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4화 (2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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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에스 간판 스타 (1)

“그게 정말입니까?”

최재환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박한영을 바라봤다. 이미 한번 엎어진 상황에서 불확실한 얘기에 또다시 들뜨는 것은 사양하겠다는 얼굴이다.

“예, 형이 전부터 준비해뒀던 시나리오가 있어요. 다만 주인공으로 꼭 저를 원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묵혀만 뒀습니다. 우리 형, 제가 끝까지 안 한다고 하면 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왜 가경 작가가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불현듯 중국에서 나타났던 건지, 그 해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원래 박한영은 7UP 종방연 이후 음주운전 사건으로 대중 앞에서 사라진 배우였다. 물론 이번에는 그 운명이 달라지겠지만··· 아무튼, 지금 박한영 말처럼 가경 작가가 고집과 소신이 있는 자라면 한국에서 활동을 이어가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어쩌면 자신의 동생을 비난했던 대중에게 섭섭함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시현이에 대해서 잘 모르실텐데······.”

최재환이 주저하며 입을 떼자 박한영이 다시 미소를 보인다.

“실은, 유 작가님하고 우리 형, 두 사람 오랜 친구 사이입니다.”

“예에?”

나도 놀랐고, 최재환도 놀랐다.

“유 작가님이 보증해줬어요. 이시현이라는 배우, 쓸 만하다고.”

얼떨떨하다.

‘아니 뭐 지박령도 아니고 유 작가는 왜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거야?’

내가 한 거라고는 그저 대본리딩에서 보인 연기 정도였는데, 유 작가는 대체 뭐에 꽂혀서 나를 이렇게 좋게 본거람.

7UP에 추천을 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가경 작가에게도 나를 추천했다는 말에, 이제는 그녀의 생각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다.

“내일 시간 되나요?”

박한영이 묻자 최재환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되죠. 안 되도 만들어야지.”

“좋습니다. 그럼 내일 형하고 자리를 잡을게요. 저는 회사에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차 대표님이 아직 회사에 계시다네요. 슬슬··· 정리해야죠.”

박한영의 보조개가 왠지 쓸쓸해 보인다. 아마 그는 차 대표와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설마, 치고받고 하지는 않겠지.

“그럼, 제가 내일 한영 씨한테 연락할까요?”

“아니요. 이따 제가 약속장소하고 시간 알려드릴게요.”

“그럽시다, 그럼.”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박한영의 차가 떠나자 우리는 서로를 마주봤다. 최재환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고 있었고,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시현아, 일단은 좀 지켜보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 어.”

오피스텔로 돌아와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맥주와 통닭 한 마리를 시켜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최재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해 보였고, 서비스로 나온 과자를 한 알씩 쥐어 입에 넣으며 생각에 또 생각을 이어갔다.

자신이 가진 5년의 경력, 그리고 최근 자신의 배우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순탄하지 않은 과정들. 생각에 또 생각.

최재환의 복잡한 생각은 형체 없는 먼지가 돼 공중으로 풀풀 흩어지고 있었다. 그게 내 눈에 보일 정도다.

“형.”

“어? 왜?”

최재환이 그제야 맥주잔을 집었다. 나도 서둘러 잔을 들었고, 잔과 잔이 부딪쳐 짠!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안 되면 마는 거고, 되면 좋은 거잖아.”

평소라면 핀잔을 했을 최재환이 이번에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시선이다. 그래, 너 최재환에게 지금의 이시현은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그 질문에 답을 하듯, 최재환이 피식 웃으며 잔을 다시 든다.

“그러자. 뭐 안 되면 마는 거지. 자, 마시자.”

잔이 오갈수록, 눈이 풀릴수록, 우리의 테이블에는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옛날 얘기도 하고, 일상의 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서로가 함께한 5년이란 시간동안 참 많이 싸우고, 많이도 다퉜었다.

나는 서른한 살의 최재환에게서 이시현에 대해 많은 걸 들을 수 있었다. 마흔일곱 최재환의 기억 속 이시현은 그저 옛날 사람이고 지워진 세월의 한 페이지일 뿐이었는데··· 눈앞의 최재환은 이시현을 너무도 잘 알고 너무도 많이 아끼고 있다.

