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성자님을 구해 줘!
“긴급 특별 방송, 성자님을 구해 줘!”
이제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MC 마그마.
마그마가 방송의 시작을 알렸다.
곧이어 화면이 전환됐다.
세계수 주위에 모인 수많은 이들을 하늘에서 찍은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말 많은 영웅 분들이 성자님을 구하기 위해 모여 주셨습니다.”
전부 스쳐 지나가진 않았다. 때때로 화면이 잠시 멈춰 사람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얼굴만 봐도 아실 만한 유명한 분들이시죠?”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공작.
기사 왕국의 최고의 기사.
용병왕이라 불리는 제1의 용병.
금급 부제 자격을 지닌 최강의 부제.
…….
그들의 얼굴이 비칠 때마다 주위에선 환호성이 쏟아졌다.
곧이어, 낯선 얼굴들이 비전에 떠올랐다.
“이쪽은 얼굴을 전혀 모르시겠지만, 굉장한 분들이십니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하나하나가 대단한 이들이었다.
“이미 은퇴하고 현역에서 물러나신 분들이 성자님을 위해 이곳을 찾아주셨습니다.”
지긋한 노인들은 ‘전대 고수’라고 부를 만한 이들이었다.
나이를 먹고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단기 결전이라면 현역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다음은 누더기를 걸친 이들이었다.
“이쪽 분들은 평생을 수련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는 분들입니다.”
원래라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련하다 죽었을 은거기인들.
그들이 성자의 소식을 듣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성자님을 되살릴 열쇠가 되어 줄 겁니다.”
마그마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성자님을 구해 줘’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그 모습을 열매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코미디가 따로 없네.’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웃긴 일이다.
이 정도 강자들을 끌어모으려면 적어도 세계급의 위험이거나 제국의 황녀라도 납치돼야 가능한 일이다.
용이나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
그 때문에 벌어진 세계급 위험.
세계와 공주를 구해 내기 위해 모인 영웅들!
한데, 현 상황은 이런 동화 속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다.
‘공주도 아니고 시커먼 성자를 구하는 것도 문젠데…….’
마왕이나 세계의 위험도 아니었다. 그냥 열매에 갇혀서 나오지 못할 뿐이었다.
시커먼 사내놈이 열매에서 나오질 못해서 영웅들이 모인다니!?
‘이렇게 보니까 진짜 개판이네. 좀 성의 있게 시나리오를 뽑을걸 그랬나.’
한데, 이런 진의 생각과는 달리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이들은 없었다.
시커먼 사내놈이지만, 그게 세상을 구한 ‘성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렇게 진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슬슬 누가 먼저 열매를 공격할지 차례가 정해지고 있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집중해. 절대 쫄지 말고 담담하게 반응해.]
‘진짜 괜찮은 거지? 은거하고 있던 애들까지 왔다잖아.’
[걱정하지 마. 저쪽도 천국에 등록되면서 어떤 기술을 쓸지 이미 파악됐어. 이건 검성이 와도 못 뚫어.]
‘오. 그 정도야?’
로메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가 이 정도 준비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
[검성급 기사나 현자급 마법사가 와도 못 뚫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최대한 성자답게 하고 있어.]
로메른이 이렇게 구구절절 당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잔소리 그만하고 가. 괜찮으니까.’
[알겠어. 그럼, 이따 보자고.]
‘너네도 부끄럽다고 빼지 말고 최대한 적극적으로 팍팍! 알겠지?’
[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애써 볼게.]
‘그래. 그럼 각자 위치로 가자고.’
그렇게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됐다.
* * *
로메른에게 당당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첫 번째 도전자! 제국의 제일 검이라 불리는 제국 최강의 검사!”
중년인 하나가 열매 앞으로 다가왔다.
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도 진에게 예의를 표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마자 마그마가 곧장 입을 열었다.
“성자님께선 이미 보호 성법을 내부에서 사용 중이시니. 부담 없이 기술을 사용해 주시면 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허리춤에 매인 검의 손잡이를 잡고,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오. 이건 또 처음이네.’
그 자세를 보자마자 그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발도술.
검을 검집에서 꺼내며 엄청난 속도로 베어 내는 검술. 그 검술을 사용하려는 게 확실했다.
‘멋있긴 하네.’
그는 눈을 감고, 호흡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스-팟.
작은 소리와 함께.
철컥.
검을 다시 꽂는 소리가 들렸다.
‘……내 눈으로도 흐릿하게 보일 정도라니.’
진의 특별한 눈으로도 검의 궤적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빠르기.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 같아 보일지라도, 진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그의 검이 뽑히고, 열매를 베어 내는 것을.
“정—말! 대단합니다!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느린 화면을 준비했습니다!”
곧이어 비전을 통해 그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런 임팩트 있는 모습과는 달리 문제가 있긴 했다.
“한데, 열매는 전혀 끄덕도 없습니다!”
물론. 그의 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더 크게 무릎을 구부렸고, 호흡 또한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조용히 읊조렸다.
“백검.”
진은 검의 이름이 ‘백검’인 이유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을 뽑고 집어넣는 발도술.
그 발도술이 단 한 순간에 100번이나 반복됐으니까.
단 한 번의 발도술이며, 동시에 그건 100번의 칼질이었다.
‘응. 소용없어.’
