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8화 (18/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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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KIS 방송국 차기 수목극에 편성된 ‘7UP’은 남녀 7명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청춘 드라마다. 작가는 최미희, 유 작가 밑에서 배우던 보조 작가 출신으로 7UP은 그녀의 입봉작(처녀작)이기도 하다.

지금 유 작가는 이시현이라는 무명의 배우를 7UP의 주연으로 넣고 싶어 했다. 그녀 자신의 작품은 아니지만, 제자의 입봉작이니만큼 상당 부분 관여하는 모습이었다.

“이시현이 너 거기 들어가라고.”

“저··· 이미 7UP 4화 대본 촬영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요?”

최재환이 방송가 돌아가는 소식을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사실, 남자 주연 하나가 외국에서 생활하다 귀국을 하는 인물인데, 그 배우가 지금 회사하고 트러블이 나서 못하게 됐어.”

“그 배우··· 박한영이잖아요?”

박한영이 재계약 문제로 활동을 올 스톱한 것을 최재환은 알고 있다. 같은 회사니까. 그것 때문에 최근 차 대표가 KIS 방송국에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그리고 듣기로는 박한영 배역을 ‘윈’ 기획사에서 가져갔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 니들이 뿌린 씨앗이니 마무리도 알아서 하라고.”

정 피디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최재환은 심장이 떨리는지 거친 숨을 파르르 내쉬었다.

“자, 작가님.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더 따지고 들것도 없었다. 무조건 오케이, 무조건 감사였다. 멍하니 있던 나 역시도 최재환이 일어나 허리를 숙이자, 그 옆에서 따라쟁이 인형처럼 허리를 숙였다.

“재환 씨.”

유 작가가 다시 부르자 최재환이 허리를 숙인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예?”

“뭐해? 회사에 전화해야지. 아직 확정난거 아니야. 아무리 내 제자였어도, 최미희 작가가 결정해야 하는 부분이고, 또 계약 조건도 박한영처럼은 못해줘. 알지?”

“아, 알고말고요.”

무보수로 하라고 해도 할 수 있다는 기세다. 수목극 주연배우. 비록 7명의 주연중 하나라고 해도 본래는 박한영이 맡을 역할이다. 그게 어디 보통 역이겠는가.

“차 대표님에게 당장 전화 넣어. 오늘 내로 결정해야 해. 5회 차 촬영부터 들어가려면 그쪽, 지금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이야.”

“예, 예!”

정 피디의 말에 최재환이 서둘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다가 테이블에 손등을 찧었다. 그럼에도 아픈 기색 없이 휴대폰을 매만지자 정 피디와 유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방송국 입장에서도 모험이야, 알지?”

정 피디의 얼굴에는 여전히 찜찜함이 묻어 있다.

“예, 잘 압니다.”

“차 대표님, 나한테 전화하라고 그래.”

“예!”

이제 회의실에는 최재환과 나만 남게 됐다. 최재환이 전화를 걸려던 행동을 멈추고 나를 넋 놓고 바라봤다.

“시현아.”

“어?”

“이게 뭔 일이냐.”

그동안 운길이 꽉꽉 막혀 있더니만, 갑자기 뻥 뚫린 걸까.

나 역시도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다. 아무리 이 바닥이 다이내믹하다지만, 이렇게 돌아갈 때가 있구나 싶다.

분명한 것은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었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현장의 움직임이다.

“훗······.”

짧은 미소 뒤에, 나는 최재환의 등짝을 팡! 때렸다.

“뭔 일이긴, 땡 잡은 거지.”

**

차 대표가 방송국에 직접 들어온다고 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그도 느긋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방송국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한 시간 뒤, 차 대표가 정훈 이사, 윤석규 부장, 강현 실장을 이끌고 도착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윤 부장이 다짜고짜 우리를 붙잡고 물었다. 반면 차 대표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잠시 상황을 설명했다. 유 작가의 말처럼 한시가 급했지만, 차 대표는 어수선하게 움직이느니 확실하게 알고 움직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됐다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차 대표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결국원인은 나 이시현이니까.

