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들 (2)
순간 최재환의 시선이 강 실장에게 꽂혔다. 아직 결정이 난 것도 아니고, 지금 막 얘기를 나누고 왔건만. 그새 소문이 퍼졌단 말인가.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
“뭘 몰라. 이거 좋은 기회인데. 회사에서 몬스터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어. 너 여기서 잘되면 팀장 건너뛰고 바로 부장이야.”
지에스에는 팀장이 과장급인 반면, 딱히 차장 자리는 없다. 그런 구색을 갖출 만큼의 사무적인 직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현이 때문에 그래?”
최재환이 머뭇거리다가 스윽 이시현을 쳐다봤다. 그러자 강 실장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씨익 미소를 보이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시현이는 4팀에서 맡는다며? 부장님이 나보고 4팀 합류하라고 넌지시 얘기하더만.”
눈앞의 능글능글한 미소에 최재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 실장이 어깨를 으쓱 올린다.
“뭘 또 그렇게 봐? 나 아직 대답 안 했어, 네 자리 뺏는 것 같아서. 네가 결정하면 그때 나도 결정하려고.”
강 실장은 그 말을 끝으로 빨대를 물어 커피를 쪽쪽 빨아마셨다.
최재환 역시 찌푸린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멈칫하고는 자신의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전화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테이블에서 멀리 물러났다. 비상계단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귓등에 휴대폰을 바싹 붙였다.
“어이고, 최재환이 바쁘구만.”
강 실장은 최재환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는 이내 이시현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눈을 번뜩이면서, 넌지시 물었다.
“시현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떤 거요?”
이시현이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마주보자 강 실장이 픽 웃는다. 입 꼬리도 씨익 올리고.
“재환이, 이번에 좋은 기회거든. 시현이 너로서는 어찌됐든 보내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형이 알아서 할 일이죠.”
“그래 뭐. 근데 그보다 우리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뭐가요?”
“뭐긴, 내가 배우 이시현 매니저가 될 수도 있는 거고.”
강 실장이 생글생글 웃는다. 얄미운 인간상.
“안 될 수도 있는 거죠.”
“어?”
이시현의 말에 강 실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는 사이 통화를 끝낸 최재환이 곁에 다가왔다.
“시현아 가자.”
최재환은 이시현을 데리고 카페를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강 실장의 멍한 얼굴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최재환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약속 펑크 났다.”
“펑크?”
스케줄도 없는데, 펑크 날 약속이면.
“그래, 가경 작가님이 오늘 일이 생겼대. 그래서 내일이라도 다시 만날까 했는데··· 시간이 안 된다네. 조만간에 다시 보자는 전화야.”
“그래?”
“하··· 젠장, 쉬운 게 없네. 이거 느낌 안 좋은데.”
또 일이 나가리 될 것 같으니 최재환의 얼굴이 심각하다.
이시현이 그런 최재환의 등을 팡 두드렸다.
“우리 힘냅시다.”
“자식···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스케줄도 없는데, 넌 그냥 집에서 쉬어라.”
최재환은 엘리베이터에 등을 기대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이시현이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형, 나 가볼 데가 있어.”
휴대폰을 매만지던 최재환이 고개를 든다.
“어디를?”
의아한 듯 보는 그에게 이시현은 미소만 보였다. 묻지 말라는 거다.
“데려다 줘?”
“아니야.”
“그래, 맘대로 해라 임마. 그럼 나는 다시 올라가야겠다.”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 도착했지만 최재환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에 홀로 내린 이시현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시현아, 미안하다. 너한테 무슨 얘기라도 해주고 싶은데, 내 입장이 좀 그러네.”
계약서에 대해서 조언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그런 마음이 들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배우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됐어. 어차피 계약을 해도 안 해도 장단점이 있는 거니까, 결국 내가 판단해야지.”
“그래.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면 나한테 먼저 알려줘. 그리고 아까··· 잘 했어. 훗.”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서로의 시선이 반쯤 남았을 때, 이시현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었다. 최재환이 눈썹을 쫑긋 올리고 이시현을 쳐다봤다.
