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진실
세계수에서 뿌리가 튀어나오더니, 의자를 만들었다.
“앉으시죠.”
“여기서 이야기하자고?”
흰색 머리의 차가운 표정의 남자.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엔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고, 비전을 통해 전부 방송되고 있었으니까.
“예. 여기서 대화할 겁니다.”
“이건 공개적으로 할 이야기가 아니야.”
진은 고개를 저었다.
“대륙의 모두가 절 구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제 이야기라면 모두가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성자님이 우릴 이렇게나 생각해 주시다니.”
“역시 성자님이시라니까.”
이런 사람들의 반응과 달리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쯧.”
혀를 차며 현 상황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이런 분인 거 알고 있었잖아요. 그냥 이곳에서 해요.”
“그렇지. 형님은 그런 분이시니까.”
나머지 둘의 설득에 흰색 머리의 남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셋은 세계수 앞에 만들어진 의자에 앉았다.
“우선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 거기서부터 시작한다고?”
“예. 하나하나 처음부터 부탁드립니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할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입을 열었다.
“난 로메른. 형과 정반대의 존재.”
그 말과 함께, 그의 머리카락 색이 칠흑같이 물들었고 이내 그의 주위로 짙은 흑마력이 떠올랐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뭐. 그것도 옛말이지. 형이 빛을 버리고 가서…….”
곧이어 그의 머리카락 색 반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흑마력 옆에 신성력이 떠올랐다.
그 찬란한 신성력에 사제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걸 내가 수습했어. 덕분에 난 빛과 어둠을 모두 다뤄.”
마법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흑마력과 최악의 상성을 이루는 신성력.
두 가지 힘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고 있었다. 이건 현재의 마법 체계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이 주목한 건 그런 겉모습이 아니었다.
“그럼…… 로메른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어. 그렇게 부르면 돼. 형.”
그렇게 로메른의 소개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전 루나. 생명의 힘을 다뤄요.”
그 말과 함께 신성한 붉은빛이 떠올랐다.
일반적인 이들은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마법사들은 아니었다.
“피와 관련된 능력인가?”
“피를 생명이라 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닐 터이니…….”
“그럼, 흡혈귀 계열이란 뜻인가?”
“저 신성함을 보면 그건 아닐 걸세. 허어. 조금 전 흑마력과 신성력의 조화도 놀라웠지만, 이것도 놀랍군.”
대륙에서 사용하는 힘과는 궤를 달리하는 특별함.
마법사들은 정확히 무슨 힘인진 깨닫지 못했지만, 저게 얼마나 특별한진 알아봤다.
그렇게 마법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음 사람이 입을 열었다.
“소드. 검을 다룹니다.”
그나마 이쪽이 평범한 편이었지만, 무의 길을 걷는 이들에겐 아니었다.
“…….”
모두가 존경과 경의를 담아 그를 바라봤다.
“이름이 소드이신 건가요?”
“예. 맞습니다.”
검성은 예전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간단했다.
저쪽 가문엔 이름을 짓는 규칙이 있어서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소드’란 새로운 이름이 생긴 것이었다.
“좋아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른, 루나, 소드. 세 사람은 왜 절 형님이나,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거죠?”
진의 질문에 대답한 건, 로메른이었다.
“우리는 형제니까.”
심플하디 심플한 대답.
“어. 전 인간인데요?”
“인간이 되기 전 이야기를 하는 거야.”
로메른은 하늘을 가리켰다.
“저 위에 있을 때. 우리는 형제였어.”
“위요?”
“어딘지 알고 있잖아. 형이 받은 ‘천국’의 밖. 그곳에서 우린 함께 지냈어.”
진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아무리 성자라고 해도 천국의 영역을 받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자연스럽게 건물을 만들 수 있었지?”
“그렇습니다.”
“원래 그곳의 주인은 형이었어. 그러니 그건 게 가능한 거야. 형이 인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로메른을 바라봤다.
“뭐. 믿기 힘들겠지. 그럼, 이건 어때? 형은 어렸을 때 많이 아팠지? 인간의 육체가 형의 영혼을 이기지 못한 거야.”
“그건 선천적인 병일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못 고치는 선천적인 병? 그런 게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있다.
진의 육체가 그 증거니까.
하지만, 로메른의 저 말을 의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끔찍한 병따윈 없다고 믿고 싶어 하니까.
“그럼, 사제들이 형을 알아본 거는? 몇몇 신실한 이들은 형을 알아봤어. 축복을 내리고, 성자로 추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날조다.
100퍼센트 구라다.
하지만, 지금껏 진이 걸어온 길은 로메른의 저 말을 증명했다.
게다가…….
“맞습니다. 성자님은 다르셨습니다!”
사제들은 이미 로메른의 편이었다.
성자는 신의 자식이란 사실을 사제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들에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성자는 인간이 벌이기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숱하게 벌였으니까.
“눈이 좋은 사제가 있었네. 이래도 못 믿겠어?”
“잘 모르겠습니다. 전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원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누군가의 설계였다니…….”
진의 말에 로메른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가 이곳에 있는 건, 모두 신의 뜻이란 말씀 아니십니까? 제 의지가 아닌, 그분의 설계요.”
“아. 그걸 오해하고 있었어? 그건 아니야.”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애초에 그분께선 형이 대륙에 내려오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 모든 걸 포기하고 영락하는 길이니까.”
“예?”
