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의 정령 천재-198화 (198/210)

198. 쇼맨십

진은 지구에 있을 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저 악당 놈은 왜 줄줄이 설명하고 있지? 바로 죽이라고! 저 봐. 주인공 일어나네.

-아. 시나리오 수준. 작가들은 이따위로 쓰고 돈을 받아 처먹는다고? 공부 때려치우고 시나리오나 써?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악당이 줄줄이 설명해 줘야, 어떤 일인지 관객들이 알 수 있다.

애초에 악당이 주인공을 바로 죽이면 이야기가 굴러가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이 승리한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법이니까.

‘대단한 사람들이었어.’

시나리오도 아무나 쓰는 게 아니었다.

악마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엉성한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마들의 시나리오가 완벽한 건 아니었다.

지구인인 진이 보기에 투박하거나 구멍이 뚫린 부분이 많았다.

‘아무리 세상의 위협이라도……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

그러니, 더욱 몰입할 수 있는 것들을 넣어 줘야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게 바로 ‘참여형 콘텐츠’였다.

‘모두 힘을 보태 줘!’

자신의 손으로 대륙을 구한다.

사람들에게 사명감을 심어 줄 수 있었고, 이러한 사명감은 몰입감을 높여 준다.

이런 진의 예상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성자님! 이기세요!”

“제발! 성자님!”

“저희가 있습니다! 성자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열성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평민들만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시나리오를 의심하거나, 의문을 품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로메른은 이게 너무 과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하는데, 무슨 의문을 품어. 그것도 성자가 싸우는데. 이런 대규모 스케일로 사기를 치면, 대마법사도 속겠다.]

하지만 진은 단순히 사람들을 속이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다음이 더 중요했다.

‘지금 아니면 못해.’

[대체 뭔 짓을 하려고?]

‘간단해. 지도를 새로 그릴 거야.’

[지도를?]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국가와 수많은 이해관계를 무시할 유일한 기회.

<감히! 날 막아서다니!>

바알이 고함을 치며, 마기로 이뤄진 레이저를 발사했다.

쿠구구구궁.

레이저가 지나간 길 위에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압도적인 파괴력.

진을 감싼 ‘빛’조차 분해될 정도의 힘.

비전을 통해선 광선의 위협적인 모습만 보인다.

“다들 더 기도해! 성자님이 위험하시잖아!”

“성자님!”

“성자님 제발 승리를!”

하지만, 하늘 위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레이저가 지나간 곳에 거대한 ‘도로’가 생겼다.

모든 게 분해된 덕분에 땅을 다지기만 하면 될 정도로 깔끔한 도로.

물론. 문제가 있긴 했다.

그 땅 위엔 진한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이게 진짜 좋은 점이지.’

마기가 저 정도로 일렁이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다.

그럼, 누가 이용할 수 있을까?

‘교단 독점 도로가 생긴다 이거야.’

신성력을 사용하는 교단만 이 도로를 사용할 수 있다.

앞으로 이 도로를 이용하기 위해선 사제들의 도움이 필수였다.

이건 자연스럽게 교단의 지휘를 강화하게 된다.

그러니, 이 상황을 마음껏 이용해 줘야 했다.

“희망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 입 다물어라!>

바알이 명치를 때리자,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던 진이 저 멀리 날아간다.

압도적인 파워.

주먹질 한방에 제국에서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고.

<죽어라!>

쿠구구구궁.

다시 레이저가 발사된다.

그렇게 도로가 하나 더 뚫렸다.

‘이거지! 이거야!’

아니. 싸우다 그랬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거기다, 바알은 도로를 뚫는 데만 이용하지 않았다.

<이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기가 수십, 수백 개의 화살이 돼서 날아온다.

진은 그걸 피하자, 왕궁과 귀족의 저택들이 무너진다.

‘도저히 갱생이 안 되는 놈들을 한방에 치울 수 있다. 이거지.’

거대한 천사와 거대한 악마가 싸우는데,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테면, 대 괴수 대전이나 마찬가지인데 도시의 사람들이 멀쩡할 리 없다.

‘오히려, 사상자가 너무 적어서 놀랄걸.’

도시를 다 때려 부수는 거 같아 보이지만, 대륙의 암덩어리들만 골라서 제거하고 있었다.

‘이거 너무 재밌잖아!’

즐겁다.

세상도 구하고, 적도 제거하고, 도로를 뚫으면서 실익도 챙기고!

그야말로 완벽한 시나리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가, 바알과 진의 눈이 마주쳤다.

단순히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전부 느껴졌다.

‘하여간, 천생 배우야.’

묵직한 분위기에 무슨 마피아 보스 느낌이던 바알은 사실상 배우에 가까운 이였다.

뭐. 취미로 배우 활동한다는 느낌이긴 했지만.

‘쇼맨십 타임!’

진의 생각을 읽은 듯 바알은 자연스럽게 허점을 보였다.

“희망에 네 추악한 욕망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승리한다!”

진의 펀치가 바알의 몸에 적중하고, 이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다.

그리고, 지식의 해방 영역을 벗어났다. 교단 쪽 왕국 근처에 바알의 거체가 떨어졌다.

‘비전으로 보던 걸 두 눈으로 보게 해 줘야지.’

그게 쇼맨십인 법이다.

<크큭. 날 이쪽까지 날린 건 너의 실수다!>

바알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뿜어지고, 도시를 공격한다.

진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그 마기를 대신 맞는다.

“크윽!”

입가로 피가 흘러내리고, 진을 휘감은 빛이 속절없이 부서진다.