“왜?”
“형, 차키 좀.”
“차? 네가 운전하게?”
“사고 안 낼게. 조심조심.”
미심쩍어 하던 최재환이 카니발 키를 툭 던졌다.
“운전 조심해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서로의 눈에서 사라진 두 사람. 그 모습들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
「2000년 6월 19일 월요일」
재계약 제안을 받은 뒤로 열흘 가까이 지났다. 나는 고민 끝에 3개월의 남은 계약기간 동안 좀 더 생각을 해보겠다는 답을 했다. 물론 차 대표는 은근히 불쾌한 기색이었다.
문제는 가경 작가가 그 이후 연락이 없다는 점이다.
박한영의 얘기로는 일본에 일이 생겨 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그거야 속편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고. 항상 그렇듯 이런 일에서 당사자는 피가 마르는 법이다.
‘하지만··· 뭐.’
나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이젠 제법 미소가 잦아 진 것 같다. 나이 먹고 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잊어버릴 정도였는데.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최재환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 회사 앞 공원, 나무 그림자 아래의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중이다. 왜냐하면, 일이 없기 때문에. 맴맴맴.
“벌써부터 매미가 우네.”
내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자 최재환이 쭈쭈바를 입에 문 채로 웅얼거렸다.
“씨끄럽··· 웅웅 올해도··· 웅웅 좋은 날씨였으면··· 웅웅.”
“올해도 매미 울음소리 듣기 좋은 여름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좀 전의 웅얼거림을 해석하자 최재환이 픽 웃었다. 그러더니 쭈쭈바를 입에서 떼고 나를 쳐다본다.
“근데 너 요즘 뭐가 그리 바빠?”
“뭐 어때, 일도 없는데.”
“그렇긴 하지.”
빠른 체념. 앞으로 가경 작가와의 만남 여부에 따라서 이 상황이 종식되냐, 아니면 이어지냐가 결정 될 것이다.
“형은, 일본 언제 가?”
최재환은 일본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내가 아직 회사와의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고, 가경 작가와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장고했지만, 결국은 인생의 결정을 내렸다. 그 대신 가경 작가와의 만남까지는 나 이시현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섭섭하지 않냐? 너 버리고 가는 건데.”
최재환이 묻는다. 나는 긴 다리를 뻗으며 대답했다.
“섭섭하긴, 아기 새는 언젠가는 어미의 둥지에서 나오는 법이라며?”
“누가 그래?”
“다큐멘터리에서.”
“헐······.”
뜨악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 최재환. 이어서 그는 나른한 하품을 하고, 짧은 숨을 고루 내쉰 뒤에 입을 열었다.
“시현아······.”
“알아, 알아. 또 미안하다고? 몇 번째 얘기하는 거야.”
최재환은 자꾸만, 내게 미안하다고 한다. 다른 말은 없고 그 말뿐이다. 지난 열흘 최재환은 우울해 보일 정도로 조용했고, 늘 생각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오히려 말이 없으니 그의 생각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예전에 작곡가 한 녀석이 술에 취하면 음표가 눈에 보인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것처럼 최재환의 생각이 공중에서 붕붕 떠다녀 보인다. 아니면 내가 미친 건지도.
‘그래, 나는 다 안다. 너··· 네가 일본에 가려는 이유 말이야.’
지금 최재환은 그 어떤 이유를 떠나서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걸 너무 잘 알기에, 이제 나도 너를 보내주려고 한다.
‘후······.’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최재환이 곁에 없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일적인 부분을 떠나서 지금의 이 현상이 계속 유지가 될지, 혹은··· 모르겠다. 정말.
“형, 너무 걱정하지 마.”
과거 나는 이시현이 곁에 없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는 선택에 있어 큰 망설임은 없었다. 그저 쉬고 싶었을 뿐. 하지만 젊은 최재환은 이시현을 두고 많은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일이야. 내일 일본 갔다가 사흘 후에 다시 들어올 거거든··· 정리할 것도 많고. 그래도 일단 박한영에게 얘기해서 일본에 있다는 가경 작가 하고 만나 볼 거야.”
