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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체결
대표실 정중앙. 소파 상석에 앉은 차 대표, 그 우측으로 주르륵 앉아 있는 임원진, 그리고 텅 빈 좌측 소파. 우리가 그 좌측 소파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뭐랄까. 청문회를 앞둔 국회의원의 기분이랄까.
‘이런··· 과거로 온지 겨우 이틀 밖에 안됐건만.’
뭔가 중대한 사건이라도 벌어진 것일까.
미래가 바뀌었다거나, 아니면 우주의 소멸 그런 거?
‘훗.’
순간 피식 웃음이 새나올 뻔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낮은 심호흡을 했다.
‘후······.’
2000년 6월의 날씨는 선선한 편이지만 방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모인 임원들이 죄다 남자이니 두터운 스킨 냄새와 향수, 담배 냄새가 뭉쳐서 머리 위에서 내려앉는 기분이다.
잠시 초조함을 지우고 차 대표를 눈에 담았다. 그는 가수 출신인데, 향수 취향이 독특하다. 평소 그에게서는 과일 향이 나는데······.
‘그래, 기억나네. 이 향수.’
그 때문에 시트러스한 느낌이 물씬 달라붙어 있다. 그뿐 아니라 나이와는 달리 댄디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남자였다. 지금도 보면 블랙셔츠에, 블랙 진, 네이비 블레이저까지.
“이시현이.”
차 대표가 입을 열었지만 그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예.”
나 이시현이 입을 연 것이 아니다. 최재환이 입을 열었다.
매니저는 때로는 배우의 손과 발, 입이 되기도 한다.
“니들 뭐하고 다니는 거야?”
“예?”
최재환이 다시금 멍한 대답을 했다. 반면 나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시현이라면 지금 뭘 했을까를 생각하니,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될 뿐이다.
“저희가 뭐 실수라도······.”
“니들 바이바이 CF가 무슨 얘기야?”
“예? 그건······.”
최재환은 대답을 망설이며 윤석규 부장을 바라봤다. 책임을 전가하려는 게 아니라 말을 잘못하면 윤석규 부장이 책임을 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을 하는 것 같다.
“저기 대표님.”
윤석규 부장이 내키지 않은 듯 찌푸린 얼굴로 얘기를 꺼냈다.
“그거 최재환이가 물어온 건인데요.”
그 말을 꺼내고 윤 부장이 다시 망설이자 차 대표가 그를 재촉했다.
“계속해.”
“사실, 제가 오소리한테 해보라고 제안했었습니다. 그런데, 저 친구들이 또 해보고 싶다고 해서 제가 다시 최재환에게 넘긴 겁니다.”
“무슨 CF야?”
“바이바이 음료라고, 탄산음료 CF입니다.”
최재환이 냉큼 대답했다. 그러자 차 대표가 눈을 찌푸린다. 그 모습에 찔끔한 최재환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윤 부장.”
“예, 대표님.”
“홍보부서에 말해서, 바이바이 쪽에 CF 콘셉트 받아오라고 그래. 계약서 사본이든, 콘티든 뭐든 다 받아와.”
“예.”
“그리고, CF 감독이 누구인지, 예산은··· 아니다. 그쪽 대표하고 자리 잡아.”
“예?”
윤 부장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오늘 저녁으로 잡아, 우리가 호스트니까 좋은 곳으로 잡아.”
“직접 나서시게요?”
어느새 대화는 차 대표와 윤 부장 사이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최재환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내 새끼들 첫 계약은 내가 움직이는 거 몰라?”
차 대표가 쏘아붙이듯 말한다. 그러자 윤 부장이 눈을 숙이고 제 입술만 핥았다.
이렇듯 차 대표는 소속 연예인들의 첫 CF계약은 무조건 직접 나선다. 이로 인해 광고주 쪽에서는 신인 연예인의 첫 CF라고 대충 대하기가 힘들고, 연예인 입장에서는 대표가 직접 신경을 써주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영리한 사람.’
훗날 차 대표는 나 최재환에게 회사를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이 양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시현이 너··· 계약 만료 됐지?”
“예.”
이번에는 최재환이 아닌 나 이시현이 직접 대답했다. 그러자 차 대표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흡사 독심술로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다.
“너 이번에 단막극 드라마 들어간다며?”
“예, 오소리 선배님이 힘 써줬습니다.”
“오소리가 뭔 힘이 있어? 니 매니저가 발바닥에 땀나게 뛴 거지.”
“아··· 예.”
