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배우
방송국은 항상 많은 소녀 팬들이 운집해 있는 곳이다.
그녀들에게 있어 방송국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기다릴 수 있는 즐거운 놀이동산이며, 이런 자리에서 팬클럽끼리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가 찍은 사진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다가 연예인 차량이 오면 ‘꺄!’ 하고 몰려가 구경하는 것이 또 하나의 재미.
최재환이 앞서 걷고 내가 뒤를 따라가자 여자아이들이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들은 손에 쥔 디지털카메라로 우리를 찍기도 했다.
“저 사람 누구야?”
“잘생겼네.”
“키 크다?”
그녀들의 수다에 최재환이 만족스런 미소를 입에 걸치고 발을 뻗었다.
‘하긴, 이시현은 외모만으로는 탑배우 못지않았지.’
나는 그래서 이시현의 매니저라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녀석을 키울 수 있다고 자신했었고.
“저기, 저희 사인 좀 해주시면 안돼요?”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다가오자 최재환이 곤란한 얼굴로 막아섰다.
“미안한데, 지금 바빠서.”
“치이.”
여학생들은 입에 바람을 가득 넣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물러났다. 물론 곱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칫, 못생긴 매니저 같으니라고.”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얘기했지만 최재환은 흔한 일이라는 듯이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우리는 걸음을 좀 더 서둘러 대본리딩이 있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방송국 복도를 지나 회의실에 가까워 가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최재환이 내 허리를 툭 두드렸다.
‘아.’
허리를 숙이라는 얘기였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곧바로 인사를 했다.
이 바닥은 상대가 누군지를 몰라도 일단은 인사가 먼저다.
“안녕하십니까, 이시현 매니저 최재환입니다.”
최재환은 나보다 한술 더 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둘은 마치 허리가 나간 것처럼 인사를 했다. 그 와중에도 최재환은 힐끗힐끗 나를 보며 ‘이 자식이 진짜 먼일이 있나?’ 하는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런 것이 이시현이란 놈은 회사의 선배 배우에게 하는 인사마저도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하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시현이 무조건 잘못했다고는 볼 수 없다.
사람이라는 게 성격이 있는 것이고, 이시현은 극도로 내성적인 친구였다. 모델 시절에도 연습만 주구장창 하다가 카메라 울렁증 때문에 런웨이 한번 못 올랐던 놈이었으니까.
‘그런 놈을 키우겠다고 데려온 내가 잘못이었지.’
다시 그때가 떠올라서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아마 당시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5년을 해도 안됐으면 정말 안 되는 거다.
더 이상 이 녀석 붙들고 있으면 그것 역시도 한 사람 인생 망치는 길이다. 그러니 이번만 해보고 안 되면 보내주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그때의 생각으로 울적해진 마음을 큰 목소리의 인사로 잠시 지우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러자 긴 타원형의 회의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는 여러 배우들을 볼 수 있었다.
‘아, 오소리다.’
스무살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보인다. 또렷한 마스크는 아니지만, 일단 연기력이 받쳐주니 롱런할 수 있는 타입이다. 다만 그녀는 생각보다는 롱런하지 못했다.
“어, 이시현 씨 왔어?”
누군가 내게 알은 척을 해왔다.
‘아, KIS 방송국의 정 피디?’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2년 전쯤 KIS 방송국을 떠난 피디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4년 후인 2014년에 중국으로 떠났다.
또한 그 곁에 앉아 있는 작가 역시도 누군지 잘 알고 있다. 방송국 스태프들과 작가는 웬만해서는 길게 가는 인생들이니만큼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유가희 작가.’
자기 사람을 쓰는 걸로 유명한 작가.
그래서 배우 중에는 유가희 작가 배우라는 말들이 있기도 했다.
거기다 해가 갈수록 깐깐해져서 나중에는 대본리딩 현장에서 대 배우라 칭하는 경력을 가진 원로배우에게도 연기 지시를 할 만큼 무서운 게 없는 여자다.
물론, 그만큼 재밌는 작품을 쓰는 만큼 실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시현 매니저 최재환입니다.”
“알아알아. 몇 번을 얘기해? 하하.”
정 피디가 털털하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최재환은 내 어깨를 툭 한번 두드리고는 회의실 구석에 둘러 앉아 있는 매니저들과 방송 관계자들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회의테이블에 놓인 이름표를 보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감독과 작가의 바로 옆에 앉은, 오소리를 비롯한 남여 주연배우들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단역들의 라인인 듯한데.
