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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킬 or 팀플
“예?”
“그렇게 됐어.”
정 이사가 위로의 미소를 보였지만 최재환의 얼굴은 더 할 나위 없이 아쉬움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단막극은······.”
“그것도 유 작가가 고민 끝에 이시현을 빼기로 했어.”
“···하.”
이럴 수가. 넋을 잃은 최재환이 눈만 깜빡인다. 복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는지 알았는데, 굴러왔던 복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까지 앗아가 버렸다.
정 이사의 말대로라면 지금 이시현은 7UP도 날아갔고, 단막극도 날아갔다.
“이번에는 자네가 좀 이해를 해줘야겠어.”
정 이사는 7UP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솔직하게 얘기했다. 윤 부장이나 강 실장의 우려와는 달리, 어차피 소문이 날거 그 선에서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우리도 아쉽게 생각해. 하지만 상도덕이 있는 거고, 그렇다고 유 작가한테 계약 운운할 입장도 아니고. 그리고 몬스터 프로젝트······.”
그 단어에 최재환이 이마를 찌푸렸지만 정 이사는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 몬스터 프로젝트도 회사의 명운이 걸린 거니까. 그리고 사실 지금은 SN도 신경 쓰이는 판이고.”
작년, 그러니까 1999년도에 SN엔터테인먼트에서 낸 크리스마스 앨범에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나이 만 13세, 중학교 1학년의 괴물 신인이 올해 SN에서 나올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파졌다.
하지만 그 소문 이면에 또 다른 소문도 이어지고 있었는데, 지에스엔터테인먼트에서 온갖 가수들 씹어 먹을 괴물 그 이상의 괴물이 출격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누군가는 그저 소문이라고 치부하겠지만, 그 소문 진짜다.
‘몬스터··· 프로젝트.’
가칭 몬스터라 불리는 아이는 만 6세에 노래와 춤에 두각을 보인 천재였고, 차 대표는 아이부모의 동의를 얻어 ‘몬스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가수 혼자서 춤, 노래, 랩, 그리고 작곡과 작사까지, 더불어 연기까지 가능한 천재. 뿐만 아니라 한중일미 4개 국어 마스터까지.
몬스터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진의 면모만 봐도 차 대표가 몬스터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듣자하니, SN에서 올 8월에 그 신인 나온다던데요?”
최재환은 체념하고 몬스터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어떻게든 상황을 돌려보려고 생각을 떠올려봤지만, 정 이사가 이렇게까지 얘기 하는 걸 보면 되돌릴 수가 없는 일이다.
정 이사 역시도 그런 마음을 아는지, 턱 끝을 쓸며 최재환의 눈치를 살피듯 대화를 몬스터 프로젝트로 돌렸다.
“그렇다고는 하는데······.”
회사의 명운을 건 기획 가수라는 측면에서 보면, 누가 봐도 선발주자에 비해 후발주자가 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칫하면 SN을 따라했다고 욕만 먹을 수도 있다.
“뭐, 문제 될 것 있나.”
“그래도 SN이 선전하면 비교가 될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쪽 아이가 우리보다 어리다는 거?
SN의 신인이 만 13세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 지에스의 몬스터보다 어리다.
“차 대표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어차피 우리 아이가 나오면 다 씹어 먹을 테니까.”
정 이사가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최재환은 잘 알고 있다.
배우든 가수든 연습생들은 매월 월말평가를 받는다.
전 연습생 앞에서 이뤄지는 평가는 냉정하고 잔인하다. 심지어 모두의 앞에서 몸무게도 재고, 큰 소리로 공개까지 한다.
연습생들의 수치심?
그런 건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자극을 받고 발전하면 되는 것이다. 무너진다 해도 연습생일 뿐. 회사는 발전한 친구에게는 지원을, 무너진 친구에게는 작별인사를 할 뿐이다.
물론 작별인사 시점에서 연습생들은 또 한 번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투자금 회수, 일명 정산이라는 현실.
그만큼 중요한 월말평가이기에 모든 연습생이 참가해야 한다. 아파도 나와야 하며, 정 못나올 일이 생기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그 아이 몬스터는 월말평가에 나오지 않는다.
‘나오면 연습생들 다 기죽으니까.’
그래서 몬스터의 월말평가는 오로지 그녀를 가르치는 아티스트진, 회사 임원진만이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트레이닝을 청담동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받기 때문에 대부분의 회사 직원들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딱, 한번 봤지.’
최재환은 과거 한번 우연히 몬스터의 실체를 본적이 있다. 차 대표의 차에 타고 있던 어린 소녀.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카락의 소녀.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까,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라고. 그리고 자네 승진은 이번 가을쯤에 내가 책임지고······.”
