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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우
‘나는··· 아무것도 몰랐었구나.’
회의실로 되돌아온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시현에게 못할 짓을 했던 것만 같아서, 녀석의 인생이 나 때문에 망가진 것만 같아서, 녀석의 마음을 몰라줬다는 사실, 그런 후회들로 머릿속이 날아가 버렸다.
“어이 박태식.”
“아, 예?”
넋 나간 얼굴을 들었더니 유 작가가 피식 웃는다.
“저거 틈만 나면 딴생각이네. 너 촬영장 가서도 그럴 거야?”
“아,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해.”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크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중견배우들이 깔깔 웃는다. 그들에게는 신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옛 생각도 떠올릴 만큼의 웃을 여유가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정 피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 작가는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심심풀이였나.’
유 작가의 관심이 신인 놀려먹기였나 싶은, 그런 생각을 잠시 떠올리면서 나는 화장실에서의 양아치 새끼를 돌아봤다. 녀석은 함께 온 제 매니저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만감이 교차해서 멍하니 있는 내 어깨에 익숙한 손길이 느껴진다.
“가자.”
최재환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회의실 입구를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졌다. 최재환이 뒤돌아봤다가 깜짝 놀란다.
“야, 너 왜 그래?”
“하······.”
“자식, 너 잘했어. 사내새끼가··· 울고 난리야.”
내 어깨를 두드리는 최재환. 나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명의 신인배우가 대본리딩이 끝나고 매니저와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다들 신기한 듯, 혹은 특이한 듯 쳐다보면서 우리를 스쳐가는 동안에도 나는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난날의 나에게 이시현이라는 배우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식······. 임마, 진짜 잘했다니까.”
최재환이 여유 있게 내 등을 토닥였다. 그러면서 나직이 속삭여 말했다.
“시현아. 우리 앞으로 열심히 하자. 이번 거 잘해서, 너 진짜 큰 배우··· 그 길로 들어서는 거야.”
“형······.”
“잘할 수 있지?”
“잘할게.”
“그래. 누가 뭐래도, 너는 내 배우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내 배우. 내 매니저.
“형, 나 진짜 열심히 할게.”
지금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시현을, 나 최재환과 함께 제대로 한번 키워보고 싶다. 그렇게 되면 녀석 운명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만들 좀 해라.”
퉁명한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나는 최재환에게서 떨어졌다.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최재환의 어깨가 흠뻑 젖어있다.
“진짜 울었네?”
오소리가 퉁퉁 부은 내 눈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그녀의 큰 눈이 깜빡인다.
“자식들이 여기서 울고 난리야? 쪽팔리게.”
오소리의 곁에서 그렇게 말한 이는···
‘뭐야 윤 부장이잖아? 언제 왔어?’
지에스엔터테인먼트 윤석규 부장이다. 아무래도 오소리 때문에 직접 온 모양이었다.
“제 말이 맞죠? 부장님, 이 자식 잘한다니까요.”
최재환이 내 등을 팡팡 치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래, 그 맛에 매니저 하는 거지.’
내 배우가 잘났을 때, 내 배우가 성장했을 때, 어깨 한번 으쓱 올릴 수 있는 그 맛.
“자식아, 이런 건 다하는 거야.”
윤 부장이 대충 대답하고 걸음을 휙 튼다. 그러자 최재환이 눈을 삐딱하게 뜨고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하여튼간, 좋은 말을 안 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던 오소리는 나를 한 번 더 눈에 담더니 이내 윤 부장을 따라갔다. 그러자 알싸한 화장품 향과 함께 그녀의 옅은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진작 그렇게 좀 하지.”
“예?”
내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는 이미 몇 걸음 앞서고 있었고, 정작 그 소리에 좋아 죽는 것은 최재환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이다.
“야, 오소리가 너 인정했나 보다.”
“인정은 무슨.”
그런데 괜스레 부끄러운 이 기분은 뭐지.
“야, 오소리가 너 이거 못하면 죽일라고 그랬단 말이야.”
하긴 그래서 당시 이시현이 대본리딩 현장을 깽판치고 떠난 뒤로는 한동안 오소리가 내 얼굴을 보지도 않았었다. 소문에는 그렇게도 나 최재환의 욕을 하고 다녔었다는 얘기가.
