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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킬 or 팀플
“얘기 잘 끝났어?”
차에 돌아온 나를 향해 최재환이 물었고, 그 질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미소뿐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아이를 회사에 내려주고, 이시현의 오피스텔로 돌아와 현재 처해진 상황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바닷사람들 이야기도 날아갔고, 7UP도 날아갔다.
그나마 CF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으니 7월 중으로는 전파를 탈 것이다.
상황이 나쁘다고만 할 수도, 그렇다고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미련을 가지면 나쁜 것이고, 미련이 없다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최재환의 입장에서는 미련이 남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미련을 가질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로서는 이시현이라는, 모두가 잊은 내 배우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더 깊이 다가가는 시간이었고··· 이시현의 몸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형.”
내가 부르자 소파에 앉아 심각하게 눈을 기울이고 있던 최재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미소를 띤 이시현이 비친다.
그 눈을 마주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책임감. 지금의 최재환이 꿈꾸고 있는 자신의 미래, 나는 그 미래를 살아온 자로서, 최재환의 꿈에 근접한 삶을 살았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순간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실패와 넘어짐이 당연했던 서른한 살의 청년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잘 될 거라고··· 좋은 날이 있을 거라고?’
그런 입에 발린 말들로 다음을 기약하기에는 최재환에게 지금까지 쌓여온 피로도가 너무 크다. 이번에는 정말 잘될지 알았을 텐데, 이렇게 어이없이 일이 틀어졌으니 허탈감도 클 것이다.
“왜 임마? 불러놓고 말을 안 해.”
최재환은 핀잔을 툴툴 뱉고는 두 손 가득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한숨과 답답함이 일그러진 소리가 들린다.
“다시 하면 되잖아.”
“그런 기회가 또 오겠냐? 하······. 어쩐지 너무 황당할 정도로 좋은 기회였어.”
생각해보면 유 작가 한 사람의 변덕에 이리저리 휘둘린 꼴이다.
“그만하면 됐어. 이럴 시간에 오디션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어?”
배우에게 오디션이 어떤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 번에 캐스팅이 될 수도 있고, 수백 수천 번을 해도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오디션을 보고, 그 결과를 통보 받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과정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버티면 기회가 올 거라는 막연함과 미련. 그러다가 지치면 끝.
“후··· 네 말이 맞다. 다시 알아보자. 좋은 작품이 있나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래, 뭐 어디 또 없겠어.”
끝이 안 보이는 긴 행렬에 서서 겨우 문턱을 통과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긴 행렬의 끝에 서야 하는 우리의 현실.
소리 없이 실 웃음을 짓는 내 모습에 최재환이 기가 막힌 듯 한숨과 헛웃음을 얼버무린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 그래?”
“그냥, 그래도 내 곁에는 형이 있잖아.”
나 최재환이 있다. 아니, 매니저 최재환이지.
“그리고 형 곁에는, 나 이시현이 있잖아.”
“하하······. 너 유별나진 거냐, 좋아진 거냐? 적응이 안 되네.”
“적응합시다, 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래, 그러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좀 마실까?”
“그럽시다.”
부엌 냉장고 문을 열어 캔 맥주를 꺼냈다. 최재환에게 하나를 건네고 치익! 소리와 함께 서로가 캔을 부딪치려는 때였다.
띠리리. 띠리리.
단음의 벨소리가 울린다. 최재환의 면바지 주머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엉덩이를 들어 휴대폰을 꺼내든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누구야?”
“박한영인데, 또 뭐지······.”
최재환이 이마를 찌푸리며 휴대폰을 받는다.
“여보세요?”
-저 박한영입니다.
“예, 그런데요?”
최재환의 얼굴 표정이 좋지가 않다. 꺼림칙한 듯 휴대폰을 귓가에서 살짝 떨어트려 통화하고 있다.
-좀 만나 뵀으면 좋겠는데요.
“그 일 때문입니까? 그건 아까 병원에서 얘기가 정리된 걸로 알고 있는······.”
-저 희수하고 화해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잘됐네. 근데 왜······.”
