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악마가 만든 ‘희망’
악마들이 제작한 시나리오가 빠르게 도착해, 이내 잔뜩 쌓이기 시작했다.
‘다들 악마라 그런가…….’
물론. 진은 전부 읽어 보지 않았다.
<세 줄 요약.>
맨 마지막에 세줄로 요약된 내용만 살펴볼 뿐이었다.
악마라 그런지 시나리오 대부분의 내용이 비슷했다.
[아니. 세 줄 요약으로 보면 시나리오의 재미를 모른다니까? 제법 재밌는 거 많던데?]
로메른은 그렇게 읽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애초에 진은 전부 읽을 생각이 없었다.
‘이걸 언제 다 읽어.’
잔뜩 쌓인 시나리오.
이걸 전부 읽는 것도 일이었다.
일하기 싫어서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이것들을 읽으며 일한다?
‘어림도 없지. 절대 안 하지.’
[그래서 괜찮은 거 뽑을 수 있겠어? 이런 걸론 이 감성을 못 느낀다니까?]
로메른은 다시 한번 설득하듯 말했지만, 진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니지. 그거 편견이야.’
[편견?]
‘진짜 대작은 세 줄 요약에서도 느껴진다니까. 그게 대작이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서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어?]
역으로 로메른이 설득됐다.
‘어. 음. 아직?’
세 줄 요약해도 시나리오가 워낙 많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세 줄을 읽어야 하는데, 솔직히 귀찮았다.
[아직은 무슨…… 읽을 생각 없지?]
그제야, 로메른은 진의 말에 현혹됐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라니까. 대륙에 희망을 전하는 건데, 내가 대충 하겠어?’
[하고도 남을 놈 같은데.]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싫다니까.’
[야!]
그런 장난도 잠시, 진은 성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예?]
‘네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 중 하나로 추진할 생각이야.’
[제 마음에 드는 걸로요?]
‘어. 우리는 교단을 중심으로 희망을 퍼트려야 돼. 그런 의미에선 성녀 네가 고르는 게 딱 맞을 거야.’
[그렇네요. 남아 있는 것도 빨리 읽고 말씀드릴게요.]
성녀는 의욕적으로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메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와. 이걸 루나한테 짬 때리네.]
‘짬이라니? 루나가 성녀라 감각이 있다니까? 이건 나보다 루나가 훨씬 적합한 인선이야.’
[핑계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게 더 열받아.]
그런 로메른을 향해 바라보던 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넌 왜 여기 와 있어? 차원 이동 연구는 끝났어?’
[일하기 싫어하는 녀석이 남이 일해야 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차린다니까.]
‘설마, 일하다 말고 온 거야? 너 그런 게으름뱅이였니?’
[……너한테 그럴 말을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로메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내가 해야 할 연구는 끝났어. 현자랑 폴카 쪽 연구는 내가 도중에 참여하기엔 애매해서.]
‘아. 일은 다 끝난 거야?’
[……그게 궁금한 거야? 무슨 연구인지는 안 궁금하고?]
‘어련히 알아서 잘하잖아. 게다가, 내가 듣는다고 아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그렇네. 아무튼, 얼마 안 걸릴 거야. 차원 이동 쪽은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면 돼.]
‘첫 번째한테 자료는 보내 주고 있지?’
[어. 걱정하지 마. 마지막에 괜한 오해로 파토 나는 건 사절이니까.]
그렇게 로메른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이거 좋은데요?]
루나가 괜찮은 걸 발견했는지 입을 열었다.
‘벌써? 좀 천천히 해도 되는데?’
[아니에요. 이것만큼 좋은 게 없는 거 같아요.]
[하하. 빨리 읽어 보라고.]
로메른이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이젠 진짜 일할 시간이었다.
진은 성녀가 건넨 시나리오를 받아 제목을 확인했다.
<대화>
심플한 제목이지만, 진이 보기엔 좀 의아했다.
‘대화라고? 지식의 해방과 우리의 싸움이 대화로 해결될 수 있는 거야?’
[그게 발상이 제법 재밌어요.]
진은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
자연스럽게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렇게 넘어가기 시작한 페이지는 마지막까지 빠르게 넘어갔다.
시나리오를 전부 읽은 진은 황당하단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거 누구야? 누가 쓴 거야?’
[진이 아는 악마예요.]
‘내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길레스와 바알이었다.
한데, 둘 다 아니었다.
‘……미모 후작?’
[예. 그녀가 쓴 시나리오에요.]
리치와 사랑에 빠진 악마.
미모 후작의 작품이었다.
‘이걸로 가자.’
이보다 좋은 작품은 없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미모 후작은 ‘진’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가장 재밌는 점은…….
투자 : 아길레스, 바알.
이 시나리오에 투자한 악마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 * *
며칠 뒤.
대륙 곳곳에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대도시, 중소도시, 마을, 촌락 등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 벽보가 붙었다.
사람들이 모여 그런 벽보를 살펴봤다.
“흐음.”
“이거 참…….”
“대체 누가…….”
원래라면 글을 읽지 못하는 평민들까지 전부 벽보에 적힌 내용을 읽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교단에서 추진한 천국의 아카데미를 통해 사람들은 글을 익혔으니까.