이런, 내가 너무 생각에 빠졌던 걸까.

최재환이 내 눈앞에서 곰발바닥 같은 손을 흔든다.

“무슨 생각을 또 그렇게 해?”

술기운과 생각에 내가 잠시 취해있었나 보다.

“그냥··· 이것저것. 아, 그럼 박태식 역은 누가 하는 거야?”

나는 바닷사람들 이야기의 박태식을 떠올랐다.

“모르지.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게 배우인데, 그 역할 할 사람 없겠냐? 신경 쓰기도 싫어서 안 알아봤어.”

역은 하나인데, 하고 싶어 하는 배우는 너무도 많다. 그리고 누군가는 내가 잃은 기회로 인해서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아쉽다. 그래도 형 실장 달고 그러면 나도 뽀대나고 그럴 텐데.”

사실 그런 이유보다는 박태식이라는 애증의 캐릭터를 내가 꼭 하고 싶고 매듭짓고 싶었다. 왠지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는데.

“하하··· 뽀대는 무슨. 나는 그냥 너 스타일리스트나 하나 붙었으면 좋겠다. 그게 뭐냐 맨날. 회사도 너무하지, 너무해.”

“뭐 어때? 나는 아무거나 입어도 되는데? 머리스타일? 뭔 상관이야, 그냥 한번 흔들어주면 되지.”

나는 장난치듯 앞 머리카락을 한번 흔들어봤다. 곱슬머리인 최재환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찰랑찰랑함이 호프집 조명 아래서 반짝인다.

“이 자식 진짜 많이 변했네. 대체 뭐야? 뭐가 널 그렇게 바뀌게 한 거야?”

“깨달음?”

“하하! 미친놈··· 응?”

픽픽 웃음 바람을 내뿜던 최재환이 갑자기 미소를 지우고 자세를 낮췄다. 내게 조용하라고 손짓을 한다. 이어서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그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예, 대표님!”

최재환은 호프집의 음악 소리를 가리려 최대한 허리를 숙이고 옷자락 속에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요?”

놀란 최재환이 잠시 뒤 전화를 끊고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야, 대표님이 오라는데?”

“지금?”

“어, 지금.”

그러더니 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내가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일어나려하자 최재환이 손을 뻗었다.

“앉아봐.”

“어?”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고, 최재환은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꺼냈다.

“너··· 계약 연장 한 거, 3개월짜리라고 했지?”

“어.”

나는 바이바이 CF 계약기간에 맞춰서 지에스엔터와는 급한 대로 3개월짜리 계약 연장을 했다. 내가 직접 요구한 것은 아니었고, 박 상무가 일단 처리하자고 해서 그렇게 됐다.

지에스엔터테인먼트에서는 가끔 재계약 시점이 애매하거나 급한 경우에는 3개월짜리로 걸어놓고 차분히 조율을 한다. 서로가 충분한 신뢰가 있거나, 혹은 애매한 시점에 한 번 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3개월이라는 쿠션을 놓는 것이다.

“그렇다, 이 말이지.”

최재환이 혼잣말을 속삭이더니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나가서 통화를 하고 오겠다며 일어났는데, 마침 호프집의 음악 소리가 멈췄다. 주인이 CD를 바꾸는 모양이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최재환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대표님. 저 최재환입니다. 다른 게 아니고, 제가 미처 말씀 못 드렸는데··· 시현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예, 그래서 오늘은 회사 들어가기가······. 아, 예. 그럼 내일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최재환이 전화를 끊었다. 그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내가 눈만 말똥히 뜨고 있자, 최재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를 설명했다.

“박한영이가 대표님하고 만난 것 같아.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것을 그대로 얘기했겠지.”

“근데?”

“만약, 정말 네가 가경 작가님의 영화에 합류하게 되면, 회사 입장에서는 너를 지금처럼 가볍게 대할 수가 없어.”

나는 짧은 신음을 삼켰다. 아하. 이제야 나도 최재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가치가 변한다?”

“그렇지. 그러니까 아마 계약 문제를 다시 얘기할거야. 솔직히 너는 3개월 지나면 자유계약선수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마당에 술기운을 가지고 대표님을 만날 수는 없지.”