“가자.”
우리는 서둘러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
“하······.”
오소리가 한숨을 내쉰다. 그녀의 밴에 우리가 흔한 말로 꼽사리를 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시끄러.”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구형 소나타가 결국 퍼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도 차가 퍼졌었는데, 그때는 이시현이 깽판을 치고 떠난 덕에 차를 얻어 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나 홀로 버스를 타고 방송국을 떠났던 기억이 있다.
“야, 이시현이!”
“예.”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 부장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너 이번에 잘해 임마.”
“예.”
“재환이가 너 하나 어떻게 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냐?”
“부장님, 그런 얘기 뭐 하러 하세요?”
운전 중인 최재환이 눈을 찌푸리며 투덜거린다.
“임마, 연기자하고 매니저는 서로 비밀이 있으면 안 돼. 이 바닥은 남의 입으로 전해 듣는 순간 그게 헛소리라도 진짜가 되는 거야. 알아? 서로 알건 알아야지.”
“뭘 또 그렇게까지······.”
입술을 빼죽 내민 최재환의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면서 너무도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 역시도 힘주어 말했다.
“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재환이 형 부끄럽지 않게, 재환이 형 배우가 돼서 진짜 한번 제대로 해볼게요.”
“그래, 사내가 그래야지. 5년 죽 쒔으면, 5년 대박 터지는 거지. 그게 이 바닥이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몇 번 대답을 하고 나자 오소리가 투덜거렸다.
“그런 대화는 사내들끼리 사우나 가서 하시면 안 돼요?”
“허허!”
윤 부장이 오소리의 말을 웃어넘긴다. 나도 피식 웃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왠지 이시현이 됐다는 것만으로 그녀 앞에서 주눅이 들고 있었다.
“너희들 청담동에 내려주면 되지?”
“예.”
최재환이 대답했다.
“그럼 너희들 내려주고, 우리는 바이바이 관계자들 만나고······.”
윤 부장이 혼잣말을 속삭인다. 그런데 이때, 바이바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스쳤다.
나는 고장 난 기계처럼 딱딱 고개를 돌려 오소리를 바라봤다. 그녀가 대본을 살펴보다가 내 시선을 눈치 채고 고개를 힐끗 돌렸다.
“왜요?”
“아··· 아닙니다.”
“싱겁긴.”
다시 대본에 열중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 기억난다. 오소리가 왜 사라졌는지.’
나는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오소리를 봐왔기 때문에 오소리라는 존재는 내게 익숙했다. 그래서 그녀가 가진 아픔을 송두리째 잊고 있었는데··· 오소리는 대성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살아남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2010년 이후 그녀를 이 바닥에서 보지 못했다. 언젠가 그녀에 대한 짧은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중년의 사업가와 결혼을 했다는 것 같은데.
어찌됐든 그녀가 떠난 이유,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이유.
바로 이 바이바이 CF 때문이다.
‘100억 소녀 오소리. 바이바이 CF.’
당시 이 CF 건은 사실 나 최재환이 물어온 것이었다. 내가 우연히 바이바이 관계자를 알게 됐고, 기획안을 받아왔었다.
하지만 이시현은 회사와 계약이 만료 돼 CF 계약서를 들여다 볼 때가 아니었고, 그때 마침 윤 부장이 그 기획안을 보고 붙잡은 것이다.
제 딴에는 실적 때문에 그랬겠지만, 사실 큰돈도 되지 않는 계약이었다. 그런데 그 CF를 오소리가 찍었다.
‘그래서 이 인간이 오늘 오소리 대본리딩 현장에 따라왔구나.’
어떻게든 꿰어서 오소리를 엮으려고.
이 일은 회사에서 회의도 거치지 않은 일인 만큼, 그저 오소리가 하겠다면 할 수 있을 만큼의 그런 시답잖은 건수였다.
그리고 나는 윤 부장을 잘 알고 있다. 이 양반은 제 잇속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기회주의인데, 완전 쓰레기는 아니라서 더 짜증이 나는 타입이다.
바이바이 CF도 사실 별 생각 없이 한 것일 거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오소리는 결국 배우 생활을 접게 된다. 왜냐하면.
