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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박태식이가··· 너무 눈에 띈다.”
유 작가의 속삭임에 정 피디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런가? 그렇게 오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그게 아니라 박태식이 너무 두드러져요.”
“민폐조연이라··· 그럼, 삼각관계라도 가시려고?”
정 피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모습이지만, 유 작가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 심각함에 대본리딩 현장에는 묘한 기류가 내려앉아 배우들 사이를 떠돌기 시작했다.
‘설마······.’
나는 유 작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설마하니 대본을 뒤집겠다는 건가 싶지만, 방송국의 요구 없이 작가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단막극 같은 경우는 매우 불필요한 일이고.
다들 숨죽이는 이때, 조용히 관망하던 배우들 사이에서 중견배우 최미숙이 불쑥 얘기를 꺼냈다.
“그래, 솔직히 나도 그런 생각했어. 조연인데 너무 튀어. 뭐랄까, 연기가 튀는 게 아니라 인물이 그냥 돋보여. 그렇다고 대본 문제도 아니고.”
“아니, 저기 선생님······.”
예상치 못한 최미숙의 얘기에 정 피디가 당황한다. 반면 유 작가는 그 말에 힘을 얻은 건지 펜을 손에 쥐고 대본을 빠르게 넘겼다. 차르르, 내 기억에 그녀는 집중할 때면 손에 쥔 펜을 빙빙 돌리는 행동을 하곤 했는데··· 바로 지금처럼.
슥슥.
대본 여기저기에 뭔가를 적어 넣은 뒤에 그녀가 다시 펜을 빙빙 돌린다.
“감독님, 오늘 대본리딩은 여기까지 하죠.”
그 말에 정 피디가 이마를 긁적이다가 얼굴을 쓸어내리고 말했다.
“뭐··· 유 작가가 그러겠다면.”
“그리고, 이시현, 잠깐 나 좀 보자.”
배우들과 스태프, 그리고 방송국 관계자들이 어수선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지금 꼴이 대본이 바뀔 분위기라서 다들 표정이 좋지가 않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나 역시도 사실 좋지만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시현은 그저 박태식 역이 적당하다. 더구나 이번 극이 16부작 미니시리즈도 아니고 겨우 2부작 단막극인데, 기껏 외운 대사도 송두리째 바뀔 판이고.
‘설마, 틀어지는 건 아니겠지.’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사이 머뭇거리던 최재환이 일단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를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쥔다.
좀 전까지 대본리딩으로 한창이던 회의실에는 나와 유 작가, 그리고 정 피디만이 남았다.
“이시현.”
“예, 감독님.”
정 피디는 지금 상황이 복잡한지, 찌푸린 얼굴로 대본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너 자세가 마음에 든다. 진지해보이고.”
“그러게, 저번보다 딕션도 많이 좋아졌고.”
유 작가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로서는 기분이 좋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했다. 지금 상황도 정신없지만, 무엇보다 이제 나는 이시현이고, 배우 이시현으로서 그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숱하게 봤던 바닷사람들 이야기. 지난 시간 안타까움 속에서 가슴에 되새겼던 박태식이라는 캐릭터. 그것들을 표현하는데 당장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문제는 앞으로다.
‘단막극이 끝나면··· 미니시리즈도 들어가야 할 텐데.’
그처럼 호흡이 긴 연기를 내가 할 수 있을까.
“너 아카데미 나왔니?”
유 작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내게 물었다. 기획사 대표가 아닌 배우로서 그녀 앞에 서니, 새삼 그녀가 커 보인다.
“아니요. 회사에서 연기선생님들 영입해서······.”
“아, 지에스엔터라고 했지?”
“예.”
“제대로 가르치나보네.”
유 작가는 좀 전에 내 딕션이 좋다는 칭찬을 했다. 그녀 말대로 최근 내가 중점으로 삼은 기본기는 발성과 호흡이다. 그 부분을 집중 연습했다.
“연습도 많이 한 것 같고.”
“예. 노력했습니다. 기회잖아요.”
“그래, 기회지. 신인한테는 기회도 이런 기회가 없지.”
정 피디가 옳은 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유 작가에게 넌지시 묻는다.
“어떻게 하실 건데? 진짜 삼각관계로 가려고? 농담이지?”
“솔직히 말해요?”
“왜 이렇게 또 거창하셔. 말해 봐요.”
“난 주인공 바꿨으면 좋겠어요.”
“에?”
기운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던 정 피디가 놀라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얼굴이 흙빛이 된 그가 말을 더듬는다.
“노, 농담도 참······.”
당장 주연을 맡은 배우의 소속사에서 항의가 들어올 테고, 이미 단막극과 관련해 보도 자료까지 뿌린 상황이다. 더구나 정 피디는 인맥으로 배우를 꽂아 넣는 비율이 높다. 이시현도 그런 식이었잖은가. 그만큼 최재환이 정 피디에게 먹인 것도 적지 않고.
“마음이 그렇다고요. 누가 뭐래요?”
