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5화 (1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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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체결

한 면이 온전히 통유리인 대표실은 지에스엔터테인먼트 건물에서 뷰가 가장 좋은 곳이다. 여름의 어느 날, 가을의 어느 밤, 그 앞에서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끝까지 고양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어느 때는 한강에서부터 붉은 노을이 흘러오는데, 그 노을이 창을 통과해 내게 엄습해오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그랬는데, 더는 내가 이 대표실의 주인이 아니다.

지금은 나 이전의 주인이 대표실을 차지하고 있다.

‘차현성 대표.’

그가 나 최재환, 아니 이시현을 위아래로 훑고 있다. 차갑고, 아픈 시선으로.

“밤늦게 오라고 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10분 전, 차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깐만 회사에 들어오라고. 마침 오소리가 회사 앞에서 나를 내려주고 떠날 즘에 온 전화였다.

‘오소리······.’

차 대표가 눈앞에 있지만 나는 잠시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내게 애인 역할을 해달라고 했다.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호한 역할. 훗날 말로 썸을 타는 것처럼 행동해달란 것이다.

그렇게 향한 곳은 신사동의 한 파티 장소였는데, 그녀와 나는 그곳에서 1시간을 머물고 나왔다.

남자친구 역할을 각오하고 간 나로서는 사람들의 질문을 대비해 적당히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시간,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오로지 혼자였으니까.

‘그래서일까.’

돌아오는 길에 본 오소리의 옆모습이 말을 붙이기 어려울 만큼 쓸쓸해보였다.

“그건 뭐야?”

차 대표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쇼핑백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눈에 띈 모양이다.

“아까 오소리 선배님이 준건데, 휴대폰입니다.”

“그래? 하긴, 오소리 얼마 전에 휴대폰 광고 찍었지?”

“예.”

차 대표가 어울리지 않게 살가운 모습을 보이는데, 그가 날 부른 이유를 모르니 긴장이 된다. 이 양반이 이 시간에, 정확히는 10시가 넘은 이 밤에 최재환도 아닌 이시현을 불러들인 이유가 뭘까.

‘혹시 뭐가 잘못됐나?’

그럴 가능성도 있다. 바이바이 대표와의 저녁 식사 자리가 엉망이었거나, 계약 조건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

“뭐, 힘든 거는 없고?”

“없습니다.”

“흠······. 그래, 알았다. 가봐.”

몇 마디를 나누고 대수롭지 않게 끝난 대화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서 벗어나 테이블을 돌아가려는데, 차 대표가 다시 나를 불러 세운다.

“이시현.”

“예?”

“자.”

차 대표가 소파 앞 유리테이블에 뭔가를 내려놓더니 내 앞으로 던지듯 밀어냈다. 촤르르! 마찰음과 함께 바닥에 툭 떨어진 것은 차 키였다.

“니들 그 똥차 아직도 타고 다닌다며?”

“예.”

“내일부터는 그거 타고 다니라고. 그것도 오래되기는 했는데, 그래도 너희 차보다는 날 거 아니야?”

“아, 감사합니다.”

나는 서둘러 차 키를 주웠다. 웬일이람. 이 짠돌이 차 대표가 포상이랍시고 떡하니 차를 내줄 줄이야.

“시작이 반이라니까, 한번 제대로 해봐.”

“예.”

볼일이 끝났는지 차 대표가 손등을 휘휘 내젓는다. 서둘러 대표실을 빠져나온 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돌렸다.

‘어찌됐든 잘된 삘인데.’

근데 왜 하필 나한테 차 키를 줬을까.

“이시현.”

이것저것 생각을 붙여보고 있던 나를 누군가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로비에 서 있는 정 이사를 볼 수 있었다. 이 밤에 여기 있는 것을 보니 그도 차 대표와 함께 바이바이 관계자를 만나고 온 듯하다.

“예, 이사님.”

“너··· 아니다. 잘 들어가라고.”

가까이 다가간 것이 무색하게, 그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대표실로 향했다.

‘저 양반은 또 무슨 얘기를 하려다 마는 거야. 찝찝하게.’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정 이사가 대표실로 들어가며 뱉은 혼잣말이 내 귓등에 흘러 들어왔다.

“저놈도 이제 운이 좀 트일라나? 웬일로 금줄을 잡았지······.”

금줄이라고? 바이바이 CF가 대박을 터지기는 하는데, 그건 멜로디 때문이지 모델 때문이 아니다. 그것과 금줄이 무슨 상관이람.

아무튼 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래도 어찌어찌 된 것 같네. 멜로디도 생각대로 될 것 같고······.’

멜로디가 대박이 터진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다. 만약 그 멜로디에 내가 저작권이 있다면.

