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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의 정령 천재-193화 (193/210)

193. 사기꾼과의 첫 만남

작은 원룸 안.

한 남자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마치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걸 직감했다.

행복하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살고 싶어.’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이렇게 죽기엔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후회만 가득했다.

아직 해 보지 못한 게 가득했다.

그때, 흐릿한 그의 시야에 한 남자가 보였다.

“아이고, 딱한 인생이네.”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나랑 계약할래? 뭐. 대가가 좀 필요하긴 하지만 좀 더 재미난 인생을 살 순 있을 거야.”

마치 악마처럼.

그는 대가를 요구했고, 달콤한 제안을 했다.

“대답할 필요는 없어. 그냥 생각하면 내게 보이니까.”

아니. 저건 ‘악마’가 확실했다.

“그거 악마들이 들으면 화낸다. 악마는 공평한 존재야.”

그의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 말뜻은 자신은 공평한 존재가 아니란 뜻이었다.

계약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약하자는 거야.”

그의 입가엔 얄미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난 악마처럼 공평하지 않아. 그보다는 협잡꾼이나 사기꾼에 가까우니까.”

협잡꾼과 사기꾼.

절대 계약하면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죽음 앞에선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기꾼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을 살 수만 있게 해 준다면, 무엇이든 대가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워워. 진정해. 내가 사기꾼이긴 해도 양아치는 아니야. 내 모토가 모두의 해피 엔딩이거든.”

모두의 해피 엔딩이라.

사기꾼이 할 법한 이야기였다.

“역시, 생각대로 재밌는 녀석이네. 딱 좋아. 사고 과정도 마음에 들고. 우리 윤 차사님이 진짜 확실하시다니까.”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근데 자신은 죽어 가는 중 아니었나?

이렇게 대화하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죽음을 잠시 유예해 둔 상태야. 내가 염라대왕님이랑 좀 친하거든.”

악마란 서양 세계관에서, 갑자기 저승인 동양 세계관으로 넘어왔다.

확실했다. 저놈 사기꾼이다.

“아니. 세계관은 내가 짠 게 아니야. 그건 이 세상을 설계한 놈한테 말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한번 물었다.

“어때, 계약할래?”

원래라면 저 손을 덥석 잡았겠지만, 이젠 아니다.

잡긴 하겠지만, 일단 계약 내용부터 듣고 잡을 생각이다.

물론. 그런 생각은 잠깐이었다.

목숨이 걸려 있는데, 이래도 되는 불안감이 들었다.

저자가 그냥 돌아가면 끝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계약 내용을 알고 싶다는 거잖아.”

그는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는 듯 계약 내용을 설명했다.

“너희 쪽에선 이고깽이라고 하나? 이 세계로 넘어가서 고등학생이 깽판 치는 거. 그거 한번 해 볼래? 이대깽 정도라고 하면 되겠네.”

……미친놈인가?

“왜? 죽어 가는 네 앞에 나타나는 건 되고, 이세계 가는 건 안 될 거 같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건 없는 거 같았다.

“마음껏 살아 봐. 적어도 이 답답한 세상보다는 재밌지 않겠어?”

하긴, 그것도 그랬다.

자신은 살고 싶은 거지.

이 지구에서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되살아나면 다 때려치우고 자유를 향해 떠날 테니까.

“그래. 기왕 자유를 만끽할 거면 마법과 검이 펼쳐진 세계로 가야지.”

만약, 중세 판타지라면 기왕이면 귀족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케이. 그 정돈 해 줄 수 있지.”

사기꾼이란 자기소개완 달리 꽤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다만, 대가가 필요하긴 하단 말 기억해? 네 이름과 열정을 가져갈 거야. 밸런스 패치 정도로 생각해. 네가 너무 의욕적으로 개판 칠까 봐 하는 패치니까.”

이름과 열정?

뭐 거창한 대가가 필요한가 싶었더니, 그런 게 아니었다.

“귀족가 도련님이 될 테니까. 좀 게을러도 괜찮잖아?”

괜찮다 못해 더 좋았다.

그냥 유유자적 살아가는 판타지 라이프라니.

그게 힐링 아닐까?

“그렇지. 힐링이나 푹 즐기면 된다니까. 어때?”

