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막타의 의미
막타란 말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지구 쪽 지식을 확인한 정령들은 깜짝 놀라 진을 바라봤다.
[……진심이야?]
‘어. 왜 안 될 거 있어?’
[저들은 호의로 우릴 도와주는 거야. 괜한 적을 만드는 거라고.]
로메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괜히 막타 쳤다가 투자금 회수한다고 세계 자체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 호의가 순수한 호의라고 생각해?’
그렇다고 하기엔, 투자금이니 뭐니 세속적인 이야기가 들어가 있었다.
[나름 이득을 챙기긴 하지만, 어쨌든 호의로 접근한 거 아니야?]
‘아니. 그렇다고 보기엔 해결 방법이 너무 복잡해.’
[복잡하다고?]
‘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2가지나 있어.’
[하나가 뭔지는 대충 예상되네. 신이 대신 와서 때려잡는 거지?]
‘맞아. 그게 아니면, 때려잡을 사람을 만들면 돼. 우리 쪽에 관리자가 생기면 되는 거지.’
[하긴, 그것도 그렇네. 결국 관리자가 없어서 벌어진 문제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저런 간단한 방법이 아닌, 복잡한 방법을 사용했을까?
그것도 회귀란 값비싼 대가를 치러 가면서?
[관리자를 만드는 게 너무 어려워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다고 선택지에서 아예 배제한다고? 나라면 동시에 추진할 거 같은데?’
[쓰읍. 그것도 그렇네.]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대신, 신들은 인간을 보낸 거야.’
[확실히 네 말대로 이상해.]
슬슬 로메른도 저들의 호의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진은 저 의문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왜 판을 짜는 데 최고인 인간을 보냈을까? 애초에 그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아마 꽤 대단한 직책을 가진 인간 아닐까? 전쟁 영웅쯤 되겠지.]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투자금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변했어. 아마도 유능한 장군이면서 정치가일 거야.’
손익을 따질 줄 알면서, 전투에 승리할 만한 능력을 지닌 자.
[……그걸 만족하는 건 하나밖에 없잖아.]
로메른은 진의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어. 아마 황제 정도 되는 인간일 거야. 신화에 기록될 만한 황제. 그 정도는 되겠지.’
[하긴, 그 정도는 돼야 신이 일을 맡길 만하겠지.]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장군’을 보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장군이며 동시에 정치가인 ‘황제’를 보냈다.
‘그런 인간을 불러서 일을 시켰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해.’
[단순히 승리를 위한 인선이 아니란 뜻이지?]
‘맞아. 사실 전쟁은 이미 끝나지 않았어?’
지식의 해방은 분쇄되었고, 더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
녀석의 낙인은 진이 훔쳐 먹었고, 녀석은 세계에 간섭할 모든 수단을 잃었다.
이미, 전쟁은 끝났다.
그런데도 위쪽에선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부러 끝내지 않는 거야. 골수까지 빨아먹기 위해서.’
[……네 말대로네. 이건 신이니 관리자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로메른은 대충 감을 잡은 거 같았다.
‘맞아. 이건 선한 신들이 침공받는 세계를 구해 주는 희망찬 이야기가 아니야.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났어.’
[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거지?]
‘맞아. 이 전쟁은 비즈니스가 된거야.’
[투자금 이상을 회수할 수 있는 사업일 테니까. 하. 판 잘 짠다는 게 진짠 거 같은데? 완벽하네. 세계는 구했고, 사업도 호황일 테고.]
그렇다고 그들이 악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보여 준 건 ‘호의’가 맞았고, 침공받은 이 세계에 그들이 참전해서 실제로 ‘구원’받았으니까.
승리한 그들이 투자금 회수한다고 해서, 이쪽에 손해가 되는 것도 없었다.
다만, 문제는…….
‘이 사업에 끼지 못한 게 묘하게 손해 보는 기분이라는 거지.’
[솔직히 구해 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란 심보 같아 보이긴 하는데…… 나도 동감이야.]
