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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시현아, 너 진짜 하고 싶은 거 맞아?”
최재환이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우리는 지금 윤 부장과 오소리를 청담동의 회사 앞에 내려주고 바이바이로 이동하는 길이다.
“해보자 형.”
나는 지금 전의에 불타오르고 있다.
최재환이 피식 웃어넘겼지만 여전히 애매하다는 표정이다.
‘그런데··· 이제 막 미팅이니까, 젖소 얘기 할라나?’
정직한 광고주라면 초반에 콘셉트를 다 알려주지만 비도덕적인 광고주는 촬영 당일에야 세부 콘셉트를 알려주거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야 알려주는 수가 있다.
‘하지만 여자하고 남자는 확연히 다른데··· 설마 다른 콘셉트로 가려나.’
어찌됐든 일단은 가서 부딪쳐봐야 알 것이다.
“야, 근데 밴이 좋긴 좋다. 다 쓰러진 소나타만 몰다가 밴이라니.”
최재환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대를 두드린다. 많이 들뜬 모습인데, 오소리가 오늘 스케줄이 없다며 자신의 차량을 우리에게 양보했기 때문이다.
하긴, 최재환의 지금 기분이 이해가 간다.
당시 나는 이시현이 회사를 떠나고 나서도 한동안 더 로드매니저 생활을 했다. 그 나이와 경력이면 실장 직함은 달아야 했는데, 아무래도 그만한 실적이 없다보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그만큼 능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시현에게 많은 신경을 썼고, 딱히 괜찮은 친구들을 맡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참 알 수 없는 게, 그런 인생도 나중에 한방에 바뀌게 되는 기회가 찾아온다.
“형, 우리도 이런 차 한번 몰자.”
“몰고 있잖아.”
“아니, 나 잘되면······.”
“이 자식, 이거 갑자기 롤러코스터 급으로 정신 차렸는데?”
“열심히 할 거야.”
“그래, 오늘 기분 좋은 날인데, 뭔들 안 되겠냐.”
시답잖은 농담과 웃음이 이어진 사이 오소리의 하얀 밴은 서초동의 바이바이 사옥에 도착했다. 내가 차에서 내리려는데 최재환이 말했다.
“야, 내리지마.”
“왜?”
“기다려봐.”
최재환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귀빈을 맞이하듯 정중한 자세로 밴의 옆문을 열어줬다.
“이제 내리십시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자 최재환이 하얀 이를 보이며 말한다.
“자식아, 오늘은 실컷 톱스타 기분 내봐.”
“알겠습니다! 톱스타 매니저님!”
“이 자식 진짜 미쳤나 보네. 하하하.”
우리는 웃음을 귀에 걸치고 주차장을 지나서 건물 입구로 향했다. 마침 바이바이 직원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 과장님!”
쪼르르 달려간 최재환이 곧바로 허리를 숙이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김 과장이란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근데 김 과장의 표정이 좋지가 않다.
“뭐야? 오소리 오는 거 아니었어?”
“오소리 씨가 일이 생겨서, 그리고 원래 이 친구 오려고 했던 거였어요.”
“아니, 위에다가 얘기 다 끝났는데··· 이러면 좀 곤란해.”
김 과장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도 옆으로 가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이시현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김 과장이 께름칙한 얼굴로 입맛을 쩝 다신다.
“에이, 일단 들어갑시다.”
그 말에 최재환이 옅은 미소를 보인다. 그 순박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3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보고 있던 직원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돌려 나와 최재환을 쳐다본다.
‘흠, 여직원들이 많네.’
사무실의 남녀 비율이 8:2 정도로 여성이 월등히 많아 보였다.
나는 사무실 여직원들에게 미소와 함께 눈인사를 하면서 회의실로 향했다. 그저 눈 한번 스쳤을 뿐인데도 그녀들 시선에 호감의 빛이 서린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김 과장이 빈 회의실에 우리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나가자 최재환이 심호흡을 길게 했다.
“이야, 이거 떨리네.”
“떨기는.”
그러는 나도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오소리를 대신해 오긴 했는데 괜한 짓을 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잠시 동안 남자 둘이서 연거푸 한숨만 내쉬는데, 여직원이 들어왔다. 그녀가 상냥하게 미소 짓고 우리에게 묻는다.
“저기, 차 뭐 드시겠어요?”
“아, 저희는 물 주시면 됩니다.”
최재환이 허허 웃으며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잠시 뒤에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정수기 물통을 교체하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최재환이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는 여직원 대신 정수기 물통을 교체해주고서는 그녀와 몇 마디를 나누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다.
“뭐래?”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터.