좋았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저자를 신뢰할 수 있냐는 점이었다.

물론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면 그냥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죽느냐 아니면, 저 사기꾼의 말을 믿어 보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믿어 봐야 했다.

“좋아. 자 그럼 계약서를 쓸까?”

계약서?

“뭐. 형식적인 거야. 아까 말했던 내용을 전부 적는다. 한글로도 적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는 그렇게 뚝딱 하고 계약서를 만든 뒤 확인시켜 주었다.

“어때?”

복잡할 수가 없는 계약서였다.

덕분에, 사기가 끼어들 영역도 없었고.

“그럼, 서명을…… 못하니까 지장 찍는다?”

하긴 그 방법뿐이겠지.

그렇게 지장을 찍기 위해, 녀석이 계약서를 가까이 가져다 댔을 때.

계약서 뒷면에 빼곡이 적힌 글씨가 얼핏 보였다.

잠깐! 그거 뭐야!?

그 물음의 해답은 들을 수 없었다.

“어이쿠. 이미 지장을 찍었는걸?”

야, 이 사기꾼아!

“그러니까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했어야…… 약관도 잘 읽어 보고.”

아니. 움직이질 못해서 확인을 못했는데!?

애초에 뒷장에 뭐가 그렇게 많이 적혀 있는데!

“뭐. 나름의 안전장치?”

누구를 위한?!

“당연히 모두를 위한 안전장치지. 말했지? 난 모두의 해피 엔딩이 목표라고.”

야! 이 사기꾼아!

“난 이 순간이 제일 좋더라. 그럼, 좋은 여행 해. 그리고, 내가 한 말 잊지 마. 난 모두의 해피 엔딩을 원해.”

그와의 첫 번째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전혀 다른 세계에 도착해 있었다. 그 사기꾼 놈이 계약대로 다른 세계로 보내 준 것이다.

이름과 열정을 잃었고, 귀족가의 아들도 맞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도 치명적인 문제가!

[약속과 다르잖아 이건!]

‘약속? 무슨 약속? 넌 대체 누구야?’

주인이 있는 몸에 들어왔다는 게 문제였다. 그것도 다 죽어가는 녀석의 몸이었다.

[그러게. 내가 누굴까? 불청객?]

‘악마!? 나의 몸을 노리는 것이냐!?’

[어. 그렇게 대단한 거면 좋을 텐데, 그 내가 몸을 노릴 수도 있는 거야? 그건 좀 땡기는데.]

‘역시 나의 몸을 뺏으러 온 녀석이구나!’

[아니다. 아 귀찮은데. 그냥 우리 이렇게 지내면 안 될까?]

‘뭐?’

[아파서 혼자 지내는 거 같은데, 말동무나 하면서 지내자고. 방해 안 할게.]

‘그, 그게 무슨…….’

그렇게 병약한 꼬맹이와 함께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의외로 이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심심하면 녀석이 하는 것도 구경하고, 재밌게 보면서.

[안녕. 난 척추의 요정이야. 벌써 독서만 몇 시간째니? 너 허리 나간다. 빨리 펴. 피는 김에 마법 좀 보여 주고. 그거 멋지더라.]

훈수하는 건 꽤 재미난 일이었다.

‘벌써 그렇게 됐어? 알겠어. 이젠 마법 연습할게.’

꼬맹이인 녀석이 이해심도 넓었고, 어른스럽기도 했다.

다만, 몇 가지 답답한 점도 있었다.

[어? 빌리 저 새끼 저거 너 깔보고 있는 거리니까? 대장? 친구사이에 대장이 어디 있어?]

‘내 하나뿐인 친구야.’

[저게 무슨 친구야? 그리고, 내가 있는데 왜 하나뿐이야?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쳐내!]

‘그러네. 네가 있어.’

[아씨. 이상한 데서 감동하지 말고 저 싹수없는 놈 쳐내라고!]

녀석은 너무 순둥순둥했다.

이용해 먹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그걸 과감히 쳐내질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형들의 존재였다.

[네가 못하겠는 건, 형들한테 부탁해. 특히 그 검 쓰는 형. 그 양반 아주 인싸더만.]

‘인싸?’

[아 또 이상한데 꽂히지 말고!]

