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3화 (1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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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체결

바닥에 쏟아진 김치 통을 보고 있는 여자.

그녀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작은 통에 김치를 나눠 담던 중에 통을 떨어트렸을 뿐이다. 겨우 그것뿐인데··· 결과는 너무 처참해서 부엌이 온통 김칫국물로 범벅이 됐다.

“···하.”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는 한숨과 함께 걸레를 손에 쥐었다. 김치를 걷어내고, 닦고 또 닦는다. 그렇게 한참을 닦았지만 고개만 돌리면 벌건 김칫국물이 튄 부분이 눈에 띈다. 의자에도 튀었고, 냉장고 밑에도 튀었다.

“흐흑······.”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화가 난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가 있었다면 지금 뭐라고 위로해줬을까. 괜찮다고, 그가 치운다고 했겠지. 아니면 묵묵히 곁에 와서 꼭 끌어안아 줬을지도 모르겠다.

‘하······.’

그녀는 다시 입술을 깨물고 마저 정리를 끝냈다. 나중에 또 빨간 자국이 눈에 띌지는 모르겠지만, 걸레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에는 눈이 퉁퉁 부운 여자가 서 있다. 고작 김치 통 하나 엎은 것 때문에 이 난리를 쳤다니. 한심함에 절로 한숨이 흐르자, 과거의 한 페이지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정희수, 너 정말 그만 둘 거야?]

매니저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의 광대 노릇이나 하는 것은 지겨워졌다. 조명이 자신을 비출 때면 겁이 덜컥 날 때도 있었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귀에 들려올 때면 온몸이 벌레들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어, 나 그만 둘 거야. 후회 안 해.]

[좋아, 대신 다시는 연기하지 못할 거야. 알지?]

[알아.]

회사는 그녀가 이 바닥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풀어줬다. 그마나 인정이 있는 회사였으니 그렇게 해준 것이다. 안 그랬다면 소송으로 얼룩진 이십대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그 바닥을 떠났고, 행복할지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를 찾아온 것은 허전함뿐이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리운 것이 아니다.

그저 주위가 텅 비어졌을 뿐이다.

마치 온갖 색으로 가득 찬 도화지 속 세상에서, 무색의 공간으로 옮겨진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 사람을 만난 것이다.

‘박한영······.’

정희수는 손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그에 대한 생각도 같이 지우고 화장실을 나왔다. 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비록 야간업소 주방이라지만 일을 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경력으로는 위계질서가 뚜렷한 주방이라는 공간에서 부주방장 타이틀을 얻기까지 무척 긴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냥 자리가 공석이어서 부주방장이 됐다.

‘훗, 부주방장은 무슨.’

그저 허울뿐인 명칭. 그나마 유흥업소 치고는 꽤 큰 곳이라서, 구색을 갖출 만큼의 인원이 주방에 들어가니 그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거울 앞에 선 그녀.

이제 배우 정희수가 아닌, 부주방장 정희수를 바라본다.

낮밤이 바뀐 탓인지 생기를 잃은 얼굴이다. 푸석해지고 옅어진 피부톤, 머리카락은 뚝뚝 끊어질 만큼 힘이 없어 보이고.

‘아······.’

순간이지만 정희수는 자신의 주변에 온갖 사람들이 가득한 모습을 떠올리곤 탄음을 흘렸다. 배우 정희수는 머리 하나를 만지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했다.

그랬는데.

‘후회··· 하는 걸까.’

차라리 그 세계에 있었다면 박한영을 떠나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부주방장 정희수라는 존재는 박한영의 여자가 되기에는 너무 하찮다.

‘하······.’

또다시 한숨 뒤에 그녀는 보일러 버튼을 꾹 눌렀다.

이제 옷을 벗는다. 샤워를 해야 하니까.

**

우리는 회사를 나와 한강변으로 향했다. 단막극 준비를 위해서 대사를 맞춰보기 위해서였다. 일단은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차를 세웠다.

“시현아.”

최재환이 대본을 건넸다. 어제의 대본리딩 현장에서 눈에 띤 중요한 부분을 그 나름대로 표시해놓은 것 같았다.

“너, 여기서 말이야. 좀 과하더라. 네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힘을 빼야지.”

최재환이 집어준 부분은 여 주인공 지현과 남 주인공 주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씬이다. 그 다음 씬에서 이시현이 맡은 박태식이 나타나 둘을 훼방 놓는 장면이다.

“흠, 내가 그랬나?”

“안되겠다. 다음번 리딩부터는 캠코더라도 들고 다녀야겠네.”

“굳이 뭘 그래, 그냥 휴대폰으로 찍으면······.”

“뭐?”

“아, 아니야.”

나는 지금 최신형 스마트폰을 떠올리고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2000년 6월. 액정은 2인치도 안되며, 그 화질과 벨소리는 흑백에 단음이라는, 훗날엔 어린애들도 안 가지고 논다는 그런 처참한 상태.

물론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최신형 휴대폰으로 불리며 패션아이템이겠지만··· 어찌됐든 나는 다시 이 시대에 적응해야만 한다.

“싱겁기는.”

최재환은 오른손 검지에 침을 슥 묻히고 대본을 넘겨보는데 열중했다. 그 옆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할 미래는 어떤 방향으로 바뀔까를 떠올려봤다.

“어이 이 배우, 또 딴 생각이야?”

최재환이 눈을 흘긴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자식··· 여기 한번 봐, 대사 치지 말고 일단 생각을 해보자고.”

“어, 오케이.”