“별일이 다 있네. 허.”

정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헛웃음을 보인다. 그러더니 최재환의 어깨를 툭 치고 물었다.

“너희들 오늘 CF 촬영 있지 않아?”

“아, 예.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여기는 너희들이 있어봤자 할일이 없어. 그러니까 어서 촬영장으로 가고, 들뜨지 마.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예.”

우리는 방송국을 빠져나와 곧장 CF 촬영장으로 향했다.

**

카니발 차량은 구형 소나타와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쌩쌩 달렸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차 안에 맴돈다.

정 이사가 들뜨지 말라고는 했지만, 들뜨지 않을 수가 있나. 단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비단 CF 계약 과정도 그랬지만 이번 일은 차원이 다르다.

CF야 적은 계약금에 누가 모델이 됐든 상관없는 콘셉트였지만, 드라마, 미니시리즈는 다르다. TV에 일단 얼굴이 비치면 그 파급력이 차원이동 수준이다.

‘7UP······.’

입을 꾹 다물고 운전에 집중한 최재환.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7UP에 대해서 생각을 이어봤다.

‘7UP··· 시청률 8프로.’

2016년은 시청률이 10프로만 넘어도 잘 나온다고 얘기한다. 그런 2016년에도 한자리수 시청률은 평작, 망작으로 평가한다.

하물며 2000년인 지금은 오죽할까.

그래, 7UP은 망작이 된다.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솔직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망작이라도 주연으로 나가는 게 좋은 것일지, 아니면 거절을 하는 게 좋은 것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게 선택권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7UP이 망작이라고 얘기할 입장도 아니고, 유 작가의 제안을 뿌리칠 만큼의 명분도 없다. 괜스레 뿌리치면 방송가에 건방진 놈으로 낙인만 찍힐 것이다.

‘이거 복잡하게 됐네.’

지난 일주일, 북적북적했던 우리의 차가 오랜만의 침묵 속에서 광고 촬영장에 도착했다. 바이바이 기획부서 직원들과 촬영 스태프도 이미 도착해 있었고, 우리도 제때 늦지 않고 시간을 맞췄다.

“자, 여기 콘티요.”

앳된 얼굴의 여직원이 내게 콘티를 건넸다. 오늘 촬영할 장면들이 간략한 그림과 설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내 미소에, 정확히는 이시현의 미소에 그녀가 수줍게 물러난다. 이런 현상,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오피스텔 앞 슈퍼마켓 아가씨도 이시현에게는 외상을 해주고, 식당 아주머니도 이시현의 주문은 곱빼기로 준다.

“하······. 너 이거 할 수 있겠어?”

최재환이 콘티를 가져가더니 눈을 기울인다.

젖소 옷을 입고 초원을 달리는 CF 콘셉트.

“어려울 게 뭐 있어.”

“이 자식이 아주 해탈했네.”

최재환이 피식 웃는다. 그때 마침 대기실 문이 열리고 바이바이 기획부서 민다영 팀장이 들어왔다.

“시현 씨, 멜로디 가사 준비해왔어요?”

“아, 예.”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초원 위를 달려달려!

구름 위를 달려달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뭐야 이거?”

황당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민다영 팀장.

“멜로디가 단순하니까, 가사도 단순한 게 재밌을 것 같아서요. 입에 달라붙지 않나요?”

나는 종이를 펴들고 직접 불러봤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허.”

민다영 팀장은 기가 막혀서 말을 못 꺼내는 듯했다. 어쩌면 나를 진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콘셉트 자체가 진지와는 이미 오래전에 작별을 했는데, 나 홀로 진지하면 그것 또한 언밸런스 아닌가.