“형은 형이 원해서 내려온 거야. 솔직히 말할게. 우린 형이 미쳤다고 생각했어.”
“……예?”
진이 떨떠름하게 되묻자, 옆에 있던 루나가 끼어들었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전부 로메른 생각이에요.”
“그렇습니다. 형님. 저희는 형님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또 나만 나쁜 놈이지.”
로메른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형은 스스로 원해서 대륙에 내려왔어. 누군가의 설계가 아니야. 그건 형의 의지였어.”
진은 혼란스러움을 애써 삼키며, 로메른에게 물었다.
“전 왜 내려온 겁니까?”
“왜겠어. 대륙의 모두를 구하러 내려온 거야.”
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사람들 틈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역시 성자님…….”
로메른은 짜증 난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형은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했어.”
“로메른. 그만해요.”
“됐어. 저 자들은 알아야 돼. 형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고 이곳에 내려왔는지.”
살짝 흥분한 것 같은 로메른.
진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로메른.”
“형. 형이 몰라서 그래.”
“아니요. 알아도 달라질 건 없어요. 전 괜찮아요.”
“……형.”
“섣부른 예상일지 모르지만, 전 그 무엇 하나 아까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맞아.”
로메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아쉬워했을 거 같아요. 여러분을 잊는 거.”
진의 말에 로메른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이들도 제각각 반응을 보였다.
소드는 자랑스럽다는 듯 진을 바라봤고, 루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 지은 채 진을 바라봤다.
“그것도 이젠 괜찮아요. 여러분이 이곳에 내려와 절 도와줬으니까요. 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반갑고 그리운 느낌이에요.”
로메른의 어깨가 떨렸다.
물론. 진짜 울고 있는 건 아니었다.
녀석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 상황을 고개를 숙인 채 애써 참고 있을 뿐이었다.
루나는 로메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감사해요.”
사람들은 감동에 가득 찬 얼굴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쉽네요.”
“예?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이제 돌아가시는 거 아닌가요?”
“아. 그걸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저희도 오라버니와 비슷한 선택을 했어요.”
“예!? 저와 비슷한 선택이라면…….”
“저희도 인간이 됐어요.”
“대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신겁니까.”
아까 괜찮다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이 인간이 됐다고 말하니 진은 다급하게 되물었다.
여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메른이 끼어들었다.
“왜? 형이 괜찮듯 우리도 괜찮아.”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습니까. 모든 걸 버리고 내려온 것일 텐데!”
“진짜 형답다, 형다워.”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 세상의 위협에 관해 형은 어디까지 알고 있어?”
“지식의 해방이란 조직이 누군가의 계략인 것만 알고 있습니다.”
진의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누군가의 계략?”
“지식의 해방이?”
“그럼, 배후가 아직 남아 있다는 소리야?”
“조용해 봐 이 사람아. 성자님이 말씀해 주시겠지.”
로메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예 모르는 건 아니네.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사람이었다면 형이 못 찾았을 리 없잖아.”
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위쪽의 전쟁이 대륙에도 영향을 미친 거야. 애초에 형이 대륙에 내려온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고.”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여기서 이야기해?”
“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제 전우입니다. 함께 싸우고 이 위험을 이겨 냈습니다.”
“알겠어. 그냥 말할게. 다른 세계의 신이 침략했어.”
“……예?”
“대륙의 위험을 만든 건 신이야. 형. 그것도 다른 세계의 신. 덕분에, 위쪽에선 신들의 전쟁이 벌어진 거야.”
“…….”
엄청난 스케일에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건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침략한 신은 강했어. 그분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싸워도 이길지 장담을 할 수 없는 적.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가 수비 쪽이라 나름대로 힘의 균형을 이루며 막을 순 있었어. 여기까지만 들으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른 문제가 있던 겁니까?”
“맞아. 녀석들이 대륙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그게 지식의 해방이군요.”
로메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식의 해방의 목적은 혼란을 유도해 천국의 힘을 약하게 하는 거였어. 실제로 꽤 성공했고.”
“……잠깐만요. 지식의 해방의 첫 활동이 적어도 백 년 전일 텐데.”
“맞아. 위쪽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전쟁이 이어졌어.”
“…….”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로메른을 바라봤다.
“걱정 마. 괜찮아. 형이 있어서 그리 힘들지 않았어.”
“다행이네요.”
로메른은 씩 웃으며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되고 형이 내려간다고 결정을 내렸어. 슬픈 일이었지만, 형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맞아요. 오라버니가 남기고 간 힘과 대륙에서의 활동으로 힘의 균형이 점점 우리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어요.”
“잘됐네요. 아니. 잠깐만요. 모든 문제가 해결됐는데, 여러분은 왜 내려오신 거예요?”
“아. 그게…….”
로메른이 망설이자 여태 조용하던 소드가 입을 열었다.
“단순히 막아 내는 것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때 오라버니가 한 일이 떠올랐어요. 모든 걸 버려, 그 힘을 넘겨준 일이요.”
“우린 모든 힘을 버리고, 한 자루의 창을 만들었어. 그리고 그 창을 그분께 넘기고 왔어.”
“아…….”
루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로메른의 의견이었어요. 그 오라버니에 그 동생이라니까요.”
“아, 아니야! 화나서 그런 거지!”
“난 로메른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적에게 한 방 먹일 수도 있고, 형님까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었지.”
“그건 맞아요.”
그런 장난기 가득한 녀석들을 진은 말없이 다가가 안아 주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구한 이들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