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22화 (2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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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킬 or 팀플

“형, 쟤 누구야?”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아이의 정체를 최재환에게 물었다.

“연습생.”

“아까 그 동작은 뭐야?”

“저 아이가 처음에 배운 게 턴이래. 몸의 중심을 새로 잡으려고 석 달을 턴만 했다더라.”

“그러니까, 저 아이가 대체 누구인데?”

몇 번을 물어도, 최재환은 실실 웃기만 할뿐이다.

반면 아이는 우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생글생글 미소를 띠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지나는 간호사들마다 한번쯤은 스쳐볼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의 아이.

“어머, 너 예쁘다.”

“헤······.”

또 한명의 간호사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지나갔다.

벌써 몇 번째야. 대체 저 아이는 누구일까.

내가 자꾸만 들여다보니 아이가 눈썹을 쫑긋 올린다. 하얀 얼굴에 짙은 흑발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슬슬 ‘정’ 엔터테인먼트 대표 최재환의 촉이 발동한다.

느낌이 오는 아이.

회사에서도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나라면 이 아이를 바로 캐스팅할 것이다. 물론 내가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어를 눈앞에서 놓치기도 한다. 성공한 가수, 혹은 배우가 정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서 까였던 적이 있어요, 라는 소리를 TV에 나와 하는 날이면, 그날은 배가 아파서 잠을 못 이룰 때도 있다.

몇 번 그랬었지 아마.

아무튼, 내가 타인의 목소리에서 색깔을 느끼는 건 드문 일이다.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 차 대표도 그걸 느꼈으니 이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걸 테고. 하지만······.

‘기억에 없단 말이야.’

아이의 외모, 그 안에 감춰진 재능이 엿보이는 건 사실인데, 도통 기억에 없다.

단순한 인연이라면 모르겠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를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다.

이상하다. 이상하단 말이야.

궁금증을 잠시 뒤로하고 진료 차례를 기다렸다. 그러는 중에 나는 문득 고개를 돌리다가, 병원 복도를 걸어오는 한 여자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부주방장님?”

최재환이 바로 되묻는다.

“부주방장? 그게 누구야?”

“아, 아니야.”

술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어차피 곧 관둘 곳이고. 마침 부주방장도 내 얼굴을 봤는지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 최재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희수! 너 희수 맞지?”

“매니저님?”

어라, 둘이 아는 사이였던가.

**

사연을 들어보니, 부주방장 정희수는 3년 전만 해도 배우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카메라 앞에서, 타인 앞에서, 억지로 미소 짓는 것을 더는 할 수가 없었다. 자존감이 유독 강했고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한 친구였다. 그러다보니 부러지기 일쑤였고.

어느 날은 방송국 앞에서 엉엉 울고 있었는데, 그때 최재환이 그녀에게 물티슈와 우산, 그리고 빵을 건네주더니 휙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비가 내렸고.

둘의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녀가 배우를 관두기로 결심한 것도 최재환의 조언이 상당 부분 차지했다. 마침 그녀 주변에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기도 했었고.

물론, 이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게 언제적일인데··· 기억이 날 리가 있나. 최재환에게 얘기를 듣고서야 그때를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두 사람, 최재환과 부주방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제야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여전히 가물가물하지만.

‘그나저나··· 눈앞에 두고도 모르고 있었네.’

하긴 주방에서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본 적이 없으니.

그러고 보면 정희수가 이 바닥을 뜨고 나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과거로 돌아오고, 그로 인해 이시현이라는 존재의 운명이 달라지면서 젊은 최재환은 정희수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근데, 너도 화상이야?”

“예.”

최재환이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에 감긴 붕대를 바라봤다.

“이상하네. 시현이는 집에서 소시지 튀기다가 다쳤다고 그러고··· 그런데 너희 둘이 아는 사이 같고··· 또 그런데 이날 병원에서 마주치고··· 또 그런데 둘 다 화상이라.”

이런, 최재환이 단서를 잇기 시작했다. 확신하건데, 이 녀석의 추측은 제법 들어맞는 편이다.

“이시현, 솔직히 얘기해라.”

“그게······. 에이 모르겠다.”

나는 술집 주방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최재환이 넋이 나가더니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내게 이유를 묻지도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을 생각만 했다. 그건 내가 이시현이 술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와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형,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언제까지 하기로 했어?”

최재환이 무거운 목소리로 묻는다.

“이번 달까지만.”

“그래, 관둘 때 같이 가자. 가서 좋게 인사드리고 마무리해야지. 괜스레 나중에 이상한 소문 돈다.”