“신경 쓰지 말라니까. 일본 가면 정신없을 텐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내 배우인데.”
“그래··· 형, 내 매니저지.”
내 배우, 내 매니저.
때로는 가족보다 더 끈끈하고, 때로는 다툰 부부처럼 서로를 미워할 때도 있고, 그러나 결국에는 곁에 없으면 허전한 그런 사이.
“시현아.”
“응?”
“나, 이제 너 걱정 안 한다.”
“···왜?”
내가 묻자 최재환은 공원 한편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입가에 미소를 물고 말했다.
“예전에는 너 보면 불안했거든. 애 같기도 하고, 동생 같기도 하고··· 뭔가 항상 조급해보였고.”
쭈쭈바를 한입 쪽쪽 빨고 나서.
“근데 이제는 아니야.”
최재환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본다.
“너, 이제는 믿음이 가.”
“믿음이 간다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동안도 잘해왔고.”
“훗······.”
내가 웃자 최재환이 내 옆구리를 툭 찌르고 묻는다.
“자식아 좋냐?”
“좋긴, 내가 형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거든?”
“크크··· 하여간, 네 썰렁한 개그도 가끔 생각나겠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 최재환이 또 행동을 멈췄다. 그는 휴대폰 벨소리에 한숨과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그냥 끊고 다시 돌아온다.
“들어가자.”
회사로 향하는 중에 나는 물었다.
“무슨 전화인데, 그래?”
물론 어떤 전화인지 알고 있다. 나는 이제 이때의 기억을 오롯이 떠올리고 있으니까.
“아니야,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아는 사람.”
다시 걸음을 내딛는 최재환. 하지만 내가 여전히 멈춰있자, 그가 뒤돌아본다.
“뭐해?”
“형.”
“왜?”
“하나 묻고 싶어서.”
“뭔데?”
“만약, 형이 앞으로 쭉 이대로 살아서 마흔일곱이 된다 치자.”
“무슨 얘기야?”
최재환이 실없이 웃는다. 나는 미소 띤 얼굴로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후회가 찾아와.”
“그래서?”
“그런데, 또 어느 날 기회가 와. 지금의 형 나이로 돌아와서 마흔일곱까지의 인생을 전부 바꿀 수 있는 기회.”
“뭐 임의로 바꾸는 거야? 아니면 선택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거야?”
최재환이 호기심을 가지고 묻는다.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 답했다.
“굳이 말하면 후자 쪽.”
“흠······. 그럼, 네 질문은 지금 이 자리가 그 갈림길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
“그렇지.”
최재환은 내 허황된 질문에 가볍게 대꾸하지 않았다. 생각을 잇더니 묻는다.
“마흔일곱의 최재환은 완전 최악이야?”
“글쎄··· 애들도 있고, 아내도 있고. 누릴 것도 많이 누려봤고.”
“그럼, 난 그냥 가만두련다.”
“왜?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히 정해진 게 나아서?”
“아니.”
“그럼?”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자 최재환이 흠! 콧바람을 내쉬고, 팔짱을 낀 채로 가로수 나뭇잎에 가려진 구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흔일곱의 최재환은 그때가 힘들지는 모르지만, 서른한 살의 최재환은 지금이 즐겁거든. 마흔일곱의 최재환이 갑자기 지금 찾아와서 ‘너 앞으로 안 좋아’ 라고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네. ‘난, 지금 좋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그런 건가.
너는 서른한 살의 최재환이고.
나는 마흔일곱의 최재환이지.
우리는 같지만 다른 사람이고, 같은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먼저 과정을 거쳤다 한들, 그것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최재환의 얘기를 들으며 난 그걸 깨달은 기분이었다.
“야, 근데 그거 시나리오 짜면 재밌겠다. ATTM 애들한테 한번 흘려볼까?”
