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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체결
“자, 한 잔 하시죠.”
바이바이에서는 백인혜 대표와 조암 부장이라는 사람이 나왔다. 반면 지에스엔터테인먼트에서는 차 대표와 정훈 이사가 자리를 했다.
이 자리는 바이바이 CF 건을 두고 양사 대표가 모인 자리지만, 표면적으로는 서로가 식사를 나누는 자리인 만큼 가볍게 술이 한 잔씩 오갔다.
“그런데, 차 대표님께서 직접 나오실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백인혜 대표가 하얀 술잔에 붉은 입술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그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피는 느낌에 차 대표가 괜스레 뒤로 물러나며 희멀건 이를 드러냈다.
“우리 회사 연기자인데 제가 나서야죠. 오히려 백 대표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셔서 저희로서는 고맙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그가 어깨를 한번 으쓱 올리자, 백 대표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가볍지 않고, 중후한 분위기의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아무쪼록 저희와 지에스엔터테인먼트가 인연이 된 만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그럼, 계약이야 부서 간에 처리할 일이지만, 크게 집어야 될 부분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죠. 아무리 우리가 광고주라고 해도 메인은 CF 모델이니까.”
백 대표의 한발 물러선 말에 차 대표는 일단 술 한 모금을 삼켰다. 이내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졌고, 머리가 말끔해지는 기분이다.
사실 계약서 초안이 차 대표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이시현이라는 배우의 입장을 생각하면 입맛대로 고를 형편은 아니더라도, 먹고 안 먹고는 또 전적으로 이쪽 마음 아닌가.
“그··· 멜로디 부분 있지 않습니까.”
“예, 그건 왜?”
백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본다.
“일단 그 부분은 이시현 배우의 의견도 필요하니까, 추후 조율이 가능하도록 계약서를 체결했으면 합니다. 백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넌지시 묻자 백 대표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모아지더니 표정이 좋지가 않다. 혹 실수한 건가 싶어 차 대표가 다시 얘기를 꺼내려는 찰나.
“이상하네요. 지에스엔터에서는 왜 그렇게 멜로디에 집착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예?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이시현 배우의 매니저도 그런 얘기를 했다던데······.”
백 대표가 말꼬리를 흐리자 술 주전자를 손에 쥐려던 차 대표가 멈칫했다. 그러자 백 대표가 대신 손을 뻗었다. 그녀가 술 주전자를 들자 차 대표가 정중히 잔을 받고 묻는다.
“어떤 얘기를 했다는 건지··· 저는 이시현이 바이바이를 찾아갔었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차 대표의 말에 백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얘기의 흐름에 차 대표 역시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백 대표의 곁에서 조용히 있던 조암 부장이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깃이 빳빳하게 다려진 블루와이셔츠를 입은 남자.
“실은, 이시현 배우의 매니저가 저희 기획부서와 얘기를 나누면서 멜로디 부분을 언급 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어떤 식으로?”
“혹시라도 CF에 멜로디가 있으면, 거기에 배우가 가사를 붙이고 부르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차 대표가 눈꺼풀을 흔들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눈썹을 올리자 백 대표가 미소를 보인다. 차 대표는 잠시 생각을 잇다가 다시 얘기를 꺼냈다.
“이상한 일이긴 하네요. 정말 그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제가 백 대표님을 모시고 장난을 칠 이유도 없고. 근데 뭐··· 배우가 그만큼 열심히 하겠다는 거니,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차 대표는 일부러 백 대표와 눈을 마주했다. 거짓을 말하지 않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백 대표는 그 말을 믿기로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부분은 그럼 그렇게 하죠. 또 하실 얘기가 있으실까요?”
“없습니다.”
차 대표는 더 이상 얘기를 끌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쪽에서 흔쾌히 받아줬으니 이쪽도 흔쾌히 넘어간다는 시선으로 백 대표를 다시 마주한다.
한편 둘의 만남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 한강변에서는 최재환이 초조한 마음을 감추려 시계를 들여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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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현이 오소리의 차를 타고 오래전에 한강변을 벗어났지만 최재환은 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노을이 구형 소나타를 붉게 물들이고, 어둠이 짙게 깔린 강물 위로 가로등 빛이 출렁일 쯤에야 그는 손목시계를 살폈다.
저녁 9시.
차 대표가 바이바이 백인혜 대표를 만나고 있을 시간이다.
‘하······.’
최재환의 가슴에 초조함이 피었다. 그나마 밤이 찾아와서인지 오후 내내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생각은 명료해진다.
이시현이 어제 오늘 많이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표현도 이상하지만, 어찌됐든 좋은 쪽으로 달라졌다.