천사의 몸이 허물어지고, 희망은 마치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크하하하! 덧없는 희망이 부서지는구나!>

바알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아. 캐릭터 붕괴잖아!’

뭔가 캐릭터가 박살이 난 기분이었는데, 그건 진의 생각이 틀렸다.

“저 악마가!”

“이 비열한 놈!”

“우리를 인질로!”

저 비열한 모습은 바알의 캐릭터를 붕괴시켰지만, 더 악역에 가까워졌다.

‘……괜히 전 서열 1위가 아니네.’

자신의 캐릭터조차 붕괴시키는 과감함.

“성자님! 우리는 괜찮습니다!”

“대륙을 지켜 주세요!”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우리도 싸우겠습니다!”

“성자님!”

사람들의 기도가 더욱 강렬해진다.

부서져 내리던 희망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천사의 형상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 이게 무슨!>

“이게 네가 무시한 희망이다!”

진을 향해 수많은 빛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기도가 더욱 강해졌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너보다 나약하다. 하지만, 희망이 있기에 쓰러지지 않는다.”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소리나 다름없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우린 쓰러지지 않아!”

“우리의 희망이다!”

싸구려 클리셰가 먹히는 이유가 있었다.

“대륙은 결코 악마의 손에, 추악한 욕망에 쓰러지지 않는다!”

<감히! 버러지 같은 놈들이!>

“너의 적은 내가 아니다. 모든 대륙민들이 네 적이다!”

<그렇다면, 대륙 전체를 파괴해 버리겠다! 모든 걸 부숴 버리겠다!>

마왕의 거체가 하늘로 떠오르고, 녀석의 몸에 막대한 마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내 존재를 걸고 이 대륙을 지워버리겠다! 지옥에서 만나자! 버러지들아!>

누가 봐도 자폭 기술을 준비하는 모습.

사람들의 기도가 강해졌지만, 이걸 어떻게 막을지는 감도 잡을 수 없는 상황.

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난 대륙의 희망. 내가 죽더라도 널 막아 낼 것이다.”

진을 감싼 천사의 모습이 부서진다.

그리고, 이내 바알의 몸 전체를 감싼다.

<넌 막지 못할 것이다!>

“넌 나 외에 그 누구도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성자 노오오옴!>

그 말과 함께 마기가 증폭된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 눈물을 흘리고, 이내 혼절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나마 사람들은 약과였다.

사제들은 자신의 무력감을 실감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교황과 추기경들의 피.

사제들의 피.

그 모든 것들이 진에게 힘이 되었다.

빛 속에 붉은빛까지 함께 섞인다.

진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감사합니다.”

마치 이별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

그 모습에 사람들은 진에게 들릴 리도 없음에도 소리쳤다.

“안 됩니다! 성자님!”

“성자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당신이 빛입니다!”

“가지 마세요!”

“제가 죽겠습니다!”

진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여러분의 희망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사람들의 절규는 더욱 커졌다.

“잊지 마세요.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이 대륙은 여러분이라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작별 인사를 나눌 새도 없었다.

바알에 몸에 모인 마기가 폭발했다.

------------------!!!!!

귀를 먹게 하는 폭음.

마치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은 어둠.

한데, 그 어둠은 밖으로 조금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 모든 어둠을 성자가 막아 냈다.

비전은 성자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피를 흘리고, 온몸이 부서지는 성자의 모습을.

그의 얼굴엔 끝까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애로운 성자의 미소가…….

폭발이 끝난 뒤, 성자의 몸이 땅으로 천천히 떨어졌다.

성한 부분이 없는 고깃덩어리 같은 성자의 몸.

그 아래론 피가 가득했다.

그 모습에, 대륙이 울부짖었다.

성자의 몸 아래 가득한 피처럼, 대륙엔 눈물이 가득했다.

* * *

모두가 울고 있을 때.

움직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엘프’들.

모두가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직접 싸우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어머니, 저희가 가고 있습니다.”

엘프들에게 진은 세계수나 마찬가지였다.

진은 세계수의 화신이었으며, 살아있는 어머니였다.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진의 말이 있었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들의 마음을 막을 순 없었다.

“어머니시여! 조금만 더 빨리! 성자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덕분에 진이 땅으로 떨어졌을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엘프’들이었다.

엘프들이 도착한 다음에야,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도착했다.

“어머니께 접근하지 마라!”

서슬이 퍼런 엘프들의 말.

그들은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 하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도 굴하지 않았다.

“성, 성자님!”

“치료를!”

“비키세요! 성자님을 치료해야 합니다!”

“접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더는 어머니를 괴롭히지 마세요! 충분히 희생하셨습니다!”

“그, 그게 아닙니다! 그저 성자님을 치료하고 싶을 뿐입니다!”

엘프들과 사람들의 대치 상황.

그 상황을 중재한 것은 사제들이었다.

“저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성자님을 치료해야 합니다.”

“신성력으로 치료될 상처가 아니다. 어머니의 나무께서 직접 치료하실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사제들은 한걸음 물러섰다.

“세계수께서 성자님을 치료하신다고 합니다. 다들 물러서세요.”

“사, 사제님! 진짜 괜찮은 겁니까!?”

“예. 엘프들은 성자님을 위해 온 것입니다. 세계수님께서 움직이셨다면, 성자님의 상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저들을 방해해선 안 됩니다.”

“그, 그런!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겁니까!?”

사제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아니요. 성자님께선 우리가 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디, 성자님께서 회복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신을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 사제들이 무릎을 꿇었다.

“사, 사제님.”

그 순간.

콰드드드득--.

땅이 들썩이며, 뿌리가 튀어나왔다.

뿌리는 성자의 몸을 감싸고, 이내 땅 아래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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