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210화 (완결) (210/210)

210. 놀면 뭐 하니?

세계수 안에 있는 진의 방.

오랜만에 그곳이 북적거렸다.

‘다들 어때?’

진은 습관처럼 속으로 생각했는데, 이내 이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습관이 무섭네.”

진의 말에 로메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왜? 속으로 우리한테 말이라도 걸었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루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니. 근데 검성 넌 이름을 지으랬더니, ‘소드’가 뭐야?”

“멋진 이름이지. 내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멋지다고?”

진은 그렇게 말하며 로메른과 루나를 바라봤다.

왜 이걸 말리지 않았냐는 질책을 가득 담고서.

“말려 봤어. 근데 지가 하고 싶다는 데 어떻게 해?”

“맞아요. 새로운 인생인데, 원하는 걸로 하기로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파멸적인 센스였다.

“아무튼 만족한다는 거지?”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본인이 만족한다면야.”

진은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들 존재는 새겨진 거야?”

“어. 약간 부족하긴 한데, 나머지는 천천히 쌓아 가면 될 일이니까.”

“그래? 안 그래도 재밌는 이야기가 들어왔거든.”

“재밌는 이야기?”

비전을 본 건, 대륙에 사는 이들만이 아니었다.

대륙 외에 시청자들이 또 있었다.

“지옥에서 연락이 왔어.”

“지옥? 그쪽에서 왜?”

“우리들 소재로 책, 음악, 영화, 드라마…… 뭐가 이렇게 많아? 하여간 다양하게 제작하고 싶다던데?”

“오. 나쁘지 않은데?”

존재를 각인하는 측면에서 보면 나쁠 게 없었다.

거기다 이건 ‘돈’도 되고, ‘사념’도 되는 일이었다.

“그럼 추진한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검성이 입을 열었다.

“잠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어떤 거?”

“수익 분배는 어떻게 되지?”

“……어?”

“우린 더는 정령이 아니다. 생활에 골드가 필요하지.”

정령일땐 제일 맹했는데, 사람이 되니까 검성이 제일 똑똑했다.

물론. 진이 보기엔 한참 모자랐다.

“그건 나 혼자 있을 때 찾아왔어야지. 그래야 넉넉하게 주지.”

“……그렇군. 다들 못들은 걸로 해라.”

“못 듣긴 뭘 못 들어? 내놔. 어딜 혼자 처먹으려고!”

“그대는 마법 물품 만들면 될 텐데?”

“아니. 그거랑 내가 손해 보는 건 뭔 상관이야?”

그렇게 검성과 로메른이 투닥거리는 사이.

루나가 입을 열었다.

“전 보수를 다른 걸로 받고 싶어요.”

“다른 거?”

“진의 피가 필요해요.”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가져가. 골드도 좀 챙겨줄게.”

역시 성녀라 그런지 욕심이 없었…….

“아. 제 요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어?”

“흡혈귀와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알겠어. 뭐. 그 정도야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그리고…….”

“또 있어!?”

“마지막 부탁이에요.”

“……해 봐.”

“영지에 땅 좀 주세요.”

성녀라 욕심이 없어?!

어림도 없었다.

“……얼마나?”

“저작권에 대한 비율을 포기하는 대신, 좀 넉넉하게 주세요.”

정령으로 돌아간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냥 정령일 때가 더 좋았던 거 같기도 하고.”

“진. 속마음이 튀어나왔네요.”

“아니. 들으라고 한 말이야.”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데, 루나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한 켠에선 검성과 로메른이 아직도 투닥거리고 있었다.

‘이 진상들…….’

진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야! 속으로 욕했지!?”

로메른이 진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 아닌데?”

“했네. 했어!”

다툼의 불똥이 진에게 튀기 시작했다.

“야! 우리가 너 코 질질 흘리고 다닐 때 코 닦아 주면서 키웠는데!”

“야! 내가 언제 코를 흘렸어?! 애초에 그렇게 어릴 때 만나진 않았거든?”

그렇게 평화로운지 번잡한지 알 수 없는 하루가 저물어 갔다.

* * *

다음 날.

손님들이 진의 방으로 계속해서 찾아왔다.

“주인님.”

노바와 아이들이 첫 손님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주인님을 지킬 겁니다.”

“세상의 위험도 사라졌고, 날 지킬 일도 없을 텐데? 나 지킨다고 시간 낭비하게?”

“주인님을 지키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끝났으니까. 이제 유유자적 쉴 거야. 날 지킨다고 내 곁에 있지 말고 너희도 하고 싶은 걸 해.”

“……우린 주인님을 지키고 싶습니다.”

답답하지만, 이런 아이들의 태도가 싫진 않았다.

“좋아. 그럼, 이거 받아.”

