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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2000년 6월 9일 금요일」
바이바이 CF 계약이 체결되고 일주일이 지났다.
양사가 계약서를 체결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업무의 연장선일 뿐, 나와 최재환이 느낀 것처럼 기념비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렇듯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주일이었을지언정, 우리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남다른 하루하루였다. 물론 우리의 처우에 있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차 한 대가 바뀐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매일 밤 잠들기가 두려울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초여름, 하늘에 맑은 구름이 핀 금요일의 오후.
우리는 두 번째 대본리딩을 위해 방송국에 도착했지만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덕에 회의실 구석에서 대기 중이다.
“아··· 아··· 아······.”
최재환이 연신 신음을 토한다. 어깨가 결린다고 해서, 내가 주물러주고 있는 중이었다. 이시현의 맨들맨들한 손이 딱딱한 최재환의 어깨를 꾹꾹 누른다.
“잠을 어떻게 잤기에 그래?”
“아··· 아······.”
신음와 함께 최재환이 입을 헤벌쭉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유가희 작가가 들으랍시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 약 올리는 거야? 왜 그렇게들 사이가 좋아?”
“그러게. 저 둘, 이상하네.”
정 피디가 곁에서 대본을 넘기며 그녀를 거들었다. 그러자 최재환이 멋쩍게 웃으며 내 손등을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있어? 부러워서 그러지. 나는 누가 어깨 주물러주는 사람이 없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재환이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양손바닥을 비비며,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작가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작가님의 어깨에 환상의 물리치료를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은데요.”
“하하. 됐어됐어, 농담이야.”
유 작가가 손사래를 친다. 그 사이 도착한 배우와 방송 관계자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정 피디가 손님을 맞이하듯 기분 좋은 목소리로 오는 이들을 반겼다.
회의실 테이블에 얼추 자리가 채워지자 최재환이 지난번처럼 방송 관계자들 틈에 앉고, 나 역시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아직 한 자리가······.
“죄송합니다, 차가 고장 나서.”
오소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매니저로 따라온 2팀장 조진수가 유 작가와 정 피디에게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최재환의 곁에 앉았다.
숨을 몰아쉬는 꼴을 보니 정신없이 엑셀을 밟았을 조 팀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조 팀장에게서 눈을 떼고, 오소리를 눈에 담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대본을 펼치고 가볍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늘은 씩씩해 보이네.’
지난 일주일, 그녀와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녀는 스케줄이 가득찬 배우이고, 나 이시현은 이제 겨우 책상달력에 한두 개 적어 넣는 수준이니까.
‘흠, 저 모습도 나쁘진 않네.’
집에서 바로 온 건지 화장이 옅고 머리카락에 물기가 어려 있다. 그녀가 생글생글한 눈웃음 뒤로 의자를 바싹 끌어 앉는 중에 잠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짝!
마침 정 피디의 손뼉 부딪치는 소리가 그녀의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2화 분량의 단막극이기에 대본리딩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러니 오늘 서로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각자의 캐릭터와 감정의 흐름을 명확히 파악해야했다.
유 작가, 그녀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배우들을 바라본다.
“다들 오늘 수고 좀 해주세요. 여러분도 알겠지만, 시청률 크게 안 나올 거예요. 하지만 좋은 드라마라고, 그 말을 듣고 싶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긴장도 좀 푸시고!”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훈훈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몇몇 중견배우들은 서로 간에 귓속말로 뭔가를 얘기하고 미소를 끄덕인다. 아무튼 지난 대본리딩 때보다는 부드러운 흐름인데.
‘문제는 시청률이지.’
좀 전 유 작가가 언급했듯, 단막극 ‘바닷사람들 이야기’는 시청률을 염두하고 제작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소위 말해 땜빵용이며, 동 시간대 타 방송국의 드라마가 시청률이 잘나오니 그쪽으로 시청자들이 쏠릴게 뻔했다.
실제로도 내 기억에는 ‘바닷사람들 이야기’는 2프로대의 시청률이 나왔던 걸로 안다. 공중파 방송의 평일 저녁 10시 시청률 치고는 최악의 성적.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야 좋은 단막극이니, 감성을 자극했느니 어쩌니 해도, 결론은 방송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청률이다.