‘뭐야··· 그럼 내가 결국 대본리딩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난감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여전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인데, 괜스레 손에 땀이 쥐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다. 이 바닥 생활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늘 전체의 흐름만 봤지 메인의 자리에 내가 직접 앉은 적은 없었다. 배우와 가수들의 주변만 맴돌았던 내가 지금은 진짜 배우가 되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참내, 그렇게 연습생들 구박했었는데. 잘 좀 하라고, 이거하나 못하냐고······. 그런데 이건 뭐.’
기가 막히면서도 지난날 나한테 눈물이 찔끔 날정도 혼이 났던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자, 서로들 가볍게 인사부터 나누죠.”
정 피디는 솔선수범하듯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괜스레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졌는데, 외모만 보면 꼭 산적두목이다.
“KIS 단막극, 바닷사람들 이야기를 연출하게 된 정찬국 피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요란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배우들의 긴장을 풀려고 시작한 자기소개 시간인 만큼 어수선하고 떠들썩하게 이어졌다.
“박태식 역을 맡은 이시현입니다.”
나 역시 얼떨결에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행히도 대본에 ‘이시현-박태식’ 이라는 표시가 있었기에 내 역할이 뭔지를 캐치할 수 있었다. 안 그랬다면 끔찍하게 민망한 상황이 이어졌을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정 피디가 대본리딩의 시작을 알렸다. 대본이 들썩이는 소리가 들리고, 배우들의 손가락과 종이장이 부딪치는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대본이라······. 오랜만이네.’
표지를 넘기면서, 내 입에서는 고요하지만 큰 심호흡이 흘러나왔다. 비록 매니저로서 살아왔고 이 바닥에서 성공을 했지만, 사실 내 청춘이 바라보던 미래는 배우라는 꿈이었다.
단지 최재환이라는 청년이 그런 재목이 될 수가 없었을 뿐이다. 흔한 말로 소프트웨어는 있는데, 하드웨어가 되질 않았다.
‘뭐, 사실 소프트웨어도 내세울 건 없었지.’
아무튼 나는 배우를 포기했고, 지금 그때를 돌아봐도 후회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빠른 선택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다.
‘그래도··· 이제와 연기라니.’
못 이룬 꿈은 시간이 흘러 대리만족이라는 형태로 바뀌었다. 미련을 놓지 못해 매니저가 됐고, 종국에는 정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로서 수많은 배우를 키워냈다.
‘잘 할 수 있을까.’
잡생각이 많아졌지만 자신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평소 나는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한 배움의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수없이 많은 연기선생님들을 지켜본 결과 저마다 기준과 가치관이 다르고, 배우들마다 방식과 자세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보자. 하면 되는 거야.’
드라마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일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게 드라마이고, 그런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보는 게 드라마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한, 주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한, 누구나 다 내면에 연기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드러낼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다행이라면 나는 주변 시선에 무덤덤해질 만큼의 인생을 살아왔다.
“씬 넘버 1, 주환이 마을 입구에 들어왔는데, 지현이 달려오다가 넘어진다. 그래서 주환이 그녀를 일으켜주는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남자 스태프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본이 펄럭이는 소리에 이어 지문 설명이 끝나자 남주인공 주환 역의 배우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요.”
오소리가 대사를 받았다. 그녀는 여주인공 이지현 역을 맡았다.
“근데, 누구세요?”
이지현이 낯선 남자의 정체를 묻자, 곧이어 스태프가 다음 행동 지문을 읽는다.
“주환, 어깨를 으쓱 거리며 주춤한다.”
이어서 주환 역의 남자 배우가 가벼운 행동과 함께 대사를 읊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을 보면서 조금씩 대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 드라마 많이 봤지.’
이시현이 대본리딩 현장을 망치고 시골로 내려가고 나서였을 것이다. 그때의 상실감으로 나는 이 드라마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궁금했다.
시현이가 만약 이 역을 끝까지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
그래서 이 단막극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봤다.
아쉬움과, 후회와,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이 들 때마다.
“이때, 동네 건달 박태식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친다.”
스태프가 지문을 읽은 뒤에 잠시 소리가 멎었다. 넋 놓고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박태식이 바로 이시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