“야, 다행히 여기 대표가 여자란다. 그러니까, 너 끼부려야 된다.”
“뭐? 하하, 알았어.”
“허, 이 놈 진짜 오늘 이상하네.”
또다시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만 좀 해. 나 정신 차렸다니까? 자꾸 그럴래? 확 또 삐뚤어져?”
“알았어 알았어. 지금처럼만 해. 그럼 내가 너 지옥 끝까지 커버한다.”
쿡쿡 소리 내 웃는 최재환의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았다. 그는 지금 일하는 맛이라는 걸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뒤에 기획부서 팀장이라는 사람과 직원들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팀장 역시도 여자다.
“제 명함입니다.”
바이바이 기획부서 민다영 팀장.
“아, 저도 여기 명함.”
팀장의 명함을 받은 최재환이 재빨리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그런 뒤 최재환은 팀장의 명함을 소중한 것을 대하듯 쓰다듬고는 지갑에 고이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민다영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슥 베였다가 다시 사라진다.
“근데, 우리는 오소리 씨가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쪽으로 콘셉트를 맞춘 상태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최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는 상대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한다. 그게 을의 정석이기 때문이다.
“뭐, 남자 모델도 나쁘지는 않은데······.”
민다영 팀장은 내 얼굴, 그러니까 이시현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었다. 나는 그녀가 편히 볼 수 있도록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적극적인 모습에 최재환이 되레 놀란 얼굴이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후훗. 젊은 분이 싹싹하시네요.”
나는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다른 여직원들에게는 살짝 눈웃음을 보였다. 끼를 부리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약간은 돌았나 싶을 정도로 행동하고 있었다.
뭐랄까.
이 얼굴이 되니 강한 자신감이 생긴다고 할까.
이시현 이놈은 왜 이걸 활용을 못했던 거냐.
“뭐, 오늘은 사진 좀 찍고··· 우리도 일단은 회의를 거쳐야 될 것 같아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최재환과 민다영 팀장은 단 둘이 몇 가지 더 나눌 얘기가 있었기에, 나는 일단 직원들과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카메라 좀 가져올게요.”
여직원이 미소를 보이며 내가 앉아 있을 곳을 안내해주고 등을 보였다. 사무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갈색 단발머리에 내려앉는다.
‘흠, 자연모인가?’
별게 다 궁금해진다. 이런 상황에 이런 생각이라니.
일반적으로 배우들 혹은 가수들의 프로필은 파일철로 만들어 항시 차 안에 구비를 해둔다. 그렇지만 이시현의 프로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녀석에 대한 회사의 지원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오래 기다리셨죠? 메모리카드를 좀 찾느라고요. 헤, 이래봬도 32메가예요.”
훗날에는 길거리에 버려져 있어도 줍지 않을 메모리카드 용량을 자랑하며 단발머리 그녀가 맑게 웃는다. 그녀의 손에는 흡사 벽돌이라고 볼 수 있을 크기의 디지털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럼, 시현 씨 여기에 서 보시겠어요?”
일단은 사진촬영에 필요한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은 아니기에 사무실 한쪽의 벽 앞에서 촬영이 시작됐다.
“찍을게요.”
단발머리 그녀가 미소와 함께 디지털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나는 내가 숱하게 보아온 바에 입각해서 포즈를 취했다.
촬영이 계속될수록 멀리서 관심을 보이던 직원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와 구경을 했다.
‘크, 이 미쳐버린 자신감. 이래서 잘난 놈들이 모델을 하는 거구나.’
나는 새삼 이시현의 신체에 감탄하며 환한 얼굴을 보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얼굴을 두드린다. 평소 나는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카메라 플래시가 닿는 이 순간에 들뜨고 있었다. 심지어 상쾌한 아침 바람을 맞는 기분까지 든다.
“저기, 사진 같이 찍어도 돼요?”
기획부서의 회의를 위한 사진촬영이 끝나고, 단발머리의 그녀가 내게 물었다. 뭐, 거절할 이유 없지 않은가.
“물론이죠. 우리 같이 찍어요.”
오히려 내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벽에 섰다.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 V를 만들고 사진을 찍었다.
“어, 우리도 찍어요!”
다른 직원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게 바싹 붙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좀 전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나는 힐끗 시선을 들어 저 멀리서 이곳을 보고 있는 여자를 눈에 담았다.
그녀는 세로줄이 프린팅 된 레이어 티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전체적으로 단아해 보인다. 나이는 50대 초반 쯤.
“저기, 저 분은 누구세요?”
사진을 찍으며 내가 속삭여 묻자 단발머리 그녀 역시도 속삭여 대답을 해줬다.
