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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킬 or 팀플
「다음 날」
최재환은 눈앞에 있는 박한영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토요일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와 얘기 좀 하자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커피 나왔습니다.”
테이블에 커피가 올라오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면서 박한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죄송해요. 아침부터.”
“아녜요. 어차피 슬슬 나가보려던 길이었으니까.”
이야기가 바로 시작될 것 같지 않아서 최재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박한영도 머그컵을 매만지며 뜸을 들였다. 최재환은 그의 모습을 보며 최근 매니저들 사이에 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요즘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박한영은 최근 회사의 통제를 벗어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연락도 잘 안되고, 집에 찾아가도 만나기가 힘들다며 강 실장이 하소연을 하는 걸 들었다. 지금도 얼굴을 보니 수척해 보이는 것이 어제 뭘 했는지 잠도 제대로 못잔 듯 했다. 직원들도 사실상 박한영의 재계약은 물 건너갔다고 보고 있고.
“그러고 보니, 한영 씨가 우리 회사 들어온 지가 벌써 5년이네요. 나 들어올 때쯤 계약했으니까.”
최재환이 먼저 운을 떼자, 박한영이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네요. 벌써 그렇게 됐네. 재환 씨, 처음에는 캐스팅 팀에서 일하셨죠?”
“예. 그때 참 많이 돌아 다녔는데. 놀이공원도 가고, 바닷가도 가보고.”
“아, 그때 이시현 배우 캐스팅 한 거죠?”
그 질문에 최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거리 캐스팅을 했던 여학생의 어머니와 커피숍에서 잠깐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마침 그 건물에 모델 학원이 있었다. 당신 신입이라 이리저리 기웃거릴 때라서 혹시나 하고 올라가봤는데 그곳에서 이시현을 본 것이다.
“훗.”
잠시 떠올렸던 그때의 기억을 뒤로하고, 최재환은 컵을 내려놓고 박한영을 마주봤다.
“한영 씨··· 그동안 많이 고생했어요. 이제 어디를 가든, 한영 씨는 잘 될 겁니다.”
박한영의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이 상태로 다시 지에스에 돌아오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다.
강 실장과의 감정의 골이 봉합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은 둘째 치고, 불신이란 놈이 마치 잠재된 발화점처럼 언제든 터질 가능성을 안고 숨어 있을 것이다.
“저 사실··· 얘기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요.”
“뭐, 소문은 들었어요.”
박한영이 머뭇거리자 최재환이 바로 대답을 했다. 소문이라는 것은 쉬쉬해도 누군가는 입을 열기 마련이고, 또 누군가는 귀가 열려있기 마련이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매니저들 사이에서만 얘기가 돌고 있었다.
“그래서 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요?”
이쯤이면 빙빙 돌리는 건 됐다 싶었던 최재환은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재환 씨, 듣기로 재환 씨가 인맥이 좀 있다고 들었어요.”
“나 같은 로드가 무슨.”
최재환은 미소 띤 입술 틈새로 실바람을 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말고, 부탁 좀 드릴게요. 나 돕겠다는 회사며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내가 왜 재환 씨를 찾아왔겠어요?
박한영의 말에 최재환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다시 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초조한 박한영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직은 회사와 척을 지고 싶지 않다?’
그러면 봉합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건가.
‘헌데 그러면서도, 회사에는 얘기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나를 찾아왔다?’
몇 가지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 최재환이 입을 열었다.
“뭘 부탁하고 싶은데요?”
“아시는 기자에게 부탁해서, 기사 좀 터트려주세요.”
“기사?”
순간 최재환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무슨 기사요?”
“나 박한영에게 만나는 여자가 있다고.”
“예?”
의외의 얘기에 최재환은 입술을 혀끝으로 훔치기만 할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박한영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압니다. 재환 씨 입장 곤란해질 거. 이 신세는 제가 어떻게든······.”
“아니, 그게 아니라. 열애설 터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요?”
최재환의 어이없는 시선에 박한영은 각오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난리 나겠죠.”
“박한영이라는 주가는 폭락입니다. 끝없는 하락장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재환 씨 찾아온 거죠.”
“허······. 어떻게든 터트릴 생각이다?”
“예.”
박한영의 눈에 전에 없이 힘이 맴돈다. 하지만 최재환은 그를 선뜻 도울 수가 없었다.
열애설을 터트리겠다는 배우를 도울 회사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박한영이 다른 회사에 부탁을 할 수 없었던 걸 테고. 그리고 막말로 지에스 입장에서도 열애설 터지고 주가 폭락한 배우와 재계약할 필요성은 낮아진다. 뭐 어차피 틀어진 얘기지만.
‘아······.’
문득 이어진 생각 속에서 해답이 떠오르자 최재환이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박한영을 다시 쳐다봤다.
‘이 친구··· 똑똑하네.’
박한영이 아무리 은둔형 배우라고 해도 아는 기자가 하나 없겠는가. 그럼에도 다른 누구도 아닌 안면이 있는 매니저를 찾아왔다.