물론 저작권은 누군가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걸 뺏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번 생은 그런 식의 삶은 원치 않는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기억나는 노래 몇 개 뽑아서 작곡가 붙여 버리고 말지.

‘가사······. 그래서 가사지.’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면 또 다르다. 귀에 달라붙는 멜로디에 입에 달라붙는 가사까지 더해지면 CF의 인기는 한층 더 폭발할 것이고, 그로 인해 나 이시현은 저작권료를 받는다.

일종의 꼼수지만 지금의 내게 필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CF 하나 계약했다고 신인배우에게 떨어지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거기다 이시현은 정산도 못한 배우인데, 이번에 CF를 찍는다고 손에 쥐는 것이 있을까 모르겠다.

‘설마, 이 카니발이 전부는 아니겠지?’

손에 쥔 차 키가 묵직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데······.

어찌됐든 저작권료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닌가.

따지고 보면 광고주 쪽에서는 배우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좋아할 일이지 거부하거나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난번 첫 미팅에 앞서 나는 최재환에게 미리 언질을 해뒀었다. 그 부분은 명확히 하고 가자고 말이다.

띵!

나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에 미소 띤 이시현의 얼굴이 비친다.

**

“허······.”

주차장에 내려오니 회색 카니발이 떡하니 서 있다. 구형 소나타에 비하면 고급 외제차 못지않은 착시현상이 일어날 정도의 충격이 엄습한다.

“허. 선루프도 있네?”

차에 오른 나는 연거푸 감탄을 터트렸다. 7인승의 미니밴 스타일의 카니발은 구형 소나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늑했다. 무엇보다 이제는 시동을 걸때마다 뒤에서 밀지 않아도 된다.

너무도 마음에 들어서 이 안에서 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B사의 10억짜리 차를 몰던 내가 카니발에 넋이 나갈 줄이야.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확실하다.

‘어디, 한번 놀래켜줄까.’

나는 차를 끌고 이시현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철컥,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구두가 보였다.

‘응?’

부엌에서 구수한 김치찌개 냄새가 풍긴다. 안으로 들어가니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최재환이 보인다.

“형, 여기서 뭐해?”

집에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 걸까. 데이트도 좀 하고, 놀러 다니고 좀 그러지. 나 최재환이 이렇게 할 일이 없는 놈이었나 싶다.

“왔어? 밥 먹자.”

식탁에 다가가며 주위를 보니, 거실에 너부러져있던 옷가지들이며 물건들이 깨끗이 정리돼 있었다.

“뭐야, 이 밤에 청소를 했어? 내가 하면 될 걸.”

“네가? 행여나. 어서 앉아봐!”

최재환의 재촉에 나는 식탁에 앉았다. 뒤이어 김치찌개와 함께 하얀 쌀밥이 올라왔다.

“먹자.”

“뭐야··· 진짜.”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수저를 들었다. 뽀글뽀글 김치찌개.

“크!”

역시 최재환. 다년간의 자취생활이 완성해낸 노하우가 깃든 이 김치찌개 맛. 여기 들어간 스프는 신x면일까, 진x면일까.

아무튼 정신없이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서야 최재환이 입을 열었다.

“너, CF 건 얘기 잘 오갔나봐. 이제 한시름 놨다.”

“그것 때문에 이런 거야?”

내가 이미 차 대표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 최재환의 눈이 댕그래질 것 같았다. 가만 보니 라면도 사다놓은 것 같고, 냉장고도 채워놓은 것 같고.

“뭐, 과정이 조금 번잡스럽기는 했는데··· 아마 돈은 얼마 못 받을 거야.”

“형, 잠깐만.”

나는 잠시 식탁에서 벗어나 거실 소파 옆에 내려놓은 쇼핑백을 손에 쥐었다. 다시 식탁에 앉자 최재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다. 그래서 그에게 자랑하듯 오소리가 준 휴대폰을 쇼핑백에서 꺼내보였다.

“짜잔!”

“뭐야?”

“오소리가 준건데, 휴대폰이야. 형 쓰라고. 전화는 형이 더 많이 받으니까.”

“야······.”

최재환이 감동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본다.

“에이 쪽팔리게. 이거 그냥 오소리가 준거야. 차 안에 휴대폰이 널렸더라고. 쳐다보니까 슥 주더라. 하하.”

오늘 도와준 대가라고 받은 최신형 휴대폰이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이건 줘도 안 가지는 물건이지만. 잠시 멍하니 휴대폰을 보던 최재환이 옆자리의 식탁의자를 뺐다. 그러더니 거기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어?”

똑같은 휴대폰 상자.

“뭐야?”

“임마, 너 휴대폰 바꿀 때 됐잖아. 그래서 내가 하나 샀어. CF도 계약한 기념으로.”

