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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우
“아, 죄송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날카롭게 달려들었다. 피디와 작가의 얼굴도 황당함 그 자체다.
나는 그 시선들로 인해 얼굴이 따가워 죽을 지경이었다. 물론 구석에 앉아 있는 최재환의 얼굴도 난감 그 자체. 그러니 지금은 큰 소리가 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때, 동네 건달 박태식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친다.”
다행히도 스태프가 바로 다시 지문을 읽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박태식이 돼야 한다.
“야! 너 누구야! 누군데 감히 이 마을 비너스한테 수작이야!”
인상을 쓰고, 어깨를 흔들면서.
“주환, 당황하고··· 지현, 박태식을 노려본다.”
“비너스는 개뿔! 너 저리 안 가?”
“야! 내가 왜 가?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가는 거여.”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고 바로 대사를 이어받았다. 사투리 대사까지 그럴싸하게 해냈다. 그런데 이때, 유 작가가 쿡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그 때문에 흐름이 끊겼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 감독도 쿡! 웃었다.
“후훗, 거기 누구세요?”
입 꼬리를 올린 유 작가가 나를 보며 묻는다. 긴 머리를 이마 위로 넘겨 포니테일 스타일로 질끈 묶은 그녀는 생체기 하나 없는 고운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그녀 나이 오십이 넘었을 때였는데, 지금의 그녀는 서른 중반의 젊음을 가지고 있다.
“그게 무슨 얘기신지······.”
배우의 꿈을 일찌감치 접은 나로서는 지금 상황을 바로 알 수가 없었다.
‘뭘 실 수 했나본데······.’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내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자 유 작가가 피식 웃으며 정 피디를 돌아봤다.
“정 감독님, 저 친구 말투가 재밌지 않아요?”
“그러네. 대사 한마디 치고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어.”
도무지 칭찬인지 농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이것이 칭찬이라면, 이런 자리에서 신인에게 이정도 멘트는 있기 힘든 일이다.
“이거 배우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어디 어시장에서 일하는 분을 데리고 왔어요?”
유 작가가 농담을 하자 몇몇 배우가 콧바람을 들썩인다. 좀 전에 내가 대사를 놓치는 바람에 긴장이 감돌았던 대기실이 이제야 조금 펴지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구나······.’
이제야 나는 정 피디와 유 작가가 웃은 이유를 알았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한번 쉬었다 간 것이다.
“계속해봐.”
대본리딩은 다시 이어졌다.
내가 맡은 박태식이라는 남자는 지고지순한 남자다.
하지만 여 주인공 지현은 그가 아닌 주환이라는 외부인을 사랑하게 된다.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이 결국에는 남여 주인공이 잘되고, 박태식이라는 배우는 여 주인공이 아닌 우체국 여직원하고 잘되는 그런 스토리였다.
다만 나는 이 드라마를 몇 번이나 보면서 이시현이라면 어떤 연기를 했을까를 떠올렸었다. 이시현이라면 어떤 감정으로 박태식을 표현 했을까.
아니, 박태식은 어떤 마음으로 지현을 좋아했고, 또한 그 마음을 뒤로하고 왜 그녀를 포기했으며, 그런 한편 자신을 좋아하는 우체국 여직원의 마음을 어떤 기분으로 받아들였을까를 떠올렸었다.
물론 당시 드라마를 볼 때는 그렇게까지 디테일한 감정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저 그런 감정이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흔일곱이라는 나이를 가지고 지금으로 돌아온 나는 그 감정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살며 겪은 숱한 경험이 내게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나는 빠르게 대본에 빠져들었고, 심지어 약속 장소에 주환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보라는 말을 지연에게 건넬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자! 잠깐 쉬고, 촬영에 관해서 할 얘기 있으니까, 10분 있다가 다시 모입시다.”
다행히 정 피디나 유 작가나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대본리딩이 끝이 났다.
내가 기억하는 유 작가는 대사 하나의 의미, 배우의 어조 하나에도 인상을 찌푸리는 작가였는데, 오늘은 후한 편이었다. 어쩌면 짧은 단막극이라는 여유가 있어서인지도 모르고.
‘하··· 지치네.’
다시금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며, 나는 박태식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감정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봐야지.’