‘거기다 좀 노골적인 게 살짝 열받기도 하고.’
[아! 그래서 관리자를 안 만든 거야!?]
로메른은 핵심을 파악했다.
‘맞아. 관리자 대신 왕의 후보로 관리자를 대체한다는 이유가 뭘까?’
[관리자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싸기도 할 테고.]
‘우리 쪽에 관리자가 없어야. 저 위쪽 사업이 된다는 거지.’
[……이 양반들이 진짜.]
‘뭐, 악의가 있는 건 아니야. 생각해 보면 아무도 손해 보는 거 없으니까.’
물론. 이 사업을 진이 몰랐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막타 쳐야 된다고 한 거야.’
[이러면 못 참지. 그래도 조심하긴 해야 돼.]
‘당연하지. 그러니까 실수여야 돼.’
[실수?]
‘실수로 우리 쪽에서 관리자가 나오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될까?’
주인 없는 곳에서 사업하던 곳에, 주인이 나타나는 것이다.
[……막타네.]
‘그렇지. 막타야.’
[근데, 관리자는 누가 되는데? 진 네가 신이 되는 거야?]
‘내가 할거 같아? 애초에 신이 돼서 좋은 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 되는 건 별로였다.
왕의 후보들이 있으니 생각만큼 귀찮진 않겠지만, 그래도 귀찮을 게 확실했다.
게다가, 이번에 확신이 들었다.
‘그 신들이 불러왔다는 인간만 해도 그래. 관리자가 그렇게 좋으면 왜 안 할까?’
[황제니까? 아니지. 신이 되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진이 떠올렸던 의문을 로메른이 똑같이 떠올리고 있었다.
‘그 똑똑한 인간이 거절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야. 일단 그건 보류하자.’
[……그럼 어떻게 하게?]
‘조금 다르게 접근해 봐야지.’
꼭 신이 될 필요는 없었다.
결국 막타를 칠 수 있냐 없냐가 중요한 거니까.
* * *
진은 제일 먼저 진행 중인 연구를 일시 중지했다.
‘차원 이동 관련 연구 쪽 축소해.’
[왜? 우선 순위를 따지면 이쪽이 먼저 아니야?]
‘축소라니까. 취소가 아니라.’
[자세히 설명해 봐.]
‘지구 쪽 차원 좌표 구하는 게 제일 어렵다고 하지 않았어? 그쪽에 거의 모든 자원 투자하고 있다며.’
[아! 차원 좌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그 말대로였다.
명계에 있는 ‘윤 차사’.
그쪽에게 지구쪽 차원 좌표를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다른 걸 연구해 보자.’
[다른 거? 관리자가 된다는 그거 말하는 거지?]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관리자가 되지 않으면서 뭔가 관리자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그런 편리한 게 있어?]
‘있어. 윤 차사 그 양반을 만난 게 우리한텐 기연이나 마찬가지야.’
[흐음. 대체 뭔데?]
이건 로메른도 감이 안 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쪽 대륙적 관점으로 보면 어려운 일이다.
이건 지구 쪽 관점에 가까우니까.
‘관리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보호막. 그거 우리가 먹자.’
[……그걸? 신이 만든 걸? 그게 가능한가? 아니지. 가능한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건…….]
‘네 생각대로야. 만약 그걸 우리가 먹는다면, 관리자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어?’
로메른은 진의 말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뭘 하려는진 알겠어. 그럼 어떻게 차지할지 방법도 알고 있는 거지?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해야지 같은 소리만 해 봐.]
이번엔 아니었다.
발상 자체는 진이 줄 생각이었다.
이미 생각해 둔 방법이 있었다.
‘윤 차사의 말을 듣다 보니 든 생각인데, 바즈라 걔 좀 이상하지 않아? 후보라고 하기엔 임명받은 것도 없잖아.’
[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일종의 오류가 아닐까?’
[오류?]
