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31화 (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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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해주는 사람들 (4)

“예?”

최재환은 당황하고 있었다. 정 이사의 전화였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바로 들어오라는 얘기였다.

-너 임마, 왜 얘기를 안 했어?

“그게 무슨······.”

-어머니가 그렇게 위독하면 얘기를 했어야지!

평소 언성 한번 높이지 않던 양반이 보기 드물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건······.”

최재환은 어금니를 깨문 채로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젠장, 회사에까지 연락한 거야?’

서민지.

그녀가 문득 떠오른 최재환.

“하지만 저 혼자 들어가면, 재인이는······.”

-차 대표님 딸이 지금 일본에 있다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바로 들어와.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뭐야 이거······.”

난감한 최재환은 입술만 핥았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문자였다.

‘응?’

다시 휴대폰을 열어 본 최재환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저, 서민지입니다. 오빠. 어머니 떠나셨어요. 꼭 와주세요.

해가 너무 쨍쨍해서, 그래서 최재환은 비틀거렸다. 그대로 자판기 옆의 벤치에 주저앉았다.

‘떠났··· 다고?’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정 이사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전화를······.’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사무실에 들어오니 책상에 비행기 표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조이치 기획사에 얘기를 전한 모양이었다.

최재환은 비행기 표를 손에 들고 인근에 있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눈은 멍했고, 머리는 여전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와서 뭘.’

지금 와서 뭘 한다는 말인가.

아프다는 양반 한 번 찾아간 적이 없거늘.

‘가서 뭘 해?’

화도 나고, 짜증도 솟는다. 그가 비행기에 오른 이유는 그저 회사가 알았다는 사실,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일 뿐. 결코 엄마의 마지막이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알았으면··· 장례식장에 찾아갔겠지?’

답답하다. 가슴에 고인 체기처럼 불편하고 께름칙하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그는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 한잔을 건네받았다.

‘후······.’

겨우 한 모금을 넘겼을 뿐이었지만 빈속에 마시니 열기가 후끈 올랐다.

‘이런.’

비행기의 좁은 창 너머로 낙뢰가 반짝인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의 장례식장도 비가 쏟아졌는데.

아버지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슬펐다. 그렇다고 눈물이 난 것은 아니었다. 눈물은 삼촌과 함께 반지하방을 떠나던 날에 흘린 것이 전부였다. 그저 묵묵히 어린 상주로서 자리를 지켰다. 해야 할 과정이었고,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때······.’

하지만 지금도 풀리지 않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그날 장례식 장에서, 어린 상주는 졸음을 견디지 못해 장례식장 한편에서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에서 엄마를 봤다. 그를 계속 쓰다듬었고, 울고, 흐느끼다 사라졌다. 일어났을 때 엄마는 없었다. 그런데 그리운 온기가 느껴져서 최재환은 장례식장을 나와 복도를 가로질렀다.

중학교 1학년의 최재환은 실체 없는 존재를 찾아 사람들 사이를 헤맸다. 그러다가 어떤 여자의 뒷모습을 봤다.

엄··· 마, 하고 다가가려 했는데. 어린 최재환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그대로 뒤돌아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그뿐이었다.

그때의 여자가 엄마였는지, 아니었는지.

왜 그때 더 쫓아가지 않고 그냥 돌아왔는지.

어쩌면 또 상처를 받을게 겁이 나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안한데, 한 잔만 더 부탁합니다.”

최재환은 쓴 미소를 보였다. 스튜어디스는 그가 취했는지를 살피듯 눈을 기울이더니 다시 채워진 잔을 가져왔다.

우르르. 쾅쾅.

좁은 창 너머의 구름 사이로 낙뢰가 번쩍인다. 비행기 안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의 천둥소리가 지금 다시 들려올 뿐이었다.

**

“여기다 놔!”

차 대표가 지시를 내리자 장례식장에 근조 화환이 일렬로 세워졌다. 지에스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근조 화환을 보내왔는데, 그만큼 최재환이 가진 인맥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 실장은?”

차 대표가 재촉하듯 묻자 박 상무가 시계를 살폈다.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공항에 강 실장 보내놔서 지금 여기로 오고 있을 겁니다.”

“아니, 그 자식은 이런 일이 있으면 얘기를 해야지.”

차 대표는 최재환의 어머니가 그동안 아팠으며, 이번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내내 화를 냈다.

“니들은 그런 사실 몰랐어?”

차 대표의 질문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다.

“아니 동료가 그런 사연을 가지고 있으면··· 아이고.”

차 대표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상주 자리에 서 있는 이시현을 바라봤다.

“쯧쯧, 그래도 저놈이 의리는 있네.”

차 대표를 비롯한 임원진은 이시현에게서 최재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시현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을 두고 많이 고민했으며, 최재환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차 대표를 비롯해 임원들은 최재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시현이 상주 자리에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제대로 된 상주가 오면 뭘 하든 하자는 게 차 대표의 생각이다.

“하······.”

차 대표가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을 보며 박 상무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어디 최재환이가 지일 시시콜콜 얘기할 놈입니까. 왜, 예전에 3W 첫 무대 오르는 날에도 급성 맹장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애들 무대에서 내려올 때까지 내색하지 않던 놈 아닙니까.”

그 말에 잠시 생각을 곱씹던 차 대표가 입을 열었다.

“장례비용은 회사에서 처리해.”

“이미 조치해놨습니다.”

“그래. 후······. 장례식장이 왜 이렇게 비어?”

“곧 있으면 직원들도 오고, 사람들도 올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최재환이 명함 부지런히 돌린 놈인 거. 사무실에 직원 놔뒀으니까, 지금 여기저기 전화하고 있을 겁니다.”

