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세상의 비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쪽엔 훨씬 더 뛰어난 기술이 있었으니까.
‘기억 열어. 이건 직접 봐야겠어.’
[알겠어. 다 같이 보자.]
잠시 후.
눈 앞이 암전하며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허공에서 ‘현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여긴 대체…….]
처음 보는 건물 양식에 현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또 다른 공간이었으니.
그때, 바로 옆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기운.
“이야. 드래곤은 나도 처음 보는데?”
현자는 바로 옆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그의 말투는 경박했지만, 위엄이 서려 있었다.
현자는 마치 천적을 만난 것처럼 온몸을 움츠러뜨렸다.
“아이고, 생각보다 너무 약하잖아?”
그 말과 함께, 몸을 옥죄던 기운이 전부 사라졌다.
그제야 현자는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이야. 정면은 더 멋있는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떨리는 현자의 목소리에 그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리 겁낼 것 없어. 난 염라 윤 차사야. 대왕이니 뭐니 하는데, 그건 좀 오그라들더라고.”
[염라대왕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냥 윤 차사라고 부르면 돼. 어차피 우리 세계에 속한 것도 아니니까.”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현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 세계가 아니란 건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야. 이곳은 너희 세계에 소속된 곳이 아니야. 일종의 협력 세계라고 생각하면 돼.”
[……협력 세계 말입니까?]
“어. 대충 그렇게 이해하면 돼.”
진이라면 몰라도 현자는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안 될 건 없지. 뭐가 궁금한데?”
[협력 세계라는 건 처음 들어봤습니다. 애초에 그런 게 왜 필요한 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오. 여기 왜 끌고 왔냐가 먼저 나올 줄 알았더니.”
[그건, 조금 뒤에 묻겠습니다.]
윤 차사는 현자를 빤히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꽤 쓸만해 보이네.”
[……예?]
“아. 칭찬이야. 아무튼 협력 세계가 있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이야. 원래라면 협력 세계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너희 세계는 좀 달라.”
[무엇이 다른 겁니까?]
“니네 관리자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관리자라면, 신 말씀이십니까?]
“뭐. 그렇게도 불리지. 개인적으론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제야, 현자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와 대화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럼, 윤 차사님도 ‘신’이십니까?”
현자의 물음에 윤 차사는 피식 웃었다.
[내가 신처럼 보여?]
“……잘 모르겠습니다.”
허물없는 모습만 보면 동네 형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그 힘을 생각하면…….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치? 나 같은 놈이 신은 무슨. 그냥 이 명계란 곳을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이야.”
관리자라는 건…….
‘역시, 신이 맞았어.’
다만, 좀 의아한 점이 있었다.
[명계란 세계는 처음 들어 봤습니다.]
“영계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너네 세계가 문제란 거야. 관리자란 놈이 일을 이따위로 하니까.”
[대체 어떤 문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너네 관리자가 욕심을 너무 부렸다고 아까 말했지? 사제들한테 개짓거리를 해 놨더만?”
[……사제 말입니까?]
“무욕하고, 신과 세상만 생각하는 완벽한 사제. 이게 정상 같아 보여?”
빛의 교단 이야기였다.
완벽하고 삿된 욕심을 죄라 생각하는 이들.
그의 말대로 완벽한 사제였다.
[그게 신 때문이란 말씀이십니까?]
“어. 거기에 힘을 전부 때려 박은 거야.”
[……그게 큰 문제입니까?]
“당연히 큰 문제지. 모든 힘을 소진하고 소멸했거든.”
[예?!]
“너희 세계엔 관리자가 없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직도 신성력이 존재합니다.]
“소멸하기 전에 만들어 둔 거야. 자신이 없어도 여전히 신성력이 생기도록.”
[대체 왜…….]
“아마 너네 관리자는 세상에 ‘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거 같아. 아마도 인간들을 믿은 거겠지. 아주 낭만적인 양반이야.”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관리자로선 최악이지만.”
신이 없다는 비밀을 깨닫자 혼란이 밀려왔지만, 현자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혼란해할 때가 아니었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 했다.
[그래서 협력 세계가 생긴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너네 관리자의 생각대로 세상은 꽤 잘 굴러갔어. 관리자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다면 문제가 될 건 하나뿐이었다.
[관리자가 없는 틈을 노린 자가 나타난 게 문제인가 보군요.]
지구인을 보낸 ‘누군가’.
그의 등장으로 상황이 변한 것이다.
“맞아. 관리자가 없으니 얼마나 군침들이 돌았겠어. 침략이 시작된 거야. 그나마 다행히 너희 관리자가 빡대가리는 아니었다는 거야.”
[대비가 세워져 있었습니까?]
“어. 너희 관리자는 자기가 소멸할 걸 알고 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멸하는 것을 이용해 보호막을 만들었어. 대충 관리자를 갈아서 만든 보호막이라고 생각하면 돼.”
신의 존재 자체가 새겨진 보호막.
“그러니까 직접적인 공격 대신 지구인들을 보낸 거야.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돼. 지구의 영계는 내가 관리하거든.”
그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 개자식이 내 영역에 속한 영혼에 손을 댄 거야.”
현자의 고개는 자동으로 수그러들었다.
무서웠다.
얼핏 본 표정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왔다.
“더 열받는 건, 내가 관리자라 움직이질 못하네? 아! 그림 리퍼 녀석한테 관리자직을 줬어야 했는데! 자아 찾기 여행은 왜 보내 가지고!”
