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정령들
교단만 움직인 게 아니었다.
대륙의 워프 게이트를 관리하고 있던, 마탑들과 국가들 또한 움직였다.
덕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 번 사용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드는 워프 게이트가 무제한으로 개방됐다.
그뿐인가.
영약을 제조하는 기술을 지닌 가문들과 연금술 길드는 서로 기술을 풀고, 집단 연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영약 개발만 이뤄진 건 아니었다.
이미 개발되거나 제조된 영약들은 워프 게이트를 통해 빠르게 엘프들의 영지로 유입됐다.
영약이라 함은 지고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누구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영약을 내놓았다.
그렇게 도착한 영약들은 전부 세계수에 투입되었다.
“그러니까…… 이걸 땅에 버린란 말씀이십니까?”
“땅에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께 드리는 것이지요.”
영약을 진에게 전해 주는 방법.
나무에 물을 주듯 땅에 부어야 했다.
다시 말하면, 지고의 보물을 땅바닥에 버리란 뜻이었다.
“어. 음. 그냥 곧장 열매에 바르는 것은…….”
“열매를 키우는 것 또한 어머니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큰 효과는 없을 겁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자를 위해 사용하는 건 아깝지 않으나, 이걸 땅에 버리라는 건 저항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불식을 종식시킨 건, 진에게 빚이 있는 가문이었다.
진과 인연이 있는 영약 제조 전문 가문인 달란 백작가. 그곳의 차기 가주라 불리는 소나가 먼저 나섰다.
“플로나 님. 제가 가장 먼저 해봐도 되겠습니까?”
“예. 상관없습니다.”
“성자님…… 부디 회복하시길.”
그녀는 과감하게 영약들을 땅에 뿌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모름지기 액체를 땅에 뿌리면 어느 정도 물기를 머금어야 하는데, 그 모든 수분이 일시에 사라졌다.
“엘프들은 달란 가문의 헌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아닙니다. 저 또한 성자님께 큰 빚이 잇습니다.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그녀를 기점으로 다른 가문들과 연금술 길드 또한 영약을 바닥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뿌린 영약들은 전부 세계수에 흡수되었다.
‘바즈라한테 빼돌리지 말라 그래.’
[당연하지. 잘 모아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당연히 그렇게 뿌린 영약들은 진의 주머니 속에 쏙쏙 들어왔다.
‘비전을 만들길 정말 잘했지 뭐야.’
비전이 없었다면 이렇게 전 대륙의 수많은 단체에서 영약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선 이들.
그들의 행적 하나하나가 대중에게 공개되고, 찬사가 쏟아지니 상황이 바뀐 것이었다.
나름의 기술을 지니긴 했지만, 유명하지 않았던 여러 귀족 가문들.
교단과 마탑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연금술 길드.
[나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지.]
이 상황이 나쁜 건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희생은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지만, 이건 서로가 윈-윈이었다.
‘영약도 모을 만큼 모았으니, 슬슬 준비해야지.’
[드디어!]
지식의 해방을 지구로 보내고, 대륙의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끝이 아니었다.
진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정령들의 문제 해결이었다.
‘슬슬 인간 돼야지. 다들 정령으로 살 건 아니지?’
[당연하지! 정령도 좋지만, 인간이 최고야!]
정령들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 이 녀석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다시 인간으로 되돌려 주어야 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원래의 ‘인생’을 되찾아 줄 순 없었다.
이미 이 세상은 이들이 없다는 가정하에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으니까.
그러니, 적어도 인간으로 되돌려 후회하지 않을 만한 인생을 만들어 줘야 했다.
[근데, 이거 쉽지 않겠는데? 단순히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 씌워 놓고 끝낼 생각은 아니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지.’
진은 담담이 대답하자, 로메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봤다.
[진짜 알고 있는 거야?]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가지고.
‘대충. 존재를 바치고 회귀해서 그냥 인간이 되는 건 어렵다고 했었잖아.’
[한참 부족한 설명이긴 한데, 그 정도만 알고 있어도 대충 맞아.]
‘그럼 육체 만들어서 쏙 들어간다고 끝이 아니겠네?’
[당연하지. 그렇게 쉬웠으면 진작에 했지.’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쉽게 말하면 이 세상 전체에 우리의 존재를 각인하면 돼.]
‘그게 가능한 거야?’
[가능은 하지. 네 영혼의 힘을 이용하면.]
그렇게 쉽게 됐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리도 없다.
‘내 힘으론 부족하다는 거네?’
[어.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사용하긴 해야 돼.]
‘다른 방법?’
[법칙을 무시하는 힘으로 강제로 박아 넣으려던 걸, 수동으로 하는 거야.]
‘수동으로?’
[어. 우리란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거지. 그 누구도 모르지 않게.]
‘흠. 방법은?’
[이쪽은 네 전공이잖아. 이건 네가 고민해봐.]
‘와. 제일 중요한 걸 짬 때린다고?’
[그럼, 육체 연성을 네가 할래?]
뭔 연성?
사람은 잘하는 걸 해야 하는 법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딱 내 적성에 맞는 일이야.’
귀신같은 태세 전환에 로메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각자 잘 하는 걸 하자고.]
그렇게 로메른과 진의 대화가 끝나갈 때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현자가 입을 열었다.
[근데, 꼭 인간이 돼야 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로메른은 물론이고, 대화를 지켜보던 검성과 성녀마저 멍하니 현자를 바라봤다.
[다들 인간이 되고 싶은 거야?]
인간이 되고 싶냐는 근본적인 의문.