“알았어.”

잠시 가라앉은 분위기는 정희수의 목소리와 함께 깨졌다.

“저 아이 누구예요?”

그녀가 여자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 연습생.”

“되게 예쁘다.”

그녀가 넋 나간 얼굴로 속삭인다.

“이시현 씨.”

간호사의 호명에 나하고 최재환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도 벌떡 일어나 쫓아왔다. 잘생긴 청년과 예쁜 아이. 그리고 우직하게 생긴 남자. 다들 이 이상한 조합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마스크를 쓴 의사는 환자 홀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처치법을 알려주고 내 상처를 소독했다. 관리를 잘해야 상처가 남지 않는다는 말을 했고, 최재환은 곁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과정을 지켜봤다.

“여동생이 예쁘네요.”

소독을 하는 중에 의사가 문득 아이를 쳐다보고 말했다.

“아, 예.”

“오빠도 잘생겼고. 참, 세상이 불공평해요?”

그런데 그 불공평하다는 얘기를 최재환을 보면서 한다. 최재환이 이마를 찌푸린다.

“자, 소독은 끝났고··· 관리 진짜 잘하셔야 해요.”

“예, 감사합니다.”

우리는 처치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복도에 있는 정희수를 보고 셋 다 멈칫했다. 그녀가 남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최재환이 남자의 이름을 속삭였다.

“박한영 씨?”

박한영은 선글라스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최재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여기서 또 보내요.”

박한영이 체념하고 인사를 해온다. 눈을 기울이던 최재환이 뭔가를 깨달은 듯 물었다.

“혹시, 박한영 씨의 그 사람이··· 희수였습니까?”

“매니저님이··· 희수를 어떻게 아세요?”

**

최재환과 박한영이 할 얘기가 있는 듯 했다. 둘이서 병원 밖으로 나가 얘기를 하는 사이, 나와 정희수, 그리고 여자아이는 함께 복도에서 기다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알거 없잖아.”

정희수는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났는지 잔뜩 굳은 얼굴이다.

“혹시 둘이, 사귀세요?”

이번에는 나를 흘겨보기까지 한다. 더 물었다가는 때릴 기세다. 주관이 뚜렷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이 정도였나.

나는 휘파람을 부르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잠시 박한영에 대해서 떠올렸다. 기억으로는 박한영이라는 배우는 지에스엔터와의 재계약 이후 행보가 엉망이 됐던 걸로 알고 있다.

음주운전 사고로 대중의 질타를 받은 뒤에는 재기가 불가능할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때가 아마 7UP 종방연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시청률도 엉망이었고, 생활 리듬도 엉망이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최재환이 언급했듯이, 박한영이 내가 기억하는 이전과 달리 지에스엔터와 재계약을 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미니시리즈 7UP에서도 빠졌고.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회사에서 직원들 사이에 박한영에 대한 얘기가 오가는 걸 얼핏 들을 수 있었다. 박한영이 오늘 일본 팬 미팅이 있어서 일본에 넘어 가야 했는데, 그 스케줄을 펑크 냈다는 것이다. 드라마도 파토를 내더니 아주 엉망이 됐다며 누군가 탄식하는 걸 들었다.

‘그럼 박한영은··· 정희수 때문에 팬 미팅을 펑크 낸 건가?’

어제 새벽 병원에서 본 박한영이 떠오른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일인데, 지금 분위기를 보니 정희수와 박한영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박한영은 회사와 재계약을 안 할 것 같고.’

그럼 이번에도 내 존재로 인해 미래가 달라지는 걸까.

달라지는 것이 겁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 뒤바뀌든 말든 바로 잡아봤자 그 끝이 좋을 것도 없으니 굳이 용을 쓸 생각도 없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박한영과 정희수의 사연은 둘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그녀와의 인연이라고 해봐야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전 일일 뿐이고.

“같이 가요.”

여자아이가 나를 쫓아온다. 생각을 조금 복잡하게 했더니 목이 말라서, 나는 병원 복도의 자판기 앞에서 멈춰 지갑을 꺼내들고 아이를 돌아봤다.

“너, 콜라 마실래?”

“음료수는 안돼요.”

“뭐가 안 돼?”

“살찌잖아.”

“뭐··· 그렇긴 하지.”

자기관리는 나름 하나 보다.

“그럼 이온음료도 안될 테고, 그렇다고 지금 시기에 옥수수차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지금 시기?”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그런 게 있어. 하··· 그럼 뭘 마시나.”