내가 콧바람을 들썩이며 바싹 다가가 최재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또 뭘 실수한 건가.

“왜?”

“···아니다.”

최재환이 대충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마도 내 말투나 행동에서 다른 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며, 첫날도 아닌 둘째 날이니 그런대로 넘기는 모습이다.

“야, 근데, 오소리한테 뭣 좀 해줘야겠다.”

대본을 몇 장 넘길 즘에 최재환이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그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오소리한테?”

“그래. 대표님은 내가 발로 뛰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오소리 덕분에 너 단막극에 낀 거고, 이번 CF도 오소리가 흔쾌히 빠져준 덕에 무난하게 네가 뛰어들 수 있었던 거고.”

대표님은 무슨.

그 대표가 언젠가는 너를 배신한다고. 아니다, 배신이라기보다는 장난감처럼 탑 위에 올려놓고 다시금 바닥에 내려놓겠지.

내가 분노를 삼키는 사이에도 최재환의 고민은 이어졌다.

“흠, 뭐가 좋을까. 에이, 모르겠다.”

고민을 뒤로하고 대본에 집중하는데, 최재환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휴대폰 폴더를 젖혀 액정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벨소리가 멈출 때까지 그는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누군데?”

“아니야, 그냥.”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얼굴이다. 그래서 더 묻지 않고 있는데, 멈췄던 벨소리가 다시 울린다.

“하··· 젠장.”

곧바로 최재환의 입에서 낮고 진한 단어가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휴대폰을 보더니 찌푸린 얼굴을 다시 편다.

“허, 양반은 못되나 보다.”

최재환이 혼잣말을 하며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예, 오소리 씨.”

전화를 걸어온 이는 마침 오소리였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다시 대본을 눈에 담았다. 어찌됐든 이번에는 잘해야 한다. 생각보다 판이 커졌으니까.

‘대표··· 까지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머리가 조금 복잡해진다. 그러나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이 단막극을 숱하게 봤다. 이시현 대신 투입된 배우는 차마 보기가 힘든 연기를 펼쳤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고, 그 아쉬움이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그러니 할 수 있다.

“예? 마침 근처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최재환이 전화 통화를 끝냈다.

“뭐래?”

내가 대본을 덮고 물어보자 최재환이 눈을 찌푸리며 말한다.

“시현이 너 좀 쓰자는데?”

“뭐? 뭘 써?”

“아, 왔다.”

“뭐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다가오는 하얀 밴 차량이 보였다. 그곳에서 내린 이는 오소리의 로드매니저였다.

“형님!”

오소리의 매니저가 뛰어와 우리의 똥차를 두드린다. 그러자 최재환이 차에서 내렸다. 나 역시 뒤를 따라 내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오소리의 매니저를 향해 인사를 하고 힐끗 밴을 쳐다봤다. 차창의 짙은 선탠으로 인해 안을 볼 수가 없다. 그 안에서 오소리가 우리를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 이시현 씨. 이번에 한 건 했다면서요?”

오소리 매니저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회사에는 이래저래 소문이 난 듯 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형이 다 했죠.”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오소리 씨 안에 있어?”

최재환이 손사래를 치고 묻자 오소리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재환이 다시 묻는다.

“시현일 어디 데려가려고?”

“오늘 신사동에서 파티가 있는데, 뭐 지인이 하는가 봐요. 그래서 가야 하는데, 아시잖아요, 혼자 가기 좀 그렇잖아요.”

“흠······. 문제없는 거야?”

“제가 옆에서 잘 지켜볼게요.”

“뭔 일 생기면, 너 나한테 죽는다.”

“하··· 하하. 형님도 참.”

“농담 아니거든?”

싸늘해진 최재환의 시선에 오소리 매니저가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재환이 다시 나를 돌아봤다.

“이시현, 실수하지 말고, 저녁에 대표님하고 바이바이 관계자들 자리 끝나면 결과 나올 테니까··· 그때 내가 결과 알려줄게.”

“응.”

오소리 매니저가 밴의 옆문을 열자, 의자 깊이 등을 묻고 있는 오소리가 보인다.

‘흠, 여배우는 여배우네.’

하얀색 레이스 원피스가 눈에 들어온다. 원피스에 새겨진 장미 꽃 자수처럼 그녀에게서 장미향이 물씬 풍겨온다.

“안녕하세요.”

나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밴에 올라탔다. 오소리의 모습을 눈에 담고, 밖에서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최재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소리 매니저가 차 문을 닫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확 다가오는 장미향.

“안녕하세요.”

나는 다시 고갯짓을 했고,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가는 턱선, 도톰한 입술, 콧날, 크고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놓치지 않는다. 뚜렷한 마스크는 아닌데 자꾸 눈이 가는 얼굴이다. 무엇보다 건강미 어린 구릿빛 피부가 그녀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자기, 나 어때?”

“예? 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눈을 끔뻑이는 내게 오소리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내 애인 역할 좀 해줘요.”

“애인, 역할이요?”

이시현의 나이 스물일곱.

오소리의 나이 스물.

서로의 외모만 봐서는 나이차를 느끼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애인이라니.

“왜요, 싫어요?”

오소리가 짙은 눈썹을 구부리며 나를 쳐다본다. 어딘지 서운하다는 얼굴인데.

“싫기는요. 그냥, 갑작스러우니까.”

“훗, 그냥 좀 도와줘요.”

“···예.”

자존심 강한 오소리가 도와달라니.

의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이제 바이바이 CF는 내가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다면 오소리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잘 되겠지.’

그저, 그녀의 미래가 잘 되기를 바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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