“아닙니다. 제 배우가 엎어졌는데, 저 혼자 승진해서 뭐합니까?”
최재환의 딱 부러진 말에 정 이사의 얼굴이 굳어진다. 괜히 옹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님을, 그 마인드가 이렇다는 것을 정 이사 역시도 잘 알고 있기에 더 얘기하지 않는다.
“알았으니까, 나가봐.”
“예.”
최재환이 일어나서 부대표이사실을 빠져 나왔다.
매니지먼트 사업부에 내려오는 길에, 복도를 지나던 강 실장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슬금 시선을 피했다.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지금 최재환의 얼굴이 상당히 열 받은 상태였다.
“이시현!”
사무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최재환이 목청을 높였다. 그 낯선 모습에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이시현!”
다시 한 번 외치자 뒤에서 누군가 최재환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이시현이었다.
“왜?”
“가자. 바람 좀 쐬게.”
이시현을 본 최재환의 얼굴이 한층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시현 곁에 낯선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고, 혀로 날름 핥고 있다.
“얘는 누구야?”
“몰라, 연습생인가 봐. 막 돌아다니더라.”
160센티미터 초반의 키, 늘씬한 몸, 이목구비 뚜렷하고, 비율 나쁘지 않고··· 이런 연습생이 있었던가.
아무튼 최재환은 이시현을 데리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유리문이 바람을 펄럭이며 닫히자, 누군가 속삭인다.
“우와, 재환 씨 열 받은 모습 오랜만에 보네.”
“그러니까. 당분간 말 걸지 말자고··· 근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다들 분주히 속삭이는 이때, 가만히 서 있던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 둘을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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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왜 그래?”
최재환이 화가 났다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진짜 화가 났을 때는 그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나 열 받았습니다’ 그러니 건들지 마세요, 하고 얼굴에 드러낸다. 그게 최재환이다.
“너 드라마 엎어졌데.”
“···그래?”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놀랄 만큼의 충격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경우의 수를 고려할 때면 잘될 가능성보다는 잘못될 가능성을 우선순위로 두는 법을 터득했다. 잘되면 여유가 생기지만, 잘못되면 바로 다음 수를 고려해야 하고, 그럴 때는 숨 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시간이 촉박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뭐, 어차피 우리 거도 아니었잖아.”
그나마 연륜이라는 이름하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최재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최재환은 여전히 먹구름 낀 얼굴이다.
“근데 왜 엎어진 거야?”
궁금해서 물어나 본다. 유 작가의 제안이 사실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박한영이 빠진 상태고, 무엇보다 작가의 놀이터라는 드라마 판이니 그녀의 입김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안됐을까.
“별거 아니야.”
잠시 머뭇거리던 최재환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뭔가 감추는 얼굴이긴 한데.
“그럼, 단막극 준비나 계속 해야겠네.”
나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넋두리를 뱉듯 속삭였다. 그런데 최재환이 무거운 한숨을 또다시 꺼냈다.
“하··· 그것도 엎어졌어.”
“뭐?”
이번에는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또 왜?
“유 작가님이 자존심이 상했나봐. 자기 생각은 이러이러한데, KIS 국장하고 차 대표 생각은 이러이러하니까, 그 상태로 다시 너를 단막극에 돌리면 자기 생각이 깨지는 거니 자존심 상하겠지.”
“허······.”
말문이 막힌다. 이것저것 고려할 것도 참 많은 세상. 복잡하다.
“그럼, 형 승진은?”
“지금 그게 중요하냐?”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최재환이 1층 버튼을 누르고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어?’
아까의 연습생이 향기 어린 바람을 몰며 곁에 탔다.
“연습생이 아이스크림 먹는 건 또 오랜만에 보네.”
아이크림을 핥는 아이를 보며 최재환이 구시렁거린다. 지에스엔터테인먼트 건물 2층에는 카페가 있는데,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수 있도록 차 대표가 배려한 곳이다. 하지만 보통 연습생들은 커피만 마시는 편이다. 아이스크림은 살이 찌니까.
최재환이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나를 보고 얘기를 잇는다.
“바람도 쐴 겸, 너 병원이나 가자.”
로비에는 아침에 본 여직원이 아닌 다른 여직원이 서 있었다.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오자, 모여 있던 여학생들이 웅성거린다. 정확히는 나 이시현의 모습에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오빠!”
“우리 사진 찍어요!”
“오빠, 나 10호 팬! 저 기억나죠?”
아까 자리에 없던 아이들도 이제야 출근도장을 찍은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은 최재환의 얼굴이 좋지가 않아서 사진을 찍기가······.