생리현상은 아니었지만 이때쯤에 이시현이 화장실에 갔고, 이후 깽판을 치고 방송국을 떠났던 걸 기억한다. 그래서 그 행동을 답습해볼 생각이었다.
이유를 알고 싶으니까.
그날 그 녀석이 왜 그랬는지. 그 이유.
“시현아! 잘했어, 잘했어!”
최재환이 다가와 엄지를 추켜세웠다. 매우 흡족한 얼굴이다.
확실히 오늘 대본리딩은 과거 이시현이 했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녀석이 무난한 수준의 대본리딩을 했었다면, 지금 나는 혼신을 다해 감정을 쏟아 부었다.
물론 이런 걸 두고 업계에서는 초심자의 행운이라고도 한다. 나는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을 뿐이었다.
“형, 잠깐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어서 갔다 와.”
최재환은 많이 들뜬 얼굴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이시현에게 희망이 보이니 그런 모양이다.
‘그때 이시현은 화장실로 향했어.’
나는 복도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날, 그 화장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건 이장 아들 역의 배우인데?’
화장실에 들어가 내부를 살피니 단역배우 한명이 볼일을 보고 있었다. 혹시 화장실에 누가 더 있는지 살폈지만 달리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별 거 없는데······.’
나는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닦으면서도 계속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직까지는 별 일이 없다.
“야, 너 좀 하더라?”
소변을 보고 온 단역배우가 옆에서 나를 째려본다.
‘이 자식, 시현이가 아는 놈인가?’
왠지 이 녀석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머릿속에 뭔가가 그려지긴 하는데, 확실한 것은 없었다.
“나와 봐. 손 좀 닦게.”
“어.”
나는 한발 물러섰다. 휴지를 뽑아서 손의 물기를 닦는데 녀석이 계속해 말했다.
“야, 네 매니저가 정 감독한테 허리 숙였다며? 술도 사고, 장뇌삼도 선물했다던데?”
그랬었지. 이시현 꽂으려고.
‘벌써부터 소문이 다 났구나.’
하여간 이 바닥에 비밀은 없다.
“그게 다 매니저가 힘이 없으니까 그 지랄하는 거야. 회사에서 너를 딱 그 정도로 보니까, 너한테 그런 매니저나 붙여주는 거 아니겠어?”
“뭐?”
“워워, 이 새끼 또 지난번처럼 멱살 잡으려고 그러네.”
하지만 나는 행동 대신에 녀석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녀석이 휴지를 꺼내 손을 닦으면서도 계속해 투덜거린다.
“매니저 얘기만 하면 지랄이야. 내 말이 틀려? 네 매니저 짬밥이 5년이 넘었다는데 아직도 관리직함 하나 못 달고 로드매니저 뛰는 거 보면 딱 그 밥 아니야? 나라면 쪽팔려서 때려치웠지.”
정신을 차린 나는 서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녀석이 나를 욕해서가 아니었다. 이제야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현이 자식······. 나 때문이었구나.’
이 건방진 자식이 나를 욕하니까. 그래서.
‘그래서 폭발한 거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그날 이시현이 방송국을 뛰쳐나간 직후 전화를 안 받기에 소리샘에 욕이란 욕은 진탕했었다. 너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너 그렇게 그냥 가면 쓰레기라고.
‘그랬었구나.’
이제야 그걸 알게 된 것이다. 그 날의 진실을.
“왜? 치게? 쳐라?”
녀석이 눈앞에서 깐죽거린다.
‘이 자식··· 내가 모르는 놈이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기획사 대표로 살아온 나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모르는 배우, 가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놈은 정말 모르겠다.
그 말인즉, 허접한 새끼라는 것이다. 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할 놈이다. 그냥 이 바닥에서 수박 겉핥기로 구르다가 사라질 놈.
“너, 나 아냐?”
나는 눈앞의 단역배우를 향해 물었다. 녀석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본다.
“이 자식, 너 왜 갑자기 순진한척이야? 그러면 롤리팝에서 일한 경력이 사라져?”
“뭐? 롤리팝?”
“허, 이 새끼 완전 시치미 뚝이네. 롤리팝, 호스트바 롤리팝!”
녀석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