‘바이바이 CF가 젖소 옷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지.’
이는 농담이 아니다. 바이바이 CF 콘셉트가 젖소 옷을 입고 꼭지가 달린 우유병 모양의 음료수를 쥐고 초원을 달리는 것이다.
헌데 이 가벼운 콘셉트의 CF가 가진 문제는 바로 파격적인 멜로디를 가졌다는 건데, CF 속 흥겨운 멜로디가 붐을 일으켰다.
덕분에 오소리에게 바이바이 젖소라는 이미지가 달라붙는다. 이후 뭐만 하면 달라붙는 게 바이바이 젖소였다.
심지어는 젖소와의 합성 사진까지.
오소리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 반면, CF는 대박에 관련 제품은 폭발적 인기를 힘입어 분기 매출 100억 달성.
‘100억 소녀 오소리.’
그때 바이바이 젖소라는 별칭과 함께 그녀에게 붙은 또 다른 별칭이다.
‘허······.’
나는 다시금 오소리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또 나를 힐끗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
“왜 자꾸 봐요? 이상한 취미 있어요?”
그녀는 찌푸린 얼굴도 곱기만 했다. 하긴 이때는 젊고 어린 시절이니까. 그녀가 자신에게 쓰인 아역이라는 굴레를 벗고 현재를 즐겼다면 더 상큼해졌을 시간이건만.
“저기······. 그 바이바이 CF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윤 부장이 놀라서 뒤를 힐끗 본다. 운전 중이던 최재환 역시 눈이 뜨악해져서 룸미러로 나를 쳐다봤다.
“이 자식이 오냐오냐하니까, 어딜 감히··· 넘볼 것을 넘봐야지!”
윤 부장이 냉큼 외치는 그때였다.
“그래요 그냥, 나 솔직히 그거 하기 싫었는데.”
오소리가 대본을 접고 쿨하게 얘길 했다. 그러자 당황한 윤 부장이 서둘러 입술을 핥고 아예 허리를 틀어 뒤를 돌아봤다.
“야, 너 왜 그래? 이미 다 얘기 끝난 거잖아?”
“얘기가 끝나긴 뭘 끝나요? 오늘이 미팅인데··· 그래, 이쪽이 나가면 되겠네?”
눈을 동그랗게 뜬 오소리가 윤 부장에게 대들듯이 말하고 나를 가리켰다. 그녀의 행동에 윤 부장의 이마와 미간이 바로 찌푸려진다. 곧이어 나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이 달려들었다.
“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쪽에 이미 간다고 얘기했는데, 겨우 얘가 가서 뭘 하겠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무작정 크게 외쳤다. 이런다고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왠지 오기가 생겼다.
딱히 오소리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이미지를 벗을만한 연기력 한 방을 못 보여줬던 거니까, 그건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기도 했다.
단지 지금 나는 이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다. 재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고, 계산도 이어졌다.
남자 배우는 여자 배우와 달리 이미지에서 관대하며 그 회복 또한 빠르다. 사고를 쳐도 자숙 좀 하고 나오면 그만이다. 하물며 젖소 옷 좀 입고 뛰면 어떤가.
그리고 내가 이러는 이유는 또 있었다.
돈.
돈이 필요했다. 이시현이 술집을 나갈 수밖에 없던 이유가 돈이었다면, 그 돈을 채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돈이 될 게 없지 않은가.
“아, 미치겠네······.”
윤 부장이 뒷머리를 북북 긁으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최재환이 나섰다.
“저희가 할게요.”
“뭐? 넌 또 왜 그래?”
“원래 제가 가져온 거잖아요.”
“임마, 나한테 넘어온 지가 언젠데······.”
“에이, 아까는 시현이 보고 사내답게 하라면서요?”
“아, 미치겠네.”
“부장님, 그거 몇 푼 안 되는 거잖아요? 일단 시현이 가서 한번 미팅하고, 그때 안 되면 부장님이 다시하면 되죠.”
“자식들이 진짜··· 안 돼!”
윤 부장이 고개를 휘휘 젓는다. 그러자 이어진 오소리의 한마디.
“그럼 우리가 청담동에서 내리면 되겠네.”
“어휴.”
윤 부장이 이마를 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