-드릴 얘기가 있어서요. 중요한 얘기입니다. 지금 바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하··· 알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세요?”
-강남에 있는데, 제가 찾아갈게요. 그리고, 가능한 이시현 씨도 같이 봤으면 좋겠어요.
“시현이도요?”
-예, 두 분께 꼭 해야 할 얘기입니다.
최재환은 박한영과 약속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놓는 최재환의 얼굴이 복잡해 보인다. 이것저것 생각만 많아진 얼굴이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최재환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도 곁에서 대화를 모두 들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옷을 챙겼다. 물론 내 머릿속도 정신없기는 매한가지다.
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기에 또 보자는 걸까.
병원 복도에서 잠시 본 박한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행동을 서두른다.
“맥주는 나가서 마시자. 형이 살게.”
“2차는 내가.”
“됐어 임마.”
나는 가벼운 웃음으로 근심을 밀어내고 집을 나왔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른 최재환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듯 보였다.
배우 이시현에게 다시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박한영의 존재가 이상하게 자꾸 엮이니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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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강변에서 박한영을 만났다. 박한영의 인지도를 고려하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얘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고급 세단에서 내린 박한영이 우리의 회색 카니발 차에 다가온다. 가까이 온 박한영이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시현 씨.”
“안녕하십니까.”
박한영과 달리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일단은 선배니까. 병원에서는 서로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하하, 편하게 해요. 누가 보면 대통령 온지 알겠네.”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는 박한영에게 최재환이 곧바로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농담을 이을 분위기가 아님을 느꼈는지, 박한영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고맙다고, 말씀드리려고요.”
“그거야 그냥 전화로 해도 되는 걸······.”
퉁명한 말투와 달리 최재환의 얼굴은 다행이라는 표정이 묻어났다. 입맛을 쩝 다시더니, 최재환이 박한영에게 다시 묻는다.
“그럼, 회사와 재계약 하는 겁니까?”
“아니요.”
예상한 바와 답이 다르니 최재환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박한영은 입가에 미소를 둥둥 떠올리고 얘기를 계속했다.
“희수, 프랑스에 있는 요리학교에 입학한다고 하네요. 뭐, 요리의 신이 된다나? 그게 꿈이었다고··· 훗, 아무튼 이제는 꿈이 아닌 목표가 됐다고 하네요.”
“그래서요?”
“저도 따라가려고요.”
“예?”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는데, 나는 곁에서 둘의 모습을 숨죽여 지켜봤다.
‘따라간다는 건 뭐야··· 배우 생활 접겠다는 건가?’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저, 은퇴하려고요.”
“박한영 씨?”
최재환의 눈썹이 솟구친다. 입술을 달싹이더니, 진심으로 걱정스런 얼굴로 박한영을 설득했다.
“잘 생각하세요. 이거 하루 이틀 사이에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오래 생각한 겁니다. 단지 확신이 없었는데, 이제 확신이 서네요. 저, 희수 덕분에 많이 변했습니다. 재환 씨도 들은 적이 있죠? 저 수면제 없으면 잠 못 자는 거.”
“그거야 듣기는 했는데······.”
박한영도 굴곡이 많은 배우다. 그런데 어쩌면, 그의 미래는 지금부터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오소리처럼.
“희수 만나고 부터는 수면제 끊었어요. 저, 그 사람 없으면 다시 또 엉망진창 됩니다.”
“하지만 은퇴라니··· 후회 안 하겠어요?”
“완전히는 아니고요. 희수 요리학교 졸업하고, 자리 잡으면 그때 복귀하려고요. 뭐, 잠정은퇴 같은 거?”
“하··· 이 바닥, 아니 어떤 곳이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 쉬운 일 아닙니다. 잘 알잖아요?”
“압니다.”
박한영이 담배를 꺼냈다. 부스럭, 부스럭 담뱃갑을 뒤적여서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후······.”
한강 바람에 연기를 실어 보내고 최재환을 돌아본다.
“배우 생활은 다시 할 수 있어요. 힘들어도 바닥부터 하면 되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걸요. 희수라는 여자는······. 그걸, 재환 씨가 알려줬네요.”