차 대표가 최재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찔끔한 최재환. 차 대표는 다시 휙 고개를 돌려 박창수 상무를 돌아봤다.
“박 상무.”
“예, 대표님.”
박창수 상무는 덩치가 제법 있는 양반이다. 힘도 장사다. 흔한 말로 조폭 출신인데, 오래전 그쪽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지에스엔터테인먼트는 그쪽 자금이 닿지 않는, 나름 깨끗한 매니지먼트 회사다.
“최재환이 입사한지 얼마나 됐지?”
“5년 됐습니다.”
“오래됐네. 근데 아직도 실장 못 달았어?”
그러자 박 상무가 최재환을 핀잔하듯 쳐다보고 대답했다.
“열심히는 하는데, 배우가 신통치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지 배우라고 계속 끌어안고 있고, 회사 입장에서는 마이너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이시현 계약 끝난 참에 한 1년 박한영 로드 했다가 실적 채우면 실장 올리려고 했습니다.”
재밌는 얘기다. 그러면 3W는 실적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3W······.’
당시 나는 줄곧 이시현만 맡은 게 아니다. 3W라는 걸그룹도 맡았었는데, 기껏 궤도에 오르니 빠지라는 통보가 내려왔다. 그래서 이시현에게 더 신경을 쏟았던 거고. 날짜 계산을 해봐야겠지만··· 아마 지금 시간을 기준으로 작년 말쯤이었을 것이다.
“흠, 그럼 6년인데······.”
차 대표가 끙 신음소리를 뱉다가 부대표이사 정훈을 바라봤다. 그는 차 대표가 꽤 신뢰하는 남자다. 오른팔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한다.
“정 이사 생각은 어때?”
“흠······. 제 생각이 중요하겠습니까. 최재환이 얘길 들어봐야지.”
다시 최재환에게 시선이 쏠렸다. 왠지 내가 긴장이 된다.
최재환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의 인사결정을 눈앞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긴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 이시현이 놓고 박한영 1년 맡을래? 아니면 이시현이 계속 붙들고 있을래?”
정 이사가 단호하게 묻는다. 해석을 하자면 이시현 맡고 이대로 갈래, 아니면 박한영 1년 맡고 실장 달래. 이 말이다.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해봐야 될법한 질문인데, 미간을 찌푸린 최재환이 입술을 깨물고 머뭇거린다. 뭐야? 바로 대답 하려는 건가? 어이어이 최재환, 신중해야 해.
“저 이시현 매니저입니다. 망해도 같이 망하고, 잘 되도 같이 잘 되렵니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최재환. 나는 눈썹을 쫑긋 세울 정도로 놀랐다. 역시, 나 최재환 깡이 있다.
“훗.”
정 이사가 피식 웃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차 대표를 향해 말했다.
“이번 단막극 나오는 거 보고 결정하시죠. 6년은 너무 깁니다. 최재환 밑에 애들이 몇인데요.”
“흠······. 이시현이.”
차 대표가 또 나를 바라본다. 저 양반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감정이 들썩인다. 불편하고, 고맙고, 아쉽고··· 그런 애틋함.
“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
“저한테 달렸다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놈 말은 잘하네. 최재환이.”
“예, 대표님.”
“너 진짜 후회 안 하겠어? 저놈 카메라 못 받는다며? 단막극 망치면 나 너 그냥 내버려둘 거야. 기회 또 언제 올지 몰라. 박한영 1년 따라다니고 실장 달면 그 뒤에 괜찮은 배우나 연습생 하나 직접 골라서 데리고 다닐 수도 있어. 너 방송국에서 실장이랑 로드랑 확 구분하는 거 알잖아?”
“예, 압니다.”
5년을 굴러먹었으니 모를 리가 있나.
당신들은 최재환을 하찮게 볼지 몰라도, 방송국에서는 최재환 좀 알아주거든?
잠시 내가 속마음에서나마 과거의 울분을 토하는 사이 최 대표가 다시 묻는다.
“그래도 이시현이야?”
“그래도 이시현입니다.”
“···나가봐.”
그 말이 떨어지자 최재환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실상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대표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최재환이 비틀거린다. 내가 서둘러 부축을 하자 그가 긴장으로 고인 숨을 피리리 내쉬었다.
“하······. 쫄려 죽는지 알았네.”
우리는 일부러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내려왔다. 중간에 최재환이 계단에 걸터앉으며 혼잣말을 속삭이듯 물었다.
“근데, 바이바이 CF는 어떻게 된 거야?”