녀석과 함께하는 시간은 참 즐거웠다.

뭐.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기도 했고.

[후. 이제는 지구의 지식을 풀 수밖에 없겠네. 네 심장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줄게.]

‘어? 그런 게 있어?’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성은 여자 가슴을 10분 이상 바라보면, 수명이 증가하고 심장 질환에 도움이 돼.]

‘정말?’

[그럼, 지구의 과학적 연구 결과라 이거야. 츄라이, 츄라이.]

놀랍게도 이런 장난이 꽤 큰 도움이 됐다.

‘성적 흥분을 이용해 심장 박동 수를 늘려 혈액 순환을 하는 게 건강과 의미가 있다는 건가?’

[어?]

‘이건 확실히 효과가 있겠어. 정말 고마워. 단서가 잡힌 거 같아.’

[……이게 지구의 지식이야.]

그제야, 사기꾼이 왜 이 녀석의 몸에 자신을 집어넣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네가 용사구나.]

‘응?’

[아니.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좀 알 거 같아서.]

이 꼬맹이가 모두의 해피 엔딩을 완성하는 게 확실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녀석은 몸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때마다 동료들이 늘어났다.

“육체에 관해 알고 싶어서 날 찾아왔다고? 어?! 네가 진 플린트라고? 마나의 다중융합 논문을 쓴?!”

흑마법사 로메른을 만났고.

“빛께서 절 이끄셨습니다. 당신의 병을 치료하라는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성녀인 루나를 만났고.

“고맙다. 내 이리 어린 친우들의 도움을 받을 줄 몰랐군. 치료를 위해 여행을 한다지. 내 도와주지.”

검성을 만났다.

그들은 현자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여행했고, 다양한 사건을 마주했다.

물론. 중간중간 문제가 있긴 했다.

“아, 그냥 죽이라니까!”

“죽이다니.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말게.”

“맞아. 기회를 줘야 돼.”

“아. 이 답답한 새끼들! 저거 반성 안 한다니까!?”

서로를 인정할 만큼 천재들인 만큼, 각각의 성향이 너무나 달랐다.

[로메른 말대로 죽이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이게 다 복선이라니까? 살려 주고 가면 따라와요.]

‘아니야. 난 인간이 그렇게 악하지 않다고 믿어.’

[노답이네 진짜. 너 후회한다니까? 어차피 죽여도 후회하고 안 죽여도 후회할 거면, 차라리 후환이라도 없어야지!]

솔직히 말하면 ‘로메른’의 의견이 대부분 맞았지만, 매번 무시당했다.

현자는 언제나 ‘선의’를 갖고 인간을 믿었지만, 그 선의는 ‘악의’로 돌아왔다.

“내가 뭐랬어! 죽이자고 했지! 이게 뭔 난리야!”

[옳소! 과감할 땐 과감해야 한다!]

로메른이 잔소리할 때 함께 잔소리하는 건, 그나마 상황이 좋을 때였다.

“미안해.”

“됐어. 끝까지 못 말린 내가 잘못이지. 네 고결한 마음은 알겠지만, 인간에 대한 기대를 좀 버려.”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답답한 놈아.”

[이 노답아.]

상황이 진짜 심각하면 잔소리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한 현자의 ‘선의’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세상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일까?

세상은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역사상 최악의 사고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것만 같았다.

천재가 4명이나 있음에도 역부족이었다.

인류는 무너졌고 영웅은 패배했다.

[딱 회귀물 클리셰긴 한데.]

‘뭐?’

[아. 예전에 지구에서 봤던 소설 이야기야. 이대깽이 아니라, 혹시 회귀물인가 싶어서.]

‘회귀?’

[이쪽은 그런 발상이 없나? 시간을 되돌려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이거야.’

[뭐가?]

‘전부 되돌리는 거야. 내 잘못을 바로잡는 거야.’

[야. 잠깐만 네가 그럴 때마다 상황이 안 좋아지는 거 같던데?]

그 물음에 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진짜 내가 배우 하나는 잘 골랐다니까. 알아서 회귀까지 도달했네?”

뺀질거리는 저 얼굴.

그게 사기꾼과의 2번째 만남이었다.

[야! 이 사기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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