진은 반지 4개를 꺼내 노바에게 건넸다.

“언제든 내 곁으로 공간이동할 수 있는 반지야. 내 몸에 걸린 방어 마법이 발동하면 신호도 가.”

“……주인님.”

“주인은 무슨. 너희는 이제 노예가 아니야.”

“주인님.”

덩치는 산 만한 녀석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에이. 됐어. 그러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 수련을 해도 좋고, 사막을 누벼도 좋고. 마음껏 너희들의 인생을 살아.”

진은 그렇게 말한 뒤.

“대신, 반지에 신호가 가면 지켜주러 오고.”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다고 바로 떠나진 말고, 쉬다가 지겨워지면 떠나도 돼.”

“예!”

노바와 아이들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말릭과 혜진이 들어왔다.

“그땐 아까웠습니다.”

“맞아. 벨 수 있었어.”

그때가 언제인지는 진도 잘 알고 있었다. 열매를 베어 낼 때를 말하는 게 확실했다.

“됐어. 헛소리는 그만하고. 앞으로 어쩔래?”

“제 목적은 예전과 같습니다. 세인트 대공님이 만들어 준 놀이공원에서 재밌게 놀고,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평생 가도 못 이긴다니까?”

정령들이 사라졌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들은 인간이 되어, 천국에 등록될 테니까.

검성의 기술 또한 자연스럽게 흡수될 것이다.

그러니, 이젠 걱정 없었다.

“그러니 재밌는 거지요. 거기다 이젠 우리 혜진이도 있으니 해볼 만합니다.”

“다음엔 우리가 이겨.”

뭐가 우리 혜진이야.

열받네, 진짜.

진은 한숨을 쉬곤 예의 반지를 건네주었다. 말릭과 혜진은 간단히 고개를 숙인 뒤 걸어 나갔다.

그런 녀석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니들 결혼할 거냐?”

“그런 사회 관습에 얽매이고 싶지…….”

결혼할 거냐니까 뭔 말이 이렇게 길어.

“나중에 주례는 내가 봐줄게. 필요하면 이야기해.”

“……하지 않을 거지만, 그 약속을 받아 두겠습니다.”

말릭은 혜진의 손을 꼭 붙잡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냉막한 표정의 혜진이 말릭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갈 때까지 눈꼴이 시리네, 진짜.’

진은…….

‘좀 부러운 거 같기도 하고.’

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도 손님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허허. 이 늙은이가 성자님과 긴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진을 끝까지 서포트해 준 추기경.

“앞으론 이 녀석을 가르쳐 볼 생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성자님.”

처음 진에게 축복을 해 줬던 교구장.

“이번에 저희 영지에서 개발한 새로운 영약이에요. 혹시 모르니까 꼭 챙겨드세요.”

달란 백작가의 소나 달란.

“보고드리겠습니다.”

“마리아. 오랜만이네?”

“예. 도련님. 뒷일을 처리하느라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마그마는?”

“제가 온다고 쉬게 했습니다.”

시녀에서 어느덧 영주 대리가 된 마리아.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머니?”

엘프들의 지도자 플로나.

“아들!”

“진!”

아버지와 형들.

손님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여태껏 해 왔던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게으르게 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던 나날들.

‘생각해 보니까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인 거 같은데?’

물론 대부분은 짬을 때렸고, 남이 대신 일해 줬지만.

뭐. 어쨌든 바쁘게 살긴 살았던 거니까.

세상은 평화로워졌고, 모든 문제는 해결됐다.

진이 쌓아 왔던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문제는 게으른 생활이 하루하루 이어질수록…….

‘아, 근데 묘하게 지겹네.’

놀면 뭐 하니? 란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놀아도 재밌게 놀아야지.’

그중에서 제일 재밌는 건 남이 일하는 걸 구경하는 일이다.

이제 막 하나하나 쌓아 가는 현자, 검성, 로메른, 성녀.

‘그래, 놀면 뭐 하냐. 가서 훈수나 두는 거지.’

진이 재미나게 즐길 거리는 아직도 많고 많았다.

‘다들 뭐 하나?’

진은 손에 끼워진 반지 하나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진의 신형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 * *

사람마다 살아가는 스타일이 확실히 다르다.

무엇을 하고 살지.

어떻게 살아갈지.

특히 이 넷의 행보는 기가 막힐 정도로 달랐다.

“우린 변해야 합니다. 흡혈귀는 불길한 존재로 사람들에게 인식돼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피를 먹는 이상 우리의 불길함은 지울 수 없습니다.”

“피의 결핍은 채울 수 있어요. 여러분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갈 열쇠. ‘피의 정령’들입니다.”

성녀는 흡혈귀들의 세력을 규합하고, 이미지를 바꿔 나갔다.