그에 대한 해답은 조금 뒤에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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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대표실에서 내려온 윤 부장이 우리를 사무실에 불렀다. 구석 자리에 앉히더니, 담배를 입에 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얘기를 한다.
“그쪽 백 대표라는 사람이 우리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했단다. 너희들 바이바이가 뉴월드 계열사 인거 알아?”
“아, 그래요?”
“그것도 모르면서··· 어이구, 이 대책 없는 놈들······. 아무튼 뉴월드에서도 바이바이의 백 대표가 제법 먹어주나 보더라. 뭐 듣기로는 뉴월드 회장이랑 친인척이라는 얘기도 있고. 어찌됐든 그 여자가 이시현이 콕 집어서 쓰고 싶다고 대표님에게 직접 연락을 했단다.”
“왜요?”
최재환이 말이 안 된다는 듯 되묻는다. 이상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었다면 그저 계약서를 쓰면 그만인 것이다. 굳이 차 대표에게 연락을 할 필요도 없고, 그만큼의 대단한 CF도 아니다.
물론 계약 과정에 회사와 회사가 마주해야겠지만, 아직 그럴 단계도 아닌데··· 왜 굳이 차 대표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직접 통화하는 수고스러운 일을 했을까.
“모르지 임마. 그래서 대표님이 우리 부른 거 아니야?”
“···이상한 일이네.”
고개를 갸우뚱하는 최재환.
“아무튼 이렇게 된 거, 이시현이 너 이번에 제대로 해야 해. 너 엎어지면, 최재환뿐만 아니라 나까지 잘못 돼. 알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최재환이 너.”
“예.”
“자식, 아까 졸라 멋있더라.”
“예?”
영문을 몰라 하는 최재환을 보며 윤 부장이 픽 웃었다.
“가봐 임마들아.”
최재환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조심히 물었다.
“그럼······. CF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긴? 그쪽에서는 하자고 연락 왔고, 우리 대표님은 하겠다고 만나는 거 아니야. 된 거지 임마.”
“지, 진짜요?”
최재환의 얼굴에 이제야 밝은 빛이 맴돌았다. 나 역시도 사실 긴가민가하고 있던 상황이다.
“나가봐.”
우리는 사무실을 나왔다. 그러자 최재환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시현아.”
“어. 형.”
“우리 꿈꾸는 건가? 나 볼 좀 꼬집어봐.”
내가 최재환의 통통한 볼을 꼬집자, 그는 아!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주먹을 불끈 쥔 최재환.
“이야!”
그 환호에 화답하듯 나 역시도 곁에서 힘껏 외쳤다.
“이야!”
그런 우리 둘을 사무실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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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저러고 있네.”
박한영의 혼잣말에 강 실장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이시현과 최재환을 쳐다봤다.
‘젠장.’
이미 대표실에서 벌어진 상황을 전해들은 강 실장이다.
사실 최재환이가 배우 복이 없어 그렇지, 성격 좋고 성실해서 방송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친구다.
그런 친구라면 박한영 옆에 두기도 좋고, 또 그러면 강 실장으로서는 제 일이 줄어드니 좋았다. 그래서 이번에 박한영의 재계약을 빌미로 최재환을 박한영의 로드로 끌어오려고 했는데···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가리가 될 줄이야.
“그건 어떻게 됐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돌리면서 박한영이 물었다. 강 실장은 그의 곁에 서서 2층 버튼을 누르며 한숨을 먼저 뱉고 입을 열었다.
“걔, 너 만나는 거 부담스럽다더라.”
“그게 다야?”
“뭐······. 다른 건 아닌 거 같더라.”
“말했잖아. 그런 쪽 아니라고. 그리고··· 실수 한적 없고.”
“누가 뭐래?”
강 실장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시 눈을 기울이고 박한영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너, 내가 그거 좀 의심했다고 지금 이러는 거야?”
누구나 다 그런 상황이라면 의심 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박한영은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아까 사무실에서 그 친구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저 매니저는, 저 배우의 말을 의심했을까? 아니면 믿었을까.”
“그래서?”
“저 매니저가 나 깠다며? 지 배우가 좋다고.”
“그거야 임마, 상황이 그렇게 돌아간 거고,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형.”
박한영이 고개를 돌려 강 실장을 마주봤다. 마침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 앞에 한 무리 연습생들이 주르르 서 있었다.
다들 한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를 외치는데 박한영은 여전한 자세로 강 실장을 바라봤다. 그 상태로 긴 팔을 뻗어 문이 닫히지 않게끔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재계약. 생각 좀 해야 하니까··· 당분간 나 혼자 다닐게.”
그 말에 강 실장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