어찌됐든 멜로디 부분은 우리 쪽과 조율을 하기로 계약을 했으니 무조건 까지는 못할 것이다. 일단은 촬영 결과물에 덧씌워보고, 아니면 재고하면 되는 거다.

‘그러고 보면··· 역시 차 대표 보통이 아니야.’

어떻게 멜로디 부분에 태클을 걸었을까.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지만 바이바이 대표와 식사를 하면서 멜로디와 관련해 조율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과거 오소리가 이 CF를 찍을 당시에 차 대표는 모르는 일이었다. 오로지 윤석규 부장이 홀로 저지른 일이었으니까. 만약 그때도 차 대표가 끼어들었다면, 오소리의 인생은 달라졌을까.

‘아, 자꾸 오소리가 신경 쓰이네.’

궁금하다. 그녀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지··· 지켜보면 결과를 알게 될 텐데, 그 기다림이 벌써부터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그녀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다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메이크업을 하는 사이에도 흥얼거림이 이어졌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어라, 누군가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바이바이의 기획부서 직원 중 한명이었다. 그녀도 순간 어깨를 흠칫했을 정도로 무의식에 이뤄진 일이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내 흥얼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최재환까지 흥얼거린다. 메이크업이 끝날 즘에는 대기실 내 모인 스태프들 다수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자신들도 모르게 후크송에 중독이 된 것이다.

“시현 씨, 유니폼 여기 둘게요.”

촬영 팀에서 젖소 옷을 가져왔다.

초여름의 스튜디오 촬영, 땀으로 샤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다들 나가고 나와 최재환이 남았다. 나는 먼저 청바지를 벗고, 추리닝 바지와 면 티를 갈아입은 다음에 젖소 옷에 다리를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최재환이 낄낄 웃기 시작했다.

“ , 이시현이 너 진짜 웃기다. 야, 가만있어봐.”

그는 언제 가져왔는지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나를 찍기 시작했다. 7UP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다.

“크하하!! 이거 가관이네. 회사 가서 자랑해야겠다. 아예 캠코더도 가져올걸 그랬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젖소 옷의 가슴 지퍼를 끌어올리고, 최재환을 돌아보고 넌지시 물었다.

“형 뭐해?”

“어?”

“형도 입어야지.”

“어?”

최재환이 눈을 댕그랗게 뜬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에게 나는 천진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매니저하고 배우는 일심동체. 몰라?”

“뭐, 뭐라고? 야, 그건 아니지.”

뒤로 빼려는 최재환에게 나는 회심의 일격을 선물한다.

“형, 우리 계약서에 젖소 두 마리 뛰기로 했어.”

“무슨 소리야··· 그게?”

“진짜인데, 회사에 전화해봐.”

“너······.”

최재환이 서둘러 휴대폰을 들고 지에스엔터의 경영지원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참 뒤에 사색이 된 얼굴로 소파에 놓인 젖소 옷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젖소 옷이 두개라더니······.”

**

젖소 두 마리가 꼭지가 달린 우유병 모양의 음료수를 차지하기 위해 초원을 달린다. 초여름의 더위, 뜨거운 조명. 이미 에어컨의 의미가 사라진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그동안에도 멜로디는 계속 흘렀고, 촬영은 5시간 만에 끝이 났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이제는 모두가 흥얼거리고 있다. 급기야 어떤 누군가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발, 멈춰줘! 제발 머릿속에서 이 소리 좀 지워줘!!”

그러거나 말거나.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

촬영이 끝난 우리는 회사로 향했다. 최재환은 중간에 오피스텔 앞에서 나를 내려주기로 했다.

“달려달려 젖소야, 바이바이 음료······.”

운전 중에 최재환이 창백한 얼굴로 멜로디와 가사를 흥얼거린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더니, 나를 휙 돌아봤다.

“이 악마 같은 자식!”

“하하.”

그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달려달려 젖소야··· 으아아!!”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속삭이고는 비명을 지른다.

저주 받은 멜로디.

이미 대한민국은 바이바이 음료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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