벽보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지식은 해방되어야 한다.
지식의 해방이 왕국에서 난리를 쳤을 때와 내용은 같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혀 달랐다.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어째서 저들은 귀족이고, 마법사며, 기사인데. 우리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채 평민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지식의 해방은 평민들에게 ‘의문’을 던졌다.
-귀족들은 정치에 관한 지식을 독점한다.
-마법사는 마법에 관한 지식을 독점한다.
-기사는 무에 관한 지식을 독점한다.
-우리는 어떤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독점하지 못했다. 그저 귀족들의 노예로 살아갈 뿐.
지식의 독점으로 인해 너희는 강제로 ‘평민’이 됐다고 호소했다.
-우리는 너희의 적이 아니다.
-이 독점을 깨부수고 싶을 뿐이다.
-지식을 해방해 모두가 자신의 재능에 맞는 삶을!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그저 독점된 지식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뿐.
…….
그 밑으로도 한참이나 적혀 있었지만, 똑같은 이야기였다.
그들이 내세우는 가치인 ‘해방’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적혀 있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어허. 이 사람 말조심하게.”
“아니. 그렇잖아.”
“하긴…… 우리도 배우면 되잖아.”
교단의 아카데미가 독이 됐다.
다들 ‘지식의 해방’이 걸어 놓은 벽보에 조금이나마 동감하고 있었으니까.
“다들 뭐 하는 거여. 성자님이 지식의 해방은 적이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아니. 틀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란 소리지!”
“그 입 조심하게. 귀족들이 들으면 좋아하겠어? 경을 칠 수도 있어!”
대륙이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은 모여서 지식의 해방이 내건 벽보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사제님. 벽보에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교단을 찾아오거나, 천국에 있는 사제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도 봤습니다. 형제님.”
“전 이 이야기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제들은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전 벽보를 보며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성자님께서 아카데미를 만드실 때 했던 이야기와 벽보의 내용은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허어. 그렇습니까?”
“예. 그러다 보니, 성자님과 지식의 해방이 다른 점이 보입니다.”
사제는 천천히 설명을 이어갔다.
“성자님께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천국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며 지식을 나누고 계십니다.”
행동하는 성자.
“한데, 지식의 해방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마음만 뒤흔들 뿐이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선동하기만 하는 지식의 해방.
“……그렇군요.”
“어째서 성자님께서 지식의 해방을 적으로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사제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내 진정하며, 지식의 해방의 말에도 그다지 반응하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국을 비롯한 몇몇 왕국에서 성명문을 발표했다.
<우리는 지식의 해방의 말에 동의하며, 무제한적으로 지식을 해방할 것을 천명한다.>
지식의 해방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나라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일반적인 왕국이 아닌 무려 ‘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로 오면 그대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대륙에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성명문을 내지 않은 왕국에서 때때로 반란이 일어나 새로운 왕국이 생기기도 했다.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해 보겠어!”
“아니. 이 사람아. 지식의 해방은 적이라니까!?”
“적은 무슨! 거대한 흐름일세!”
사람들이 나라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로 이동했다.
한데, 이걸 막을 수가 없었다.
지식의 해방을 지지하지 않은 왕국들은 반란군과 싸우랴, 외교적으로 싸우랴 너무 바빴다.
그렇게 급격한 속도로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 * *
지식의 해방의 수장.
첫 번째 지구인.
그녀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녀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황제와 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며, 그 새로운 세상의 주인은 여러분들입니다.”
이곳에 참여한 황제와 왕들은 ‘지식의 해방’에 신념에 동의한 자들이 아니었다.
욕심이 가득한 권력자였으며, 그 누구보다 지식을 독점하고 싶은 자들이었다.
“모든 지식은 이곳에 있는 여러분과 제가 공유하게 됩니다. 세상의 지식을 독점하고, 대륙마저도 우리가 독점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내게 더 많은 땅은 의미 없다. 영생, 영생을 다오.”
그가 바로 제국의 정점인 ‘황제’였다.
황제의 말에 다른 왕들의 눈이 빛났다.
“예. 드리겠습니다. 영생뿐만이 아니라, 젊었을 때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끌끌. 젊음이라.”
황제의 얼굴엔 지독한 탐욕이 넘실거렸다.
“지옥의 서열 2위인 바알 님께서 서열 1위에 오르게 된다면…… 여러분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좋다. 좋아! 그대는 언제나 날 실망시키지 않았지.”
첫 번째는 황제에게 간단히 목례한 뒤, 곧장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전에 제가 한 말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주셔야 원하시는 것을 받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에 모인 왕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이내 모두가 사라졌다.
그리고 회의장 한쪽에서 진이 나타났다.
“이야기는 잘된 거 같네요.”
“예. 욕심이 가득한 이들이니, 빠지거나 자리를 비우는 이들은 없을 거예요.”
“예. 그럼 준비는 끝이네요.”
시나리오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다음엔 제 영지에서 봐요.”
진은 그녀에게 인사한 뒤, 곧장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이제 모든 이야기의 끝까지 단 한 걸음만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