“이시현이, 오늘은 정신 바짝 차려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니다, 이제 곧 바닷가에 뛰어 들어가는데, 막나가야지. 그래야 박태식이지.”
유 작가가 지난번처럼 긴장을 풀어주려는지 장난스럽게 말을 붙여왔지만, 나 이시현의 눈에서 장난기가 가신지는 오래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얼마나 뜯어봤는지 대본 역시도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이는 나조차도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이정도로 이 역에 빠져들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극 하나에 담긴 사연이 있다 보니 최대한 이번만큼은 모든 것을 걸고 방점을 찍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가 지문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배우들의 대본리딩이 이어졌다. 이시현은 썬 넘버 15번부터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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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무난하게 흘렀다. 모두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집중하고 있다.
“오케이, 좋습니다. 계속합시다.”
정 피디의 사인과 함께 스태프가 다음 지문을 읽었다. 이제 내 차례다.
“씬 넘버 15, 방파제, 주환과 싸운 뒤로 지현은 방파제를 거닐고 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고, 그 뒤에 박태식이 자전거를 타고 쫓아간다. 이어 박태식이 그녀 옆까지 와서 자전거에서 내려 곁을 걷는다.”
여주인공 지현 역은 배우 오소리.
동네 건달 박태식 역은 배우 이시현.
“야, 너 혼자 뭐하냐?”
박태식이 껄렁껄렁하게 말을 붙인다. 그렇지만 내심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조심스럽다.
“신경 끄시고, 제 갈길 가시지.”
그녀의 목소리는 오늘도 차갑다. 그런데 또 그 모습도 예쁘단 말이지. 박태식의 속이 바싹 탄다.
“아따, 누가 보면 비련의 여주인공인지 알겠어?”
“아, 그냥 가시라고! 아니, 꺼지라고!”
지현이 귀찮다는 듯이 볼을 찌푸리고 박태식을 때릴 듯 다가간다. 그러자 그가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붙인다.
“밥은 먹었어?”
“배 안고프거든?”
“아나, 무슨 말을 못하겠네. 그래, 맘대로 해라.”
자존심이 상한 박태식이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힘껏 페달을 밟는다.
여기까지가 배우 이시현이 등장하는 2화 첫 씬.
주연과 비교할 순 없지만 박태식의 비중은 나쁘지 않다. 어찌됐든 여주인공과 얽히는 캐릭터라는 장점이 있다.
“씬 넘버 16······.”
“저 잠시만요.”
스태프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소리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머리를 다시 묶어 올린다. 구릿빛 피부는 한층 더 단단해 보이고, 형광등 빛이 내려앉은 머리카락은 검은 물결이 찰랑거린다. 다들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보니, 확실히······.
‘배우는 배우네.’
지난 대본리딩 현장에서 나는 주위를 돌아볼 만큼의 정신이 없었지만, 오늘은 제법 여유 있게 주변을 눈에 담고 있다.
특히 오소리에게 유독 신경이 쓰인다. 아무래도 바이바이 CF도 그렇고, 이래저래 그녀와 엮인 일이 많았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잠시 일어나 맑은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한다. 잔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기고 다시 앉는다. 전에도 얼핏 생각했지만, 청바지가 잘 어울린단 말이야.
“다시 시작합니다. 씬 넘버 16······.”
오소리의 대사가 이어진다. 흩어졌던 감정 흐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돌아왔다. 집중력이 남다른 배우다. 남주인공과도 호흡이 괜찮고.
어찌됐든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 큰 역경이 없기를 바란다.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라진 수많은 별들을 본 나로서는 그들이 잘되길 바라는 연민을 가질지언정, 안되기를 바라는 삐뚤어진 놈은 아니다.
“잠깐만. 그만, 그만.”
대본리딩이 막바지에 다다를 즘, 유 작가가 지문을 읽어 내려가던 스태프를 멈추게 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정 피디가 유 작가를 돌아봤다.
“왜요, 작가님?”
“흠······.”
유 작가는 턱 끝에 손을 괸 채로, 입가의 잔바람을 흐트러트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나를 쳐다봤다.
“이시현이.”
“예?”
혹 또 뭔가를 잘못했나 싶어서 긴장하는 나를 그녀가 빤히 본다. 얼마나 뚫어지게 보고 있는지 그녀의 얼굴 솜털까지 내 눈에 들어올 정도다.
“박태식이가··· 너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