‘설마, 미쳤나?’
우습지만 그런 생각도 해봤다. 지난 5년의 시간을 되짚어 봐도 오늘만큼 이시현의 매니저라는 것이 즐거운 적이 없다.
가끔 매니저들은 자신이 맡은 연예인이 제 마음처럼 움직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제오늘 이시현은 마치 매니저의 마음을 속속 들여다보듯이 행동했다. 대본리딩도 눈에 띄게 열심히 했고, 적극적으로 움직여 광고주의 마음도 붙잡았다.
‘이대로만 쭉 가면 좋겠는데.’
사람 일 모르는 것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명의 배우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될 수도 있고, 이시현이라고 그러지 못하라는 법 없다.
하지만 어찌됐든 지금은 눈앞의 것에 집중해야 한다.
‘···되겠지?’
윤 부장도 그렇고, 조 팀장도 그렇게 말했으니 될 가능성이 높다. 진짜 재수 없게 엎어질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지금 상황이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설사 만약 성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다행인 점은 회사와 이시현의 계약은 연장이 됐다는 점이다. 거기다가 차 대표가 관심을 가진 것을 보면 이번 단막극 여부에 따라서 회사의 지원이 달라질 수도 있다.
‘실장이라······.’
결과에 따라서 최재환도 실장 직함을 달수 있다.
말을 안 해 그렇지, 방송국에서 마주치는 타 회사 매니저들을 보면 자신보다 늦게 들어온 놈이 어느 날 실장 명함을 내밀고 방송국에 들어올 때가 적잖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어느 때는 최재환에게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비록 지금까지 실장 직함은 달지 못했어도, 이 바닥 눈도장이 명함이라는 말이 있듯, 최재환은 지난 시간 숱하게 방송국을 들락거렸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까지 해도 이시현이 안됐던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어디보자.”
최재환은 수첩을 꺼내들었다. 이쯤에서 이시현에 대한 기사가 한줄 나갔으면 싶어서 친분이 있는 기자들 목록을 뒤적이는 것이다. 홍보팀에 부탁해봤자 대충 어디 일간지, 혹은 생활정보지에나 올릴게 뻔하다.
‘훗.’
생활정보지는 오버지만 아무튼 까일 가능성이 크다.
‘서··· 기자.’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흩날리던 그녀의 흑발. 최재환은 무심코 서혜연 기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습관처럼 고개를 가로저어서 그녀를 지웠다.
‘아니야. 아니지.’
너무 메이저 잡지나 신문은 안 된다.
‘그리고 서혜연은······.’
아무튼 기사 포인트는 단막극과 주인공으로 잡되, 그 안에 이시현이라는 배우도 조연으로 나온다는 식으로 흘려야 한다. 거기에 가능성이 보이는 배우라는 식으로 양념을 치면 좋고.
괜스레 메이저 신문, 원 타이틀로 치고 들어가면 뒷감당이 어렵다. 또 그런 부탁을 한다고 들어줄 기자들도 아니고.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서로가 주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하······. 어떻게 입소문 같은 거 낼 수 없나.”
고민이 이어지지만 사실 즐거운 고민이다. 며칠 전만 해도 이시현은 이제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녀석이 이번 단막극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사뭇 기대가 된다.
“응?”
최재환은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젠장, 왜 자꾸 전화야.’
받기 싫은 전화다. 벨이 끊어지고 잠시 뒤에 문자가 도착했다.
[자꾸 전화 드려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어머니 때문에 꼭 드릴 얘기가······.]
최재환은 문자를 다 읽지도 않고 그냥 지워버렸다. 코끝을 찌푸린 그는 입술을 깨물고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
얼굴을 쓸어내리며 지친 한숨을 내쉰다. 그때,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인을 해야 한다.
‘어?’
최재환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예, 이사님.”
-잘됐어. 걱정하지 말라고.
“아······. 예, 감사합니다.”
-그래, 세부적인 것은 경영지원팀에서 조율할거니까 그렇게 알고.
“예, 감사합니다.”
-최재환.
“예. 이사님.”
잠시 대화가 끊겼다. 무슨 말이 이어지려나 생각하며 최재환은 한강을 눈에 담았다. 정처 없이 출렁이는 강물이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이고, 앞으로 흐를 시간 같았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그래.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눈물이 핑 돈다.
최재환은 조수석의 대시보드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미지근한 맥주가 있었다. 언제였더라. 시현이가 CF 하나 따면 나눠 마시자고 사뒀던 맥주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치······.
소리와 함께 눈시울이 붉어진다. 캔뚜껑을 따려던 최재환은 멈칫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이내 시동을 걸고 한강변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