이 바닥 명함, 얼굴도장.

“저 친구야?”

차 대표의 시선이 장례식장 한편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닿았다. 서민지. 그녀 역시 상복 차림에 지친 모습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퉁퉁 부어있다.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사람만이 몇 없는 문상객들 챙기랴, 그녀를 챙기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참, 인생이란 게······.”

차 대표가 한숨을 다시 내쉬는데, 멀리서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최재환이었다. 녀석은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차 대표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넙죽 인사를 해온다.

“다녀왔습니다, 대표님!”

“너 임마!”

차 대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천천히 허리를 편 최재환이 목울대를 꿀렁거린다. 그 모습에 화를 낼 수 있는 이가 여기 누가 있을까. 한숨을 삼키며, 차 대표는 최재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봐. 어서.”

최재환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흡사 다리를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이었다. 서민지가 그를 보고는 힘을 내 일어났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그가 멈춰 선 곳에는 이시현이 서 있었다. 곁에 온 서민지가 흐느낌 속에서 얘기했다.

“시현 씨가, 자주 찾아와줬어요.”

“···시현이가?”

최재환은 무심히 묻고 이시현을 바라봤다. 이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최재환을 마주 보다가, 그를 붙잡고 서민지를 돌아봤다.

“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우리 형··· 옷은 갈아입어야죠.”

최재환은 얼떨결에 사람들이 없는 빈 곳으로 이시현과 함께 이동했다. 그곳에서 이시현이 검은 양복을 그에게 건넸다.

“입자. 형.”

이시현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니 최재환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오는 동안 강 실장에게서 이시현이 얘기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얼마나 화가 났었는데··· 왜 제멋대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따져볼 생각이었는데.

“알아, 나 주제넘은 짓 한 거. 나중에 한 대 맞지 뭐. 그러니까 형······.”

마주 본 이시현의 눈동자가 붉어지자 최재환은 그제야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정신은 여전히 반쯤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옷을 다 입자.

“잠깐만.”

이시현은 매고 있던 자신의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는 최재환의 목에 걸어주고 정리를 해주며 말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굵은 눈물이 이시현의 하얀 볼을 타고 흐른다.

“미안했다고······.”

“미안했겠지. 버릴 때는 언제고 지금 무슨 낯짝으로 연락을······.”

그러게 왜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던 분노가 다시 최재환의 가슴에서 들썩이려는 때였다.

“수제비······.”

“뭐?”

“수제비··· 짜서 미안했다고.”

그 말에 최재환은 두 눈만 깜빡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턱 주름을 잔뜩 모은 채로 뒤돌았다. 그 상태로 엄마의 영정 앞에 섰다.

“별로··· 안 짰는데.”

주저앉은 최재환의 얼굴에서 눈물이, 콧물이, 흐느낌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보름 후, 2000년 7월 12일 수요일」

일상은 다시 흘러간다. 나는 마침내 지에스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다.

계약 기간은 4년, 계약 조건은 회사와 5:5(제반 비용 회사부담), 그리고 4팀 대신에 새로운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를 요구했다. 그런 식으로 몇 가지 불리했던 조건과 유리했던 조건을 적절히 배합했다.

이제 나 이시현은 지에스엔터테인먼트의 간판 스타가 될 준비가 됐으며, 새로운 매니저와 함께 날아오를 준비가 됐다.

새로운 매니저, 일본 조이치 기획사 소속의 최재환 실장.

최재환은 몬스터 프로젝트에서 빠지기로 했다. 그는 내 곁에 남겠다고 했지만, 조이치로 소속 신분이 넘어간 상태여서 다시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물론, 몸은 이미 서울에 와있지만.

“형!”

지금 나는 공원 화장실 앞에서 최재환을 기다리는 중이다.

“갈 거야, 좀 기다려.”

한동안 우리는 서로를 침묵으로 대했다. 최재환은 내 행동을 나무라거나 원망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한 일을 두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건방졌고, 주제넘었으며, 무책임했다. 그로 인해 내가 이 모든 걸 받아들이기에 필요했던 긴 시간을, 최재환은 당장에 준비 없이 마주 해야 했다.

그렇지만 나도 변명거리는 있다. 내가 살아가며 품어야 했던 그 멍울을 젊은 최재환에게는 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삶의 어떤 순간은, 때로는 준비 없이 마주할 때도 있는 법이다.

“혀엉!”

“알았다고! 나간다고!!”

어찌 됐든 내가 최재환의 인생에 끼어든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같지만 엄연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이제 최재환의 인생에 끼어드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그래, 나는 이제 이시현으로만 살아갈 것이다.

“최 실장니임!”

“알았어, 알았어, 간다 가!!”

화장실에서 나온 최재환이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투덜댔다. 그 모습에 나도 질세라 투덜거렸다.

“아니 무슨 화장실에서 30분을 있어?”

“너무 맵게 먹었나 보다. 그러게 냉면 먹자니까, 순댓국은.”

“다대기 제일 많이 풀어 드신 게 누군데? 아니에요? 최 실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그냥 형이라고 불러 임마. 아 자식, 요즘 들어 맨날 최 실장님이래. 지금 놀리냐?”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운전석에 오른 최재환이 맑은 미소와 함께 묻는다.

“준비됐습니까, 이 배우?”

“예, 준비 끝났습니다.”

“저도 준비 끝!”

뒷좌석에서 새로운 그녀, 스타일리스트가 손을 번쩍 든다.

한송이라고, 어리지만 실력 있는 친구라고 한다. 자칭 말이다.

“그럼, 이시현 배우 팀, 이제 움직입시다!”

한여름의 햇살 아래. 최재환 실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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