그 말을 끝으로 현자를 감싼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졌다.
“뭐. 내가 간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테니 상관없으려나?”
[예?]
“아. 내가 갈 수 없어서 다른 사람한테 부탁을 했거든.”
그의 얼굴엔 어느새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관리자가 아니라 사람을 보냈단 말씀이십니까?]
“어. 여러 가지 의미로 최강인 녀석을 보냈거든.”
[……관리자가 아닌데도 그런 힘을 가진 자가 존재하는 겁니까?]
“뭐. 힘이 관리자급인 건 아니야. 그래도 설계 하나는 관리자를 뛰어넘는 녀석이지.”
현자는 그게 누군지 대충 이해가 됐다.
저 위에서 싸우고 있는 ‘존재’.
그게 바로 윤 차사가 말하는 인간인 거 같았다.
“너희만 해도 좀 달라졌지? 회귀한 다음부터?”
[회귀를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정말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여러 세계에서 십시일반 힘을 모아서 되돌린 거야.”
이건 충격이었다.
존재를 바쳐 가며 시간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도와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저희의 힘으로 돌린 게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외부에 관리자급 녀석까지 있는데, 그게 가능하면 니들이 신이지.”
[그럼, 저희를 믿으신 겁니까?]
“아니. 너희를 뭘 보고 믿어? 그 녀석이 좋은 아이디어라길래 다들 힘을 보탠 거야.”
[…….]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신’들이 이토록 신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세계를 위해 신들은 숭고한 결정을 내린…….
“게다가, 투자금은 전부 회수해준다고 했거든.”
[……예?]
환상이 부서졌다.
세속적인 눈빛과 얼굴.
“등쳐먹다 못해 뼈까지 푹 고아서 가져올걸? 내가 직접 안 가길 잘했다니까. 내가 갔어 봐야 적자야, 적자.”
위엄 넘치던 염라대왕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세속에 찌든 남자가 채우기 시작했다.
“어? 너 눈빛이 무엄하다?”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게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니까? 관리자는 예산과 싸우는 사람이야. 예산이 전부라고!”
그래. 신들도 고충이 있겠지.
현자는 애써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예.]
“후. 아무튼 위쪽은 신경 쓰지 마. 그쪽은 우리가 해결해 줄게.”
[저희는 아래쪽만 수습하면 된단 말씀이십니까?]
“어. 그것만 해 주면 충분해. 게다가, 왕들도 곧 선출될 테니 세계도 안정화될 거야.”
저게 어떤 ‘왕’인지는 대충 감이 잡혔다.
[정령들을 이용하실 생각이시군요.]
“정답이야. 더 다양한 속성을 만들고, 왕들을 키워서 불균형을 바로 잡을 거야. 그 체계가 자리잡히면 협력 세계도 필요 없어질 테니까.”
원래라면 저 말에 감동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도와주고, 독립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면을 살펴본 지금.
[혹, 예산 때문입니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 하난 빠르네. 그런 이유도 있지.”
역시나 생각대로였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걱정이 좀 돼서 직접적으로 여쭤봤습니다.]
“무슨 걱정?”
[왕을 만드신다는 말씀은 관리자에 준하는 존재를 여럿 만드신다는 뜻인 거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지. 너희는 관리자가 만들어질 수 없는 구조야. 그러니 차선을 선택한 거지. 왕의 힘을 전부 합치면 웬만한 관리자의 힘과 비슷할걸?”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다수의 힘인 이상 모두의 힘을 합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현자의 말을 들은 윤 차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진 알겠는데,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해야지.”
그의 말대로였다.
현자는 곧장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걱정이 앞서서 나온 말입니다.]
“알아. 진짜 해 달라고 떼쓰는 거 같았으면, 말로 안 했을 테니까.”
편안하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그는 ‘신’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 잘 이야기했어. 문제점을 인지했으니 해결 방법을 강구해 보면 될 일이니까.”
[예. 나머지는 동료들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래.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볼까? 넌 이제 영혼의 정령왕 후보야.”
막상 이곳에 온 이유는 제일 빠르게 끝났다.
[……끝입니까?]
“어. 끝이야. 이미 힘을 얻었을 때 자격은 부여받으니까. 대충 의문은 해소된 거 같으니 돌아가 봐.”
그는 축객령을 내렸다.
현자는 돌아가기 전, 여태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유를 떠나, 저희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윤 차사가 씩 웃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네. 더 마음에 들기 전에 빨리 가 봐.”
그 말과 함께, 기억은 끝이 났다.
* * *
기억이 끝나고,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큰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로메른은 생각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고.
[신이시여. 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존재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녀는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허허…….]
검성은 헛웃음만 흘렸다.
저마나 다른 반응이었지만, 신이니 관리자니 하는 이야기에 다들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 똑같았다.
한데, 진의 반응은 달랐다.
‘하. 이렇게 된 이야기라 이거지?’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 괜찮아?]
‘어. 오히려 이야기가 쉬워서 다행이야.’
[쉽다고?]
‘경지네 뭐네 했으면 내가 손쓸 방법이 없었겠지만, 예산이니 투자금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면 좀 다르지.’
[그거야 비유적 표현 아니야?]
‘뭐. 그렇긴 하겠지.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이 뭔지 확실히 감이 잡히네.’
[……할 일이야 염라대왕이 다 짚어 준 거 아니야?]
‘그거야 그쪽 생각이고.’
진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저쪽에 차려진 밥상에 수저를 올려야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막타 친다는 소리지.’