“대표님이세요. 여기 자주 내려오시거든요.”
“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그쪽으로 인사를 했다. 대표라는 여자는 조금 더 나를 지켜보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뭐야? 이시현이 마음에 안 드나.’
하지만 그녀의 행동에 개의치 않는다. 지금 순간이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뭐랄까, 현장에서 숨을 쉬는 기분이랄까. 정적인 세상이나 다름없는 ‘정’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자리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심장의 움직임이 있었다.
잠시 뒤에 최재환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좋지가 않다.
“그럼, 곧 연락드릴게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크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최재환은 데면데면한 모습이다. 그새 친해진 여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건물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중에 최재환이 나를 돌아봤다.
“너, 이거 진짜 하고 싶냐?”
“그렇다니까. 왜?”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최재환이 회의실에서 나오고 분위기가 달라졌다. 분명 회의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유를 물어볼까 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인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고민을 해야 성장을 한다, 는 개뿔이고··· 그저 지금은 적당히 행동을 자제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너무 나 댔어.’
사람이 하루아침에 확 변하는 법은 없다.
그러니까 조절을 할 필요가 있었다.
청담동의 회사로 돌아온 우리는 매니지먼트 사업부서가 있는 4층으로 향했다. 도중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연습생들이 최재환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아, TLON이네.’
연습생들 무리에는 나중에 크게 대성을 하는 5인조 아이돌그룹 ‘TLON’ 친구들이 섞여 있었다.
최재환은 나를 매니지먼트 사업부에 두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지에스엔터테인먼트 대표실이 있는 경영지원부서가 있다.
사무실에 홀로 남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파티션 너머에서 여기저기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매니지먼트 사업부 직원들.
‘···이때와는 많이 달라졌지.’
2016년의 사무실 전경이 떠오른다. 10년이면 물길이 바뀌고 강산이 변한다는데, 나는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을 살았고, 다시금 돌아왔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최재환이 다시 사무실에 내려왔다. 그가 찌푸린 얼굴로 다가와 말한다.
“야, 헛걸음했다.”
“왜?”
“대표님 안 계신다.”
“뭐, 또 작은 마누라 만나러 갔나 보지.”
나도 모르게 속삭이고 말았다. 그러자 최재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임마, 그거 어떻게 알았어?”
그는 내게 딱 달라붙어 입을 틀어막고는 주변을 살폈다. 혹 누가 들었나 싶어서였다.
“아, 아니야. 나도 어디서 주워들었어.”
“너 임마 입조심해. 이 자식, 회사는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들었대? 이거 아는 사람 나하고 윤 부장님 밖에 없는데.”
“아··· 뭐.”
난감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거늘.
맘만 먹으면 앞으로 흥행할 영화, 드라마, 음악, 다 내 손아귀에 있다.
‘하지만······. 그럼 재미없지.’
나는 최재환과 함께 성장을 하고 싶은 거지 성공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성공은 이미 해봤다. 해봤는데 또 하겠다는 것은 집착일 뿐이다.
이제 최우선 조건은 행복이다. 나도 인생을 즐기고 싶다. 더 이상 딱딱한 세상, 성공을 위한 아등바등 삶은 더는 사양이다.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도, 그것도 이시현의 몸으로 돌아온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근데, 너 진짜 그거 해야겠냐?”
최재환이 여전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내게 물었다.
“뭘?”
“CF 말이야.”
“왜에? 아까부터 왜 그래?”
그제야 최재환이 한숨과 함께 얘기를 꺼냈다.
“그게······. 너 젖소 옷 입고 해야 해.”
“뭐?”
내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최재환이 그럴지 알았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젖소 옷 입고 초원을 달리는 게 콘셉트란다. 하······. 너도 좀 그렇지? 배우가 이미지가 있지. 젖소 옷은 좀 그렇잖아?”
나는 최재환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그 젖소 옷 때문에 여태 고민했던 건가.’
하긴 당시 나는 이시현의 이미지를 싸구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될 놈이고, 이미지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에 젖소 옷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거리 하나 없는 판에 자존심이 중요한가.
젖소면 어떻고, 코끼리면 또 어떻단 말인가.
“···형.”
“응?”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그를 향해 무릎을 살짝 숙였다. 그리고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힘껏 들어올렸다.
“야, 야, 뭐야?”
“하하하!”
나는 터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행동을 자제하고 싶었는데, 이런 좋은 매니저를 보니 즐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사람이 좀 하루아침에 달라지면 어때?
‘울다 웃는 것과 똑같지 뭐······.’
그것밖에 더 자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