‘세계수는 왕 후보같은 게 없는 거지. 근데, 그 자리를 바즈라가 차지한거고.’
[하긴, 바즈라의 변화를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야.]
그 말대로였다.
바즈라의 변화는 극적이다 못해 과할 정도였다.
이미 공석이었던 곳을 녀석이 차지한 게 아닐까 하는 추론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석을 이용하자.’
[그 녀석을?]
‘어. 윤 차사의 말대로면 관리자 바로 아래의 힘을 지닌 존재잖아.’
[그렇지. 왕의 후보가 아니라, 이미 왕일 테니까.]
‘거기에 내 영혼에 저장된 힘을 지원해 주면?’
[……잠깐이긴 하지만 거의 관리자에 가까운 힘을 사용할 수 있겠지.]
‘그렇지! 그때, 해킹을 하는 거야.’
[해킹?]
‘지구 쪽 자료 확인해 봐. 마법이랑 비슷한 구석이 꽤 있을 거야.’
로메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내 지구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마법사들의 영역 싸움이랑 비슷한 거 같네.]
‘어?’
[영역을 만들어 마나를 지배하에 두고, 상대 마법에 개입하는 거야. 아무튼 해킹이랑 비슷해.]
‘그거 딱이네. 바즈라를 이용해서 그걸 하는 거야.’
정확히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건 정령들의 일이었다.
[소유주를 이전하자 이거지?]
‘당연하지. 세계수가 세계를 지키는 보호막을 관리한다. 딱 좋잖아.’
[겸사겸사 불법 사업하는 친구들한테 세금도 받고?]
‘바로 그거지.’
이게 바로 진이 구상한 막타다.
* * *
며칠 뒤.
연구에 푹 빠져 있던 로메른이 진 앞에 불쑥 나타났다.
[우리쪽에서 나름대로 구상을 해 봤는데, 결국 이게 가능하려면 바즈라가 세계의 근원에 접촉해야 돼.]
‘세계의 근원?’
[어. 세상의 근원이라 불리는…… 이론상에서만 등장하는 개념이야.]
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저게 뭔지 눈곱만큼도 궁금하지 않았다.
연구하던 녀석이 갑작스레 찾아왔다면, 필요한 게 있단 뜻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일단 바즈라한테 그 영혼의 힘을 주입해야 할 거 같아.]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라는 거지?’
[맞아.]
‘실패할 수도 있는 거고?’
[그것도 맞고.]
원래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영혼에 저장된 신의 힘.
이건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힘이다. 이것이 있어야 지구인을 되돌려 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더 큰 돈을 벌려면 언제나 투자가 필요한 법이지.’
계획대로 일만 진행되면, 세금 명목으로 뜯어내면 될 일이었다.
‘알겠어. 진행해 보자.’
[실패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텐데 괜찮겠어?]
‘뭐. 괜찮아. 차선책도 있잖아.’
[차선책?]
‘왕들의 힘을 모으면, 관리자급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잖아. 실패해도 왕들을 설득해서 힘을 받으면 돼.’
[하긴 그것도 그렇네.]
이 힘을 모조리 잃어버린다고 해도, 지구인들을 보낼 방법은 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
‘내가 할 일이 있어?’
[딱히 없어. 그냥 누워서 구경이나 하면 돼.]
그렇다면야 전혀 문제가 될 거 없었다.
‘알아서 시작해. 난 준비됐으니까.’
잠시 후.
땅 위로 세계수 뿌리가 하나 튀어나오더니, 분신용으로 심어 둔 진의 가짜 머리카락과 연결됐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와…….’
진과 바즈라가 연결됐다.
세계수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진에게 전해졌다.
풍요로운 자연.
엘프의 사랑.
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데,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약간의 탄력감이 들거야.]
로메른의 말과 함께, 진의 영혼에 담긴 힘이 세계수에 전해졌고, 상상도 하지 못한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세상 그 자체가 느껴졌다.
그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감각에 진은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