최재환도, 나도 그저 넋이 나갈 뿐이다.
이 정도였나.
이 정도로 사랑한단 말인가.
배우로서의 정상의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포기하고 은퇴를 하겠다는 결심이 설 정도란 말인가.
내가 박한영의 생각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하는 사이, 박한영이 나를 향해서 맑은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시현 씨.”
“예?”
“고맙습니다. 희수 마음 돌려줘서.”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사실이라도, 정작 우리 두 사람은 나누지 못했을 얘기예요.”
나와 박한영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최재환의 한숨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한 번 더 재고해보라는 듯 다시 묻는다.
“그 마음, 변하지 않는 겁니까?”
“예.”
박한영의 눈, 남자의 눈이다. 최재환도 이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입맛을 다시며 한강을 돌아보며 얘기를 이었다.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흔든다.
“희수, 좋은 애입니다. 성격이 좀 완고해서 그렇지··· 어떻게 보면 한영 씨와 비슷하니 의외로 잘 맞을 수도 있겠네요.”
박한영이라는 배우는 때로는 까칠하며, 때로는 껄끄러운 사람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사람에게는 의리가 있고, 신의를 지킨다.
그리고 정희수.
지금 최재환의 생각과는 달리, 나이를 좀 더 먹은 내가 보기에는 정희수라는 여자는 겉만 딱딱한 바게트 빵이다. 그 속은 여리고 부드러운데, 겉은 왜 그렇게 딱딱한 건지.
“아무튼 잘 됐어요. 뭐, 나야 한영 씨하고 팀을 이뤄본 적이 없지만 한영 씨 사람됨은 잘 알고 있으니까. 두 사람 잘됐으면 좋겠네요.”
“저, 그래서 말인데······.”
최재환이 얘기를 끝내려하자 박한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스윽, 나를 한번 보더니 말을 잇는다.
“혹시, 가경(家慶) 작가님이라고 아세요?”
뜬금없는 얘기에 최재환이 눈을 기울인다. 그때,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다.
“들새들······.”
“들새들?”
내 속삭임을 그대로 따라 되뇌던 최재환이 눈을 부릅뜬다.
들새들.
강원도 폐광촌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그 사건을 파헤치던 경찰의 죽음.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 성장한 경찰의 아들(이수혁 형사)이 다시금 폐광촌을 찾아 놀라운 진실을 마주한다는 스토리.
90년대 후반 홀연히 등장한 가경 작가의 들새들.
들새들은 4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에 판권이 팔렸다.
물론 그곳에서도 성공해 일본 내 천만 관객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고. 다만 작가에 대한 건 배일에 쌓여있어 오랫동안 신비로움을 남겼다.
지금 박한영이 그 작가를 거론했다.
그리고 내가 작가에 대해서 바로 알아들은 이유는, 그 작가가 2015년 돌연 컴백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시장이 한국도, 일본도 아닌 중국이었다.
당시의 흥행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중국 영화시장의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바꿀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 리메이크 판권을 위해서 가경 작가에 대해 수소문을 했었고.
“두 분 다, 기억이 나시나 보네요.”
기억이 나고말고. 들새들의 마지막 씬, 형사 이수혁이 폐광촌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범행 장소에 들렀을 때, 낯선 스킨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하고, 바스락 소리에 뒤돌아 허공을 응시하는 이수혁. 한국 영화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 명장면.
“실은··· 그 작가, 제 형입니다.”
박한영이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자, 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회사에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복형제··· 뭐 그런 사정이라서.”
“그, 그럼, 그게 그러니까.”
최재환이 말을 더듬자 박한영이 다시 미소와 함께 얘기를 이어갔다.
“실은 7UP 끝나면 형하고 같이 작품을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일이 이렇게··· 그래서, 그걸 이시현이라는 배우가 했으면 합니다.”
“제··· 제가요?”
“예, 이시현 씨가 주인공입니다.”
중국 영화시장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작가 가경.
지금 순간, 한강 바람을 타고 최재환의 스킨 냄새가 우리의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영화 속 그 장면처럼.
‘내가······.’
가경 작가의 영화에 주인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