인간으로 되돌려 인생을 살게 해 준다에 매몰되어 전혀 신경 쓰지 못한 질문이었다.
물론. 이런 진의 생각이 당연한 것이었다.
[넌 또 뭔 개소리야? 그럼, 정령으로 살게?]
[흐음. 나도 동의일세. 현자 그대의 의견은 언제나 존중하지만, 이건 좀 다른 이야길세.]
[맞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을 구한 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기 위해서 아니었어요? 같이 술도 마시고, 웃고 떠드는 그런 평화로운 일상이요.]
현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정령으로 있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기왕 새로 태어날 거면 꼭 인간이 될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해서. 무조건 인간일 필요 있어?]
‘틀린 말은 아닌데?’
생각해 보면 그랬다.
이들의 일상은 사라졌다. 원래의 인생을 사는 건 더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아예 다른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던진 말이라면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난 현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해. 새로운 인생인데, 좀 깊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근데, 넌 뭐가 되고 싶길래 이런 이야기 까지 한 거야?’
현자는 이미 되고 싶은 게 있는 거 같았다.
그러자, 진의 머릿속에 조용히 현자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내가 인간이 된다면, 네 인생을 부러워할 거 같아서.]
‘아.’
진은 나지막이 탄식을 터트렸다.
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원래 ‘현자’의 인생이다.
물론. 거래긴 했다.
세상을 구하는 대신 진이 이 육체를 사용하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그립지 않을 리 없었고, 이 인생이 부럽지 않을 리 없었다.
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미안.’
[뭐가 미안해. 그냥 그렇다는 거지.]
현자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적어도 걱정은 안 되니까.]
어쩐지 녀석의 표정은 속이 시원해 보였다.
[게다가, 내가 되고 싶은 건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기도 하고. 난 솔직히 이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 말에 로메른이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너 설마!?]
[후후. 로메른, 앞으론 나보다 뛰어나다고 절대 말 못할걸?]
[야, 이! 그건 반칙이지!]
대체 뭐가 되고 싶길래 로메른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 의문은 순식간에 해결됐다.
[난 이미 ‘존재’가 생겼어. 모든 용인족의 인정을 받았으니까.]
용인족의 인정을 받으며, 얻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너…… 드래곤이 되게!?’
[아니. 그 말은 조금 틀렸어. 난 이미 드래곤이야.]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녀석은 이미 드래곤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요람에 등록까지 했다. 이미 드래곤이며 요람의 주민이었다.
[아. 드래곤은 인정이지. 인간보단 드래곤이 낫지.]
‘그건 그렇지.’
[허허. 이런 욕심은 로메른이 부릴 거라 생각했는데, 현자 그대가 그럴 줄은 몰랐구먼. 나쁘단 이야기는 아닐세. 그저 놀랐을 뿐이니.]
[저도 드래곤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인간 외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임에도 정령들은 다들 납득했다.
게다가 현자의 이런 결정은 단순히 드래곤이 되고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진짜로 드래곤을 원하는 거지?]
[당연하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괜한 배려면 당장 때려치워.]
‘배려?’
[너한테 남은 힘이 얼마 없으니까. 한 명이 빠지면, 여유가 생기잖아.]
그 말을 들은 진이 깜짝 놀라 현자를 바라봤다.
‘너 제대로 이야기해.’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거면, 드래곤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현자가 드래곤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사실처럼 보였지만.
‘겸사겸사 힘도 아끼고?’
[뭐. 그런 거지. 그렇다고 오해하진마 . 진짜 드래곤이 되고 싶지 않았으면 나도 인간이 됐을 테니까.]
하여간, 회귀 때도 그러더니 쓸데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녀석이었다.
‘그럼, 드래곤으로 살아 보다가 정 별로면 말해. 인간으로 바꿔 줄 테니까.’
[오. 그런 방법도 있네. 알겠어.]
기왕 이렇게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른 정령들의 생각을 알아봐야 했다.
‘그럼, 현자처럼 인간 외에 다른 게 되고 싶은 사람 있어?’
[난 인간으로 갈래. 인간에 최적화된 최고의 육체를 찾아 놨는데, 무조건 인간이야.]
로메른은 이미 어떤 몸으로 할지 생각해 놓은 것 같았다.
[나도 로메른과 같은 생각일세. 내가 쌓은 무는 결국 인간의 몸을 바탕으로 하니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하다네.]
검성 또한 비슷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럼, 남은 한 사람은 들어 볼 것도 없었다.
‘성녀는 당연히 사람이지?’
신을 모시는 성녀.
그녀가 다른 신을 모시는 종족을 택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니요. 전 인간보다는 다른 게 되고 싶어요.]
한데, 그녀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튀어나왔다.
[이미 전 피와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렇다면 그냥 흡혈귀가 되고 싶어요.]
‘뭐? 흡혈귀? 어둠의 주민이 되겠다고?! 성녀가?!’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왕의 후보 자리야 버리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진이 그녀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한 생각이다.
[예. 어둠의 주민들의 힘을 성법과 결합해 새로운 사제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녀에겐 거대한 계획이 있었다.
어둠의 주민을 교단에 귀의시킨다는 거대한 계획.
‘……오히려 이게 성녀답다고 해야 하나.’
그녀 또한 세상의 진실을 알았는데도, 여전히 신앙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 근본은 사제예요. 그건 결코 변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 있는 진은 고개를 슬쩍 숙였다.
진짜 광기 앞에선 가짜 광기는 상대가 되지 않는 법이다.
‘좋아. 다들 움직이자고. 나도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알겠어!]
오랜만에 두뇌를 풀가동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