툼하게 자리 잡은 애교살이 미소처럼 기울어진다.

“왜? 윤 부장님이 맛있는 거 많이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던데?”

“그래 봤자 족발이나, 편육? 그런 거밖에 없을걸요. 윤 부장님이 말은 그렇게 해도 윗분들 눈치 보느라 함부로 법인카드 못 긁던데··· 에잇, 맛있는 거 있으면 좋겠다. 후훗.”

한송이는 수더분한 웃음을 보이며 차에 올라탔다. 나도 차에 타려고 하는데.

“시현 씨! 이시현 씨!”

저 멀리서 이시현을 외치며 오는 여자가 있었다. 바이바이 기획부서 민다영 팀장이다.

“하······. 하······.”

안경을 들썩이며 숨을 고르는 그녀. 그 모습을 내가 빤히 보자, 그녀가 괜스레 “큼!”하고 기침을 한 뒤 나를 불러 세운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찍은 지면 광고, 당장 내일 모래에 나가요.”

“그거 알려주려고 달려오신 거예요?”

“그럼요.”

민다영 팀장은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이럴 때 보면 참 어리숙한데, 일 처리는 또 확실하다.

오늘도 스튜디오 대여시간과 관련해 혼선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잘리기 직전의 직장인을 열연해서 상황을 무마한 여자다. 그런 그녀가 은테 안경을 살짝 고쳐 쓰고 내게 말한다.

“광고 반응 진짜 좋아요. 위에서도 처음에는 ‘뭐야? 장난해?’ 이런 반응이었는데, 크크··· 아무튼 나중에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더라니까요.”

그녀는 지금 기분 좋은 얼굴을 보인다. 여름의 햇살이 그녀의 진한 흑발 위에 내려앉고, 그녀의 눈동자에 내 미소가 내려앉는다.

“잘됐네요.”

“나중에 뜨고서 나 모른 체하면 안 돼요?”

“에이, 광고 한 번에 뜨면 대한민국 스타 천지게요?”

내가 너스레를 떨자 그녀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껑충 뛰듯 두 손바닥을 부딪쳐 박수를 쳤다.

“맞아 맞아! 나 신문 봤는데.”

“뭘요?”

불안해서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에 민다영 팀장이 깔깔 웃으며 내 팔을 두드린다. ‘저기, 아픈데요’ 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나는 그저 그녀의 입술이 무슨 얘기를 하나 쳐다봤다.

“비와 바람에 살다, 시사회요.”

“아······.”

비와 바람에 살다. 잊고 싶은 최근의 기억이다.

내가 탄식하는 사이, 한송이는 짐짓 못 들은 척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다영 팀장은 깔깔 웃으며 계속 말했다.

“기사 제목 봤어요? ‘성인식을 방금 치른 스머프가 왔습니다’ 였는데, 하하!”

며칠 전 시사회에 갔었다. 그때 한송이가 준비한 옷이.

아무튼 어서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인데, 민다영 팀장이나 다른 사람들은 아마 두고두고 얘기할 듯 보이고··· 어휴, 한숨이 나온다. 한송이가 선물해준 내 첫 번째 흑역사.

“근데, 오늘은 최 매니저님 안 오셨네? 아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정신없어서······.”

민다영 팀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형, 오늘 일이 있거든요.”

“어머, 그래도 매니저 없이 이렇게 혼자 다녀도 돼요?”

“마침 오늘 또 회사에서 운동회가 있어요. 아마 형도 지금쯤이면 운동장에 있을 거고.”

“운동회요?”

“예. 저희 회사에서 해마다 이 무렵에 하는 행사인데, 보통은 일주일 전부터 스케줄을 조절해서 당일 다 빼거든요. 그래서······.”

내 말에 민다영 팀장이 덜컥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짙은 두 눈썹을 모으며 나를 안쓰럽게 본다.

“미안해요, 우리 때문에··· 지면 광고 일정이 갑자기 잡혀서.”

“에이, 미안하긴요. 저야 좋죠, 돈 버는 일인데.”

“훗, 그건 그래요 잉?”

이 여자 미소가 참 맑다. 가벼운 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 그래서 보는 사람까지 즐겁게 만드는 그녀의 웃음이 나는 마음에 든다. 물론 그녀와 함께 일하면서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도 마음에 들고.

“아, 시현 씨도 영화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조만간에요.”

가경 작가가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하고 있다. 슬슬 마무리 작업 중이라곤 하는데, 최재환은 유독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떤 내용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는 모양인데, 정작 작가한테는 한마디도 못 묻고 있고.

“잘되면 좋겠다. 어떤 영화예요? 아, 잠깐만요.”

얘기가 길어질 듯 보였지만 그녀가 불쑥 허리를 숙이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더니 휴대폰 액정을 보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해요, 시현 씨. 다음에 봐요.”

그녀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뒤돌아선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카니발에 올라탔다. 먼저 탄 한송이가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둘러매며 외친다.

“출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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