“형이··· 돈이 어디 있다고······.”

똑같은 휴대폰 상자. 똑같은 휴대폰.

나 최재환. 왜 이렇게 인간적이냐.

“그럼 이거 커플 폰이네?”

나는 먹먹함에 물든 마음을 지우려 애써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최재환이 피식 웃는다.

“커플 폰?”

“그래, 커플 폰. 하··· 이왕 이렇게 된 거, 10년이고 100년이고 같이 씁시다.”

“훗, 자식.”

우리는 크게 한번 웃고는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동안의 고생한 이야기를 꺼내는 최재환. 가만히 들어보니 내가 많은 걸 잊고 살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형······.”

그럼 이제 슬슬 최재환을 놀래어줄 차례인데.

“왜?”

대수롭지 않게 나를 본 최재환. 하지만 내 얼굴은 좀 전과 달리 무척 심각하다.

“실은··· 나, 어제 음주운전을 했어.”

“뭐?”

최재환이 깜짝 놀란다. 그러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임마!”

“미안해.”

“하······.”

현기증이 일어나는지 최재환이 눈을 질끈 감는다. 한참만에야 재차 한숨을 내쉰 뒤 나를 바라보고 묻는다.

“네가 차가 어디 있어서?”

“친구한테 빌렸지.”

“하아······. 다친 데는?”

이어진 최재환의 질문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물어 볼 것이 많을 텐데.

어디서 그런 거냐, 누가 알고 있냐, 경찰에 신고는 들어간 거냐, 혹시 기자가 봤냐 등등······. 그런데도 최재환은 내 몸부터 걱정을 하고 있다.

“큰 건 아니고, 오피스텔 주차장 다 와서 박았지 뭐야.”

가벼운 사고란 걸 알리자 바로 최재환의 질문이 쏟아진다.

“차주는? 보험사는? 혹시 신고 들어간 거야? 자식아, 어제 바로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

“다행히 본 사람이 없어. 차주한테는 어제 전화를 했고, 출장 중이라더라. 오늘 저녁에나 들어온다고 해서 이따 만나기로 했어.”

“후······.”

최재환의 얼굴이 그나마 가라앉는다.

“너 이 자식,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미안.”

“아후 이걸 그냥··· 언제 만나기로 했어? 내가 가서 보자. 혹시 모르니까, 차 사고는 내가 낸 거다.”

“형.”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임마! 일단 수습하고, 너 나한테 죽었다고 생각해. 음주운전이라니, 그게 얼마나 나쁜 건데. 술 처먹고 차 끌다가 사람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그래!”

최재환은 마치 널 위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어 같은, 비장한 시선으로 내게 호통을 쳤다.

반면 내 입장에서는 최재환이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슬금슬금 불안이 피어오른다. 이쯤에서 그만둬야 하나 싶고.

아무튼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떤 차야?”

“저 차.”

나는 카니발을 가리켰다. 최재환이 가까이 가더니 차를 슥슥 기웃거린다.

“어딜 박은 거야? 멀쩡한데?”

“살짝. 아주 살짝.”

“그래?”

심각한 얼굴로 차를 훑어보는 최재환. 그때, 삐빅 소리와 함께 카니발 차량의 라이트가 번쩍였다. 내가 주머니에서 차 키의 버튼을 누른 것이다.

“어?”

최재환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런데 주인이 안보이네?

“카니발 차주님!”

최재환이 크게 외쳤지만, 누가 오겠는가.

“차주님?”

말꼬리가 묘하게 꺾인 최재환이 나를 돌아본다.

“뭐냐······.”

영문을 몰라 하는 그에게 나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형, 이거.”

“어?”

최재환은 얼떨결에 내가 던진 차 키를 받았다.

“이, 이게 뭐야?”

“실은 나, 차 대표님이 불러서 회사에 들렸다 온 거야. CF 계약 됐다고 이거 주더라고.”

“그럼 뭐야, 음주··· 운전은?”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푸하하!”

나는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최재환의 얼굴 표정이 혼자 보기 아쉬울 정도다.

“아··· 그래··· 그 짠돌이가? 후··· 하하··· 이거 놀랄 노자네.”

웃는 듯 마는 듯, 최재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이렇게 말할 줄 알았냐? 이 자식아!!”

최재환의 얼굴이 사천왕상처럼 변한다. 나는 바로 위기신호를 캐치했다. 도망치는 나, 쫓아오는 최재환.

“너 거기 안 서! 깜짝 놀랐잖아!!”

여름의 늦은 밤, 오피스텔 주차장에 우리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 밤. 그리고 언젠가는 그리워질 밤. 그 밤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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