그 말인 즉, 열애설을 터트리고 후에 대처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두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직접 본인의 입으로 꺼낸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회사에서 흘린 것도 아니고. 오로지 출처는 최재환이라는 매니저 개인의 입.
터진 기사를 다시금 봉합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하지만 만약 이 같은 최재환의 추측한 것이 맞는다면, 그것도 문제다. 여기까지는 그저 박한영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시선에서 보는 단순한 전개일 뿐이니까.
“한영 씨, 기자들 우습게보면 안 돼요.”
최재환이 한숨과 함께 얘기를 꺼냈다.
“예?”
“그 친구들 그냥 막 갈기는 대로 쓰는 것 같아도, 개중에는 진짜도 있어요. 팩트 확인하고, 소문의 출처 확인하고서야 기사 초안 잡는 친구들도 있어요. 알잖아요? 기사 하나 뜨면 그런 친구들이 달라붙어요. 그러면 파고들고··· 아니, 그렇지 않아도 냄새 맡고 우르르 몰려오잖아? 한영 씨··· 우리나라 속담 중에 참 더러운 속담이 뭔지 알아요?”
“속담이요?”
박한영이 눈을 기울이자 최재환은 말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
“그 소문은 특히 이 바닥에서 더 지랄 맞게 언급되거든요. 사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수 있지. 멀리서 보면 그게 연기인지, 먼지인지, 누가 알아요? 그런데 씨발 다 연기라잖아요. 아, 욕해서 미안 합니다. 내가 좀 흥분했네.”
매니저들 중에 기자들 헛지랄에 당해보지 않은 친구가 없을 것이다. 최재환도 기자들이 일으킨 실체 없는 연기 때문에 고생 좀 했던 기억이 있다.
“한영 씨, 나 이거 못들은 걸로 할게요.”
“······.”
침묵하고 있는 박한영의 모습을 보며 최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선을 내리고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뭐예요? 그렇게 하면 그 친구가 다시 돌아올까 봐?”
“······.”
놀라 쳐다보는 박한영. 최재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이 양반아 소문 다 들었다니까.
“듣자하니까, 그 친구는 자신의 미래도 중요하다고 하고, 한영 씨 미래도 중요하니,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다던데······. 이런 식으로 터트려서 그 친구에게 책임감이나, 의무감 같은 거 억지로 떠안길 생각이었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박한영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좀 전까지 힘 있던 눈동자에 가라앉은 쓸쓸함이 보인다.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입니까?”
“예.”
“그럼 가서 잡으세요. 한영 씨 지금 왜 이렇게 고민하는지 알아요?”
“하······. 나도 압니다. 내가 다 포기하면 되죠.”
역시 똑똑한 친구다. 그런데 머리만 돌아가면 뭐하나. 가슴을 못 움직이는데.
“그렇지만, 나 하나만 생각할 수가 없잖아요?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삽니다. 뭐 결국에는 각자의 인생이고 나만 생각하면 된다지만, 그렇지가 않잖아요?”
일리 있는 말이다.
박한영이라는 배우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는다. 그를 챙기는 스태프들, CF 하나를 찍으면 그 CF 하나에 광고주 사람들도 붙고, 하청업체도 붙고, 하다못해 포스터 인쇄업체 직원도 달라붙는다. 그것이 스타이며, 그것이 박한영이 지닌 무게다.
“한영 씨.”
“예.”
“그동안 계속 달려왔잖아요? 조금 쉬었다 갑시다. 계속 그렇게 안고 가면 무너져요. 쉬엄쉬엄 가야, 계속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겁니다.”
최재환은 지체 없이 뒤돌았다. 선택은 박한영의 몫. 그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단순한 생각의 결론에 바로 이어진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숱한 고민이 이어졌을 테고, 그 결과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은 박한영의 고민일 뿐, 최재환의 시선에서는 그 고민을 받아줄, 그리고 이해해줄 이유가 없었다. 그저 3자의 입장에 답이 나왔으니 그 답을 알려줬을 뿐이다. 아주 명료한 답을 말이다.
‘그나저나 어제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커피숍을 나와 차에 오르면서 최재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 대표가 KIS 드라마국 국장을 만났으면 답이 나왔을 텐데, 아직까지 얘기가 없다. 그러니 어서 빨리 회사에 가 봐야한다.
띠리리.
차 키를 붙잡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젠장.’
휴대폰을 열어본 최재환은 신경질적으로 조수석에 휴대폰을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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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포즈!”
찰칵.
오늘도 나는 건물 앞에 모인 여학생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처음에는 이시현의 입장에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으로 여학생들과 어울렸는데, 이제는 제법 재미가 붙었다. 더구나 이 친구들을 통해서 방송가 돌아가는 소식도 적잖이 들을 수 있었다.
“야, 이시현!”
“응?”
쾌청한 하늘만큼 맑은 소리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고서야 출근을 하는 최재환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낡은 청바지, 풀어헤친 셔츠, 아니 셔츠 단추가 아예 없는 거야? 그리고 저 감색재킷은 사계절용이냐?