“에이, 과거로 가서 운명 바꾸고 하는 거? 흔하잖아.”
“그런가?”
“망한 거 많아.”
“흠······. 그럼 이건 어때?”
“뭐?”
“내가 네 몸에 들어가는 거야.”
최재환이 맑게 웃는다. 나는 잠시 넋이 나가 그를 바라봤지만 이내 미소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어딜 감히 그 못생긴 영혼으로 여길 들어오시려고 합니까?”
“자식아 나도 나름 매력 있거든?”
순간, 나는 성큼 다가가 최재환을 끌어안았다.
“···야? 뭐, 뭐야?”
아주 오래된 파트너, 아주 오래된 친구를 끌어안았다. 그래서 지금 내 기분은 너무도 홀가분하고 행복하다.
**
「다음 날」
-너 어디야?
“말했잖아, 일 있다고. 형은? 공항이야? 미안, 같이 못가서.”
-됐다 이놈아. 그래, 알았다. 사흘 후에 보자.
“응.”
전화를 끊은 나는 고개를 들어 요양원을 바라봤다. 하얀 건물, 오래된 유리문이 보인다. 걸음을 내디뎌 로비로 들어가자 누군가 손을 들고 나를 향해 흔들었다.
“오셨어요?”
최재환의 어머니의 딸, 그러니까··· 이 여자는 내 어머니의 딸이다.
‘서민지.’
그녀를 보고 있으니 아찔한 기억이 밀려와서 나를 괴롭힌다.
살면서 처음으로 갔던 놀이공원.
엄마와 함께 햄버거라는 걸 처음 먹어본 그날.
엄마는 그 밤에 나를 버리고 떠났다.
그것이 어린 최재환의 머릿속에 남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고 원망이었다. 그래서 엄마를 내 인생에서 지워버렸다. 그녀가 나를 버렸듯이. 그랬는데.
“들어가요.”
서민지가 나를 본다.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 아주 괜찮은 미소로 바라본다. 그녀는 나를 최재환이 키우고 있는 배우로 알고 있으며, 나는 최근 사이 틈 날 때마다 이곳을 찾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오시지, 엄마 방금 잠들었는데.”
병실로 향하며 서민지가 빙긋 웃는다. 옅지만 선이 분명한 눈썹, 미끄러지는 코, 가는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몇 번을 봐도 그녀에게 최재환과 닮은 구석은 없다. 원체 최재환은 엄마를 닮지 않았으니까. 그 대신에 아픔으로 남은 아버지를 고스란히 닮았다.
“근데, 오빠는······.”
“형은 좀 바빠서요.”
“아··· 예.”
그녀가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나 최재환은 그녀를 미워하고 싫어했으니까.
“그래도 시현 씨라도 매번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환희 웃는다.
나는 한숨을 속삭이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녀가 먼저 앞서고, 내가 그 뒤를 따른다. 요양원 유리창을 통과한 햇빛이 내 등을 지나서 복도에 긴 그림자를 만든다. 나는 걸음을 내디디면서 기억을 떠올리고 또 떠올린다.
‘언제였더라.’
그렇게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러니까 졸업식 날에 웬일인지 술을 안 마시고 학교를 찾아왔다. 그래서 함께 짜장면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고, 집에 돌아오니 낯선 남자가 있었다. 그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삼촌을 본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삼촌에게 맡기면서 말했다.
‘가서 애처럼 굴지 말고, 삼촌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늘 술에 취해서 붉은 핏발만 날리던 아버지의 눈동자에 그 날은 눈물이 그렁거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동자가 누렇게 색이 바랐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약간의 따뜻함도 느꼈다.
‘국민학교 졸업하면 어른이야. 알지?’
‘응.’
그래서일까. 왠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었다. 오히려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으니 좋아서 방방 뛰어야 했는데, 눈물이 났다.
‘울지 말고.’
그 말이 끝이었다. 아버지는 내 등을 슥 밀었고, 나는 삼촌을 따라 그 집을 떠났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그로부터 반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