악마들과도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세상에 흡혈귀들과 관련된 영화와 소설이 쏟아졌다.

미남 흡혈귀와 인간 여성의 사랑.

아름다운 흡혈귀와 모든 걸 잃은 소년의 사랑.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미지 개혁을 하는 한편, 피의 정령을 이용해 인간들의 피가 아닌 ‘식량 자체 생산’ 계획을 발동시켰다.

“흡혈귀는 그저 종족일 뿐입니다. 우리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흡혈귀는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하고, 변해 갔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혈성법은 교단의 성법의 한 축이 될 것입니다!”

교단에 새로운 성법이 생기고, 흡혈귀 출신 ‘사제’가 생긴 것이었다.

물론. 성녀가 뛰어나서 이렇게 된 건 아니었다.

“어때? 효과 있지?”

“……사랑 이야기는 좀 경박하긴 했지만, 좋았어요.”

“경박하기는…… 너 초판 받아 갔다며.”

“아, 아니거든요!”

진의 훈수가 빛을 발휘했다.

검성은 성녀와 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검사들이여! 검문(劍門)으로 오라! 우리 문파는 검의 새로운 길을 알려 줄 것이다!”

검문이라는 문파를 창설했다.

그것도 대륙의 것과는 전혀 다른…….

“이거 무협지의 문파 아니야?”

“흠흠. 조금 참고한 걸세. 문파라는 제도가 꽤 느낌 있더군.”

“좋아. 문파 제도라…… 도와줄게.”

비전을 통해 문파에 관해 방송이 되고, 검산에서 비전을 얻었던 여러 검사들이 새로운 문파를 창설했다.

그중에 진이 지분을 투자한 곳도 있었다.

<천마문>

1대 천마는 말릭이었다.

이런 성녀와 검성과는 달리, 로메른과 현자는 던전에 처박혀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는 일이 성녀와 검성에 비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뭘 한다고?”

“인공 용사 프로젝트. 세상에 위기가 왔을 때 왜 용사를 기다려야 돼? 아예 용사를 만들어 둘 생각이야.”

로메른은 메드 사이언티스트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복제 인간?”

“그런 저급한 게 아니야. 일단, 지금은 초안을 만들고 있어. 이들은 언데드이면서 생명일 거고, 동시에 인공 생명체일 거야.”

“……이거 영화에서 본 거 같은데? 이 인공 용사가 미쳐서 제2의 위기가 오는 거 아니야?”

“그건 영화 속 녀석들의 재능이 부족한 거고.”

클리셰대로면 문제가 무조건 생겨야 하는데, 로메른이라면 좀 다를 거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이거 좀 재밌겠는데?”

“그지? 현자 놈의 계획보다 이게 훨씬 좋다고.”

로메른이 경계하는 현자는 조금 다른 발상을 했다.

“이건 또 뭔데?”

“용사 육성 프로젝트.”

“육성 프로젝트?”

“어. 퀘스트로 최적의 지표를 잡아 주고, 성장시키는 거야. 스킬 구현이 좀 어렵긴 했는데…… 꿈속 데이터를 넘겨줘서 스킬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오. 그럼 상태창도 있는 거야?”

“당연하지. 육체도 강제 성장 시킬 수 있으니까. 스텟 올리는 것도 가능하지.”

“……이거 밸런스 붕괴 아니야? 계획대로면 괴물이 되겠는데?”

“그러니까 적절히 조절해야지. 일단은 계획만 잡아 두고 있어.”

“이것도 재밌겠는데?”

“그치? 결국 세상을 구하는 건 인간이야. 절대로 인공 용사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오. 로메른이랑 경쟁?”

“당연하지. 어딜 인간이 드래곤을 이기려고…….”

뭐. 이런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진조차 감당되지 않을 기기묘묘한 계획이 이뤄지는 대륙.

그것을 훈수 두는 재미난 하루가.

‘이야. 여기는 침공하는 놈이 반칙이라고 소리 지르겠네.’

어디 또 쳐들어올 테면 쳐들어와 보라고.

이곳은 이제 진짜 안전하니까.

‘잠깐만…… 그럼 나도 하나 만들어 봐?’

이쪽 대륙이 아닌 지구 쪽에는 영웅 하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꿈속에서 마음껏 던전을 만들 힘을 주고…… 부산물도 가지고 나갈 수 있게 하면?’

진은 슬그머니 영지로 돌아왔다.

즐겁게 지낼 거리를 찾았으니까.

‘근데…… 귀찮은데?’

뭐. 나중에 해도 될 일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간다.

평화롭고 재밌고 때때로 지루한 하루가. 그런 인생이 앞으로 쭉 이어질 것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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