“물.”

“그러자.”

결국 체념하고 근처의 정수기로 향했다. 아이는 조용하고 나긋나긋해 보인다. 걷는 것 까지도 사뿐사뿐. 뭔가 신비한 아이다.

‘신비한 아이?’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었다. 정희수로 인해서, 오래전 가라앉은 기억이 꿈틀되는 느낌이었다.

“혹시 너······.”

“이시현!”

고개를 돌리자 최재환이 오고 있었다. 박한영 없이 홀로 병원 로비를 지나오고 있다.

“시현이 너는 먼저 차에 가 있어.”

“어.”

최재환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정희수에게 향했다. 나는 진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정희수의 쓸쓸한 모습을 눈에 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참 뒤에야, 최재환은 주차장에 내려왔다. 차에 오른 그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 골치 아프네.”

“왜?”

“정희수 성격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꽉 막혔는지는 몰랐네.”

“둘이 뭐 안 좋아?”

“희수 입장에서는 박한영이랑 이번에 다시 잘돼도 결국에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고, 더구나 외국으로 유학까지 갈 생각이라니까··· 이참에 모질게 정리할 모양인 것 같아.”

“박한영은.”

“박한영이 뭐냐?”

최재환이 내게 핀잔을 준다.

“아, 박한영 선배님은?”

“그 양반은 그 양반 나름대로 돌직구지. 어휴, 둘 다 뻣뻣하다.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야지. 이건 뭐 자기들 생각만 옳으니······.”

최재환이 혀를 차다가 나와 뒷좌석의 아이를 쳐다봤다.

“내가 지금 니들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있냐. 허.”

“형, 안되겠다.”

“어?”

내가 다시 안전벨트를 풀자 최재환이 눈썹을 꿈틀 거린다.

“형, 나 부주방장님 얼굴 좀 보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왜?”

“할 얘기가 있어서.”

최재환이 내 눈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나는 곧바로 정희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섰다.

나 이시현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자 하얗게 마른 얼굴이 고개를 든다.

“뭐야?”

그녀가 또 퉁명하게 묻는다. 그러면서도 힐끗 복도를 쳐다보는 그녀.

아무래도 박한영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정희수··· 그날 일 봐서 내가 오지랖 한 번 부려준다.’

롤리팝에 출근한 첫날, 강 실장과 함께 있던 정희수는 자칫 강 실장이 오해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를 모른 척 해줬다.

‘후······.’

사실 그건 이유도 아니고, 그냥 찝찝했을 뿐이다.

생각해보니 최근 주변의 상황이 박한영으로 인해서 이상하게 얽히고 있었다. 7UP에 괜스레 오르내리기나 하고, 단막극은 엎어지고, 심지어 최재환까지 이 일에 신경을 쓰고 있고.

“부주방장님.”

“왜? 그러니까 왜? 자꾸 왜 불러?”

“그거 알아요?”

“뭐가?”

“혼자라면 부주방장님 인생인데, 혼자가 아니라면 부주방장님 인생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되는 거예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부주방장님한테 박한영이라는 사람, 가벼운 인연은 아니잖아요?”

“너,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지금 정희수 눈에 비친 이시현은 뭣도 모르면서 참견하는 어린친구에 불과할 것이다.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꺼져줄 생각이다.

“최소한, 나 다쳤을 때 열일 제쳐두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아요.”

“너 진짜 무슨 얘기를······.”

“박한영··· 오늘 팬 미팅 있었어요.”

“뭐?”

“일본 팬 1천명이랑 만나러 출국하는 날이었는데, 지금 부주방장님 곁에 있는 거예요. 단 한명을 위해서, 1천명한테 쓰레기 소리 들은 날이라고요.”

놀란 정희수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다. 입만 벙긋하고 있으니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이 좋은 날씨에 누구는 사랑싸움 하고 있는데, 어떤 곰은 남의 연예사에 신경이나 쓰고 있고.

“정희수 씨, 진료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그녀의 차례를 알렸지만, 그녀는 움직임 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가 일어나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봤다. 그곳에 박한영이 서 있었다.

“직접 물어 보세요. 내 오지랖은 여기까지니까.”

“야 이시현!”

나를 부르는 그녀를 뒤로하고 박한영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가 입술을 머뭇거린다.

“저기, 이시현 씨.”

“무조건 져 줘요. 그게 정답이니까.”

박한영의 곁을 스쳐가면서, 지금 나는 인생의 선배로서 해답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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