맞는 얘기다. 배우의 인지도를 떠나서 흥행이 보장된 작가와 그 영화의 주연에 캐스팅 됐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배우에게 붙는 프리미엄이다.

물론 흥행에 실패하거나 연기력 논란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골치 아프지만, 그 반대로 성공만 한다면 이시현이라는 배우는 매우 빠르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비주얼은 받쳐주고 있으니까.

그러니 차 대표로서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을 테지. 만약 타 회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이참에 물장구 열심히 쳐서 어떻게든 이시현을 잡고 싶을 것이고. 하지만······.

“형, 나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잘못하면 형이 다쳐.”

회사의 계약 문제에 직원인 매니저가 끼어들면, 자칫 잘못해 이 바닥에서 매장 당하는 수가 있다. 보통은 회사를 나올 각오가 아닌 이상은 매니저들은 이런 일에 껴서는 안 되는 게, 불문율이다.

“그래,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결정은 네 몫이야. 오늘 밤사이 잘 생각해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최재환의 행동은 회사 대표의 입장에서는 눈이 찌푸려지는데, 배우의 입장에서는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참, 기분 이상하네.

“자 마시자, 휴대폰 꺼버리고.”

최재환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꺼진 휴대폰을 흔든다.

**

“참 이상한 일이네요.”

정 이사가 속삭여 말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차 대표는 허리를 숙인 채로 유리 테이블 위에 볼펜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톡··· 톡.

“박한영이 그 작가 동생인거, 아무도 몰랐어?”

행동을 멈춘 차 대표가 표정 없이 혼잣말 하듯 물었다. 그러자 강 실장이 눈을 찌푸리며 난처해진 얼굴을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사실은 몰랐습니다.”

“강 실장 일 그렇게 할 거야?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매니저가, 배우 가족관계 하나 몰라?”

“박한영 아버지가 이혼하고, 지금의 한영이 어머님하고 재혼을 해서······. 뭐,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강 실장이 이제야 박한영에게 들은 사실을 얘기하자 차 대표가 눈을 찌푸린다. 굵은 눈썹이 흔들거리다가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박 상무.”

“예, 대표님.”

“이거 새 나가지 않게 하고, 이시현이 계약서 좀 가져와 봐. 재계약은 제대로 했지?”

“그게······.”

박 상무가 대답을 주저한다. 평소답지 않은 이상한 분위기에 차 대표의 이마 주름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뭐야?”

“계약이 끝난 상태에서 급하게 재계약을 해야 하다보니까, 일단 3개월짜리······.”

“이런!”

차 대표가 아랫입술을 한 움큼 깨물었다. 눈을 부릅뜬 그 모습에 주먹 출신의 박 상무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바닥에 둘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후······.”

차 대표가 양복 안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강 실장이 서둘러 라이터를 꺼냈지만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차 대표가 싸늘하게 쳐다봤기 때문이다. 되레 놀란 윤 부장이 강 실장의 다리를 툭 쳤다. 가만히 좀 있으라고 속삭이면서.

“정 이사.”

“예, 대표님.”

“이시현이 스타일리스트도 없다며?”

“예.”

“참내, 엉망이구만.”

차 대표가 차가운 웃음을 흘린다. 이시현이가 아무리 무명이고 매니지먼트 사업부에서 알아서 하게끔 뒀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배우 아닌가.

“윤 부장.”

“예!”

이번에는 매니지먼트 사업부를 관리하는 윤 부장이 냉큼 대답했다.

“이시현이, 연기력은 확실한 거야?”

“연기선생님한테 확인해 봤는데, 카메라 울렁증만 없으면 벌써 한자리 꿰찼을 거랍니다. 사실 마스크가 괜찮아서 완전 발연기가 아닌 이상 이미 궤도에는 올랐을 겁니다.”

“카메라 울렁증은? 고친거야?”

“그건···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차 대표가 고개를 창가로 돌린다. 앉아 있는 여기의 누구도 보기 싫다는 듯 옆모습이 일그러진다. 그러더니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한명한명 주르륵 쳐다보고 말했다.

“지랄들 한다. 니들 아는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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