유 작가가 피식 웃는다. 역시나, 내 생각대로 그녀는 농담을 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별다른 트러블도 없는데 주연배우를 뒤집는 게 말이 되나.
다만 나로서는 지금 상황이 예삿일이 아닌 듯해 입술만 빨아들이며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감, 감이 좋지가 않다.
“유 작가, 사흘 뒤 촬영인데 이거 힘들어요.”
또다시 농담은 듣기 싫은지 정 피디가 확실하게 못을 박는다. 사흘 뒤, 그러니까 오늘이 금요일이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닷사람들 이야기의 촬영이 시작된다.
“어떻게 한담.”
유 작가의 고민이 이어진다. 나 역시 초조하게 그녀의 결정을 기다렸다. 돌아가는 분위기는 이시현을 빼던지, 이대로 두던지, 양자택일에서 결정이 날 듯한데.
“이시현. 넌 나가서 매니저 데려와. 5분 있다가 들어오고.”
“예.”
유 작가의 말이 떨어지자 나는 곧장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후······.”
문 앞에서 한숨을 내쉬는 나를 몇몇 스태프가 힐끗 쳐다본다. 원망인 듯, 혹은 부러움인 듯, 혹은 궁금한 듯. 별의별 시선이 달라붙고 있는 와중에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려 최재환을 찾았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끊겠습니다.”
최재환은 복도에 놓인 철제의자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를 흘깃 보고는 전화를 끊는다. 끊자마자 일어나서 내게 묻는다.
“시현아, 뭐래?”
“형하고 같이 들어오라는데?”
“왜?”
“몰라.”
나 역시도 얼굴이 굳었고, 최재환 역시도 낯빛이 안 좋다.
5분 뒤 우리는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정 피디와 유 작가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 참.”
정 피디가 한숨을 내쉰다. 아무튼 우리가 그 둘의 좌측으로 앉자 유 작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환 씨.”
“예, 작가님.”
“우리, 시현이 빼자.”
“예? 빼다니요?”
최재환이 바로 이해를 못하고 유 작가의 눈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상황을 깨닫고는 정 피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난감해하는 정 피디.
“이번 단막극에서 이시현 빼자고.”
“아, 아니 작가님!”
놀란 최재환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질 듯, 덜그렁거리며 밀려난다. 유 작가 곁으로 빠르게 다가간 최재환은 허리를 숙여가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가 뭐 잘못했나요? 아, 아니, 잘못했으니까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겠죠. 뭔데요? 말씀하시면 고칠게요.”
상황이 급하니 최재환의 입에서 횡설수설이 이어졌다. 그러자 유 작가가 피식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재환 씨.”
“예, 작가님.”
여전히 심각한 최재환과 달리 유 작가가 미소를 빙긋 보인다.
“이시현이, 이 역이랑 안 어울린다. 그렇다고 배역 바꾸자니, 다른 배우들 이미 스탠바이인데 바꾸기가 그렇잖아.”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무튼 안 어울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나. 최재환처럼, 나도 마른 침만 꿀꺽 삼키긴 매한가지다. 아무리 조연이라도 이런 식의 통보는 너무하잖은가. 그렇다고 작가나 감독한테 큰소리로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이제 정 엔터테인먼트 대표 최재환이 아닌, 중고 신인배우 이시현이니까.
‘···이런.’
상황이 뒤집어졌다. 농담인 듯 했어도 삼각관계니 주연을 바꾼다느니 그런 말을 할 때는 언제고.
‘설마··· 누가 밑밥 깔았나?’
회의실 밖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의 회사에 전화해서 선수를 쳤을 수도 있다. 재빨리 방송국 윗선에 압력을 넣었던지, 아니면 읍소를 했던지. 그게 아니면 이렇게 급변할리가 있나.
얼굴이 하얗게 불타오른 최재환에게서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망했다고. 진짜 망했다고.
아마 지금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 것이다.
회사에서는 차 대표가 이시현의 단막극을 한번 지켜보겠다는 심산인데, 그게 물 건너가면 이시현 잘못이 아니야··· 라고 하겠는가.
“작가님,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시면 안 될까요?”
최재환이 다시 간청했다. 흡사 무릎까지 꿇을 기세다. 하지만 최재환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지에스엔터테인먼트 전체가 무릎을 꿇는 것과 같다. 그건 용납될 수 없으며, 그 사실이 차 대표의 귀에 들어가면 최재환은 그날로 아웃이다. 이는 내가 대표로 있을 때도 분명히 했던 부분이다.
“감독님.”
최재환이 이번에는 정 피디를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그러자 정 피디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일단 앉아. 작가님 얘기 끝까지 들어.”
그제야 최재환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울상인 그를 보며 유 작가가 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재환 씨, 우리 단막극 나오고 연속극 들어가자.”
“단막극 나오고··· 연속극을··· 들어가요?”
넋이 나간 최재환.
“그래.”
그의 눈동자에 유 작가의 미소가 둥둥 떠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