하지만 열매는 끄떡도 없었다.
그는 분하단 얼굴로 물러섰고, 다른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이거…… 꿀잼이잖아!’
무서울 거라 생각했던 일은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특급 관람석에서 재미난 것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슷하거나 뻔한 상황의 반복은 아니었다.
“내가 이것은 꺼내지 않으려 했건만! 성자님! 보호 성법 최대로 사용하십쇼!”
용병왕이란 놈은 마나가 고절해서 용병왕이 아니었다.
그는 다양한 무기를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사용했는데, 그가 최후에 시도한 방법은 바로…….
콰아아앙-!
‘대포’였다.
“다소 과격한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손상도 없습니다! 과연 전쟁의 프로! 용병왕다운 기술입니다!”
물론. 당연히 실패했다.
대포로 뚫을 수 있었다면, 진작에 뚫렸을 테니까.
‘무난하네.’
이렇게 막다가 마지막에 주인공이 딱 등장하면 끝이었다.
모든 게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생각이었는데…….
‘이 주둥이가 문제네. 플래그 세운 거야?’
무난하단 생각을 하자마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열매 껍질에 피해를 입히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을 알린 건, 누더기로 간신히 중요 부위만 가린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이분들의 존재를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산의 신이자, 수련과 고행의 신을 모시는 사제분이십니다!”
평생을 수련하며 지낸 은거기인 쪽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의 공격법은 간단했다.
‘정권’.
그저 자세를 잡고 주먹을 한 번 뻗을 뿐이었다.
한데, 그 효과마저 간단하진 않았다.
“저, 저건은! 희망의 4기사님들의 성령과 비슷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가 정권을 준비하자,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주먹이 떠올랐다.
그는 조용히 주먹을 뻗었다.
-----!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주먹이 열매를 때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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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세상은 넓고 괴물들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존재가 남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절대 깨지지 않을 거라던 열매에 미세한 금이 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로메른은 방심하지 않는 성격이란 점이었다.
미세한 금은 순식간에 수복됐다.
“더 강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힘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전 이만 물러서겠습니다.”
그는 깨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깔끔하게 물러섰다.
그렇게 한 번 위기를 넘긴 진은.
핑---!
은퇴한 전대 고수의 레이피어에 뚫릴 뻔하기도 했고.
“열매 또한 광석! 드워프의 명예를 걸고 깨 버리겠습니다! 드릴 MK2 발진!”
마도와 공학의 결합.
특수 드릴 앞에 뚫릴 뻔하기도 했으며.
“6개의 마탑이 연합한 특수 마법이 발동됩니다!”
연합한 마탑의 마법 앞에 작살날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위험하기만 했을 뿐, 진짜로 부서지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버텼어!’
열매는 부서지지 않고, 고고한 자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다음에 등장한 것들이 문제였다.
“성자님을 당연히 제가 구해 내야지요.”
“나도 구할게.”
광(狂)커플.
빛의 커플이 아니다.
쌍으로 미친 커플.
말릭과 혜진이 등장했다.
설마 녀석들이 올 줄은 몰랐다.
‘오늘 자꾸 플래그를 세우네.’
이놈에 주둥이가 문제였다.
진은 안 보이게 표정을 찌푸린 채 말릭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자님을 반드시 구하겠습니다.”
“꼭 구할게요.”
말은 구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표정만 보면 열매를 넘어 진의 목까지 베어 낼 분위기였다.
그 모습에 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 아무리 용써 봐라. 이게 베어지나.’
한껏 녀석들을 도발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말릭 혜진 커플은 의욕에 불타올랐다.
“바로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둘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매로 다가오지 않고, 주위를 돌거나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얼핏 보면 이게 뭔 짓인가 싶지만, 진의 눈에는 그들이 이렇게 움직이는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미친 것들이…….’
죽음이 녀석들의 움직임에 요동치며,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죽음을 다루는 법을 완전히 깨우친 것만 같았다.
살해의 업을 지닌 말릭과 싸이코패스인 혜진.
설마, 이런 시너지를 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죽음이 열매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건,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
그저 서로의 움직임만 봐도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합격술이며, 서로의 힘을 증폭시키는 경이적인 호흡.
이내 녀석들의 검이 한 점을 동시에 찌른다.
‘하필 찔러도.’
진의 심장이 있는 쪽을 찔렀다.
물론. 그렇다고 열매를 꿰뚫고 들어오진 못했다.
하지만…….
“처, 처음입니다! 열매에 손상이 갔습니다!”
녀석들의 검은 열매에 상처를 냈다. 수복되는 속도보다 녀석들이 입힌 피해가 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 이건 무슨! 열매가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이내 빠르게 열매가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끌어온 압도적인 죽음이 열매의 거대한 마나 앞에 흩어진 것이다.
한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혜진이 열매 주위를 돌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죽음이 다시 증폭됐다.
말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섬전과도 같은 검이 열매를 때렸다.
카가가강-.
손상되고, 수복되길 여러 번.
말릭은 이 열매를 부술 수 없는 걸 인정하고 뒤로 물러섰다.
“아! 유일하게 열매에 손상을 입힌 두 분이 포기했습니다!”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괜찮았다.
진짜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도전자입니다. 희망의 4기사!”
노바와 아이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시나리오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