“형, 애들이랑 사진 찍고 가면 안 돼?”
“···왜 안 돼. 찍고 와.”
최재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기다리던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이제 나 이시현의 팬은 100호 팬을 돌파했다. 더구나 놀라운 일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내게 커피를 주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인형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손에 쥔 커피와 인형을 흔들며 그 친구들과 헤어졌다.
‘이야, 이시현이······.’
나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다. 이런 기분이라니.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 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단 말인가.
내가 정 엔터테인먼트 대표였을 때, 나는 소속 가수들과 배우들에게 팬들의 선물을 받지 말라는 공지를 내렸었다.
선물이라는 것이 조공이라는 단어가 붙더니 부지기수로 규모가 커지면서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수 생일 한 번에 억 단위가 움직일 때도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배우 이사 가는데 어떤 청담동 사시는 아주머니 팬은 집안의 가구를 풀 세팅해줬다. 심지어 주차장에는 외제차를 선물로 가져다준 팬도 있었다. 그래서 금지 시켰는데, 그래도 알게 모르게 오가는 선물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물이라면 백번 환영이지.’
나는 인형을 가볍게 흔들며 차로 향했고, 최재환은 이런 내 모습을 보며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차 앞에서 머뭇거려야 했다.
“너 뭐야?”
최재환이 여자아이를 향해 물었다. 아까의 그 아이가 서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 이시현을 가리켰다.
“바람.”
“뭐? 바람? 허.”
최재환이 가벼이 웃는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너 바람피웠냐?”
“글쎄? 내가 그랬나?”
그러자 최재환이 다시 아이를 보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아닌 것 같은데?”
“나하고 바람 쐬러가기로 약속했잖아요.”
여자아이가 반격하듯 대답했다. 고운 목소리. 톤도 좋고, 목소리에서 색깔이 느껴진다.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이건 무슨 얘기야?”
“몰라.”
최재환이 물어보자 나도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던가.
“아, 그러고 보니까, 얘가 아까 뭐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대충 알았다고 했는데.”
그게 바람 쐬러가자는 얘기였나.
“너······.”
최재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와 아이를 잠시 번갈아봤다. 그냥 거절하고 아이를 보낼지 알았는데, 뜬금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타라. 근데 우리는 너 누군지 모르는 거다.”
“응.”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형 뭐야? 쟤 알아?”
“모른다고 했잖아.”
“아는 눈치인데?”
“됐고, 어서 가자. 병원 오가며 바람이나 쐬고 오는 거지 뭐.”
그러자 냉큼 차에 올라타는 아이와 두말 않고 운전석에 오르는 최재환. 여전히 찜찜함을 가진 채 뒤이어 차에 타는 나.
병원으로 가는 길에 아이는 차창을 활짝 열어 입을 한껏 벌리고 어버버, 소리를 내며 바람을 먹었다.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크고, 어린 티가 풀풀 나는, 젊음이 아닌 새싹의 모습이다.
‘누구지··· 서른한 살의 최재환은 아는데, 마흔일곱의 최재환은 모르는 아이라······.’
다르게 보면 그 말은 아이의 미래가 별로 희망적이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혹은 이 바닥에서 금방 사라진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생각 속에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차창을 넘어 들어오는 여름의 바람에 내 눈이 스르르 감긴다. 아이의 어버버, 소리에 낮잠께서 솔솔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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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이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며 차에서 내렸고, 나는 감긴 눈을 겨우 떠가며 차에서 내렸다.
“어디로 가야하냐?”
최재환이 두리번거리다 로비의 안내직원에게 다가가 길을 묻는다. 그동안 아이는 주위를 살피며 병원 내부를 구경하기 바빴고, 나는 정신을 차리려 숨을 고루 내셨다.
“비키세요!”
마침 로비에 환자 후송용 카트를 밀고 들어오는 의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급박한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옆으로 물러났지만 앞서가던 아이는 타이밍을 놓쳤다. 그 순간 최재환이 외쳤다.
“오른쪽으로 피해!”
그러자 아이는 카트와 부딪치기 직전에 갑자기 방향을 틀어 몸을 빙그르 회전했다. 그것은 마치 발레의 한 동작처럼 보였다.
휘리리, 바람소리, 펄럭이는 긴 머리카락.
바삐 지나가는 의사와 후송용 카트 곁을 살짝 피해서 가볍게 한 바퀴를 도는 아이의 모습.
그 순간의 장면에 나는 넋이 나가버렸다.
너무 이질적인데, 너무도 완벽한 아름다움 앞에서, 지금 내 심장이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