‘정녕··· 내가 저랬단 말인가.’
아이고. 좀 꾸미고 다녀라 인간아.
“야, 너 오늘 회사 왜 나왔어?”
최재환이 대뜸 묻는다.
“어, 그냥.”
토요일이라고 집에 있은들 어차피 할 일도 없다.
“오빠, 저랑도 찍어요.”
“형 잠깐만.”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여학생 셋이 내게 달라붙었다. 그녀들 사이에서 V자를 그리고 또 사진을 찰칵 찍는다.
“들어가자.”
최재환이 내 팔을 붙잡았다. 미처 사진을 못 찍은 친구들에게 미소와 손을 흔들어주고 회사로 들어갔다. 출입문이 열리고, 로비 여직원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보인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이시현 씨.”
“좋은 아침, 그리고 지현 씨, 이거.”
최재환이 손에 든 종이봉투를 건넸다. 커피와 도넛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진다.
“어머, 매번 고맙습니다.”
“수고.”
최재환은 로비 직원들을 자주 챙겨주고는 했다. 그로 인해서 차 대표가 출퇴근하는 것을 회사에서 제일먼저 아는 사람이 최재환이기도 했다.
“형, 애들이 형보고 뭐라는지 알아?”
“뭐? 애들 누구?”
“밖에 있는 친구들.”
“뭐라는 대?”
최재환이 무심한 척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곰이래.”
“그래?”
가만히 있던 최재환.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려 출입문을 보고 눈을 부릅뜬다.
“어떤 놈이냐? 확 그냥!”
“하하.”
나도 웃고 로비 여직원도 웃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일상의 얘기가 이어졌다.
사실 그동안 최재환이 많이 놀았다. 맡고 있던 3W를 1팀에 넘겨주고는 그에게 남은 건 이시현 밖에 없었으니까.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땜빵 매니저 노릇도 하루 이틀이지, 이래저래 사무실에서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좀 일할 맛 난다.”
최재환이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치? 나 열심히 하지?”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최재환이 콧바람을 내쉰다.
“임마, 3W 애들은 분 단위 스케줄이야. 걔들은 차만 타면 곯아떨어져. 넌 임마 겨우 CF 하나 찍고 안심빵이야?”
“걱정 마셔. 드라마 하나 찍으면, 형 죽어날 거다.”
“어이고, 그러세요? 허, 좀 그래봅시다. 하하.”
최재환이 웃으며 내 어깨를 퉁 쳤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숙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너 이거 뭐야?”
“어?”
최재환이 놀란 이유야 뻔했다. 이시현의 매끈할 팔뚝에 붕대가 둘러져 있기 때문이다.
“아, 이거······.”
뭐라고 핑계를 댈까. 몇 가지 생각은 해뒀지만 막상 최재환의 놀란 얼굴을 보니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소시지 튀기다가 기름에 뎄어.”
“뭐어? 임마, 조심해야지!”
“크게 안 다쳤어.”
“자식아, 흉터 남으면 어떻게 하려고?”
최재환의 얼굴이 마치 자식 놈 타이르는 엄마의 얼굴이다. 어구어구 소리가 나올 정도로 울상인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가슴 한편에 따뜻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병원에는 갔다 온 거야?”
“갔다 왔어. 걱정 마, 관리 잘하면 흉터 안 남는데.”
“으이구 진짜··· 병원 또 언제가?”
“이따 오후에.”
“같이 가보자.”
최재환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다. 자신의 팔이 다쳤어도 저 정도로 난리는 아닐 것이다. 그 점이 고마운 한편, 인간 최재환에 대해서 문득 생각이 이어졌다.
살면서 숱하게 거울을 통해 내가 나를 보던 것과, 이시현을 통해서 나 최재환을 보는 것은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이제는 타인이라는 느낌도 설핏 들면서 좀 더 명확하게 나를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 최재환은 괜찮은 놈 같고.
‘훗.’
내가 피식 웃자 최재환이 혀를 찬다.
“쯧쯧, 뭐가 좋아서 웃어 임마! 배우가 제 몸 관리 하나 못하고.”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아오, 귀 따거.”
“잔소리라니 자식아······.”
최재환이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사이, 뒤에서 로비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어, 좋은 아침.”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우리는 얘기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정훈 이사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최재환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시현의 허리라고 뻣뻣할 수는 없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어, 이 배우.”
어라? 정 이사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유가희 작가가 이 배우 칭찬이 대단하던데?”
“예?”
“대본리딩 두 번 만에 유 작가 마음을 훔칠 정도면, 내가 그동안 이 배우를 너무 가볍게 봤나봐.”
“아닙니다.”
“최재환이.”
“예, 이사님.”
“30분 뒤에, 내 사무실로 좀 와. 할 얘기 있으니까.”
“예.”
할 얘기······. 아마 어제 얘